설교영상

나귀 새끼를 타신 왕

믿음찬교회 0 263 2022.02.23 18:46
나귀 새끼를 타신 왕
마 21:1~5
2022.02.20.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첫째, 스가랴서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왕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왕이신데 어떤 왕이신가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스가랴서의 예언을 말씀합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왕과 다른, 겸손한 왕이시기 때문에 나귀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이 스가랴서의 예언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스가랴 선지자로부터 나왔다면 400~500년 정도 되고, 스가랴 선지자가 아닌 한 익명의 선지자로부터 나왔다면 200~300년 정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과 관련하여 이 스가랴 예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나온 특별한 예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49:8~11에 나오는 야곱의 예언입니다.
창세기 49장에는 임종을 앞 둔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한 사람씩 예언해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야곱은 4번째 아들 유다에게 이렇게 예언합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이 말씀을 보는 대부분의 분들은 이 말씀을 오랜 메시야 예언으로 봅니다. 여기서 ‘실로가 오시기까지’ 라는 말씀은 해석이 조금 어려운데, 가장 유력한 해석은 ‘그가 자기에게 속한 그것에 오시기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번역한 영어성경이 많습니다.
아무튼 이 예언은 유다를 가리키는 동시에 유다 지파에서 나올 메시아를 가리키는데, 그 메시아 예언의 내용은 첫째 그는 자기에게 속한 그것에 오실 것이고, 둘째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고, 셋째 그는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맬 것이고, 넷째 그는 자기 옷을 포도주에 빨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내용에 자연히 관심이 갑니다. “그는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맬 것이다” 이 예언은 이것이 유다 지파에 대한 예언이라면, 유다 지파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미래를 말하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메시아 예언이라면, 그는 나귀와 깊은 관련성을 가진 메시아이자 왕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예언입니다. 나귀는 그분을 설명하는 중요한 상징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살펴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라는 동물을 통해 창세기와 스가랴서와 마태복음이 예언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창세기의 야곱의 예언은 그 시기가 언제쯤일까요? 무려 기원전 2,000년 정도입니다. 2,000년 전의 야곱의 예언이 200~300년 혹은 400~500년 전의 스가랴의 예언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오늘 본문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이와 같은 오랜 역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는데,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2~3살 정도된 나귀 새끼는 충분히 성인 한 사람을 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무엇을 말하시려고 그렇게 하셨을까요? 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일반적인 세상 왕과 다른 왕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는 대부분의 우리 교회들은 이 ‘나귀’에 잘 주목하지 않습니다. ‘스가랴서의 예언을 따라 그렇게 하셨나 보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니까 그렇게 하셨나 보다...’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그 대신 우리는 다른 내용에 더 관심을 갖죠.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자주 우리가 설교로 듣는 내용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권위, 나귀를 빌려준 주인의 순종과 헌신... 어떤 분은 예수님을 등에 태운 나귀의 수고와 헌신에 대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중요한 초점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바로 ‘나귀’입니다. 이 예언의 오랜 역사를 생각할 때, 나귀를 통해 말씀하시는 중요한 내용이 있는 줄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왕은 승리의 입성을 할 때 ‘말’을 탑니다. 간혹 ‘노새’를 타는 경우도 있습니다. ‘노새’는 ‘나귀’보다는 크고 ‘말’보다는 작죠. ‘말’은 너무 높지만 ‘노새’는 적당히 높아서 타기에 좋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울 때 솔로몬을 자기의 ‘노새’에 태우라고 지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 ‘나귀’를 타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귀’를 타면 별로 볼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나 타면 모를까 전혀 성인 어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요새로 말하면, 공식행사에서 대통령이 경찰과 경호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대통령 전용차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낯설고 어색한 모습을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예수님이 자신을 일반적인 세상 왕과 비교하여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큰 힘과 권력과 위엄을 갖춘 세상 왕과 완전히 다른 평화의 왕, 겸손의 왕, 섬김의 왕... 예수님은 자신을 그런 낯선 왕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거기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을 왕과 메시아로 찬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하면서 말이죠.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대부분 갈릴리에서 올라온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압니다. 그분의 사역과 말씀과 기적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열렬히 환영합니다. 반면에 거기에 순수 예루살렘 사람들은 많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다니에서 놀라운 나사로의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예루살렘 성은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말하면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과 그분을 찬양하는 사람들과 그분을 보고 소동하는 사람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까지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다면,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 질문은 ‘만약 당신이 거기 있었다면 그렇게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당신은 오늘날 나귀를 타신 그런 예수님을 아무런 고민이나 어색함 없이 나의 왕으로 영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단순한 성경지식은 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내 삶을 변화시키려면, ;내가 그런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우리가 대답해야 합니다.

오랜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에겐 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왕을 원할 때 사람들이 어떤 왕을 원하는지 항상 그 생각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왕을 요구할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다...”
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원한 이유입니다.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우는 왕... 그들은 그런 왕을 원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는 이후 인간의 모든 역사 속에서 그리고 지금도 동일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나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 우리는 강한 힘과 능력을 가진 왕을 원합니다. 그 왕이 얼마나 선하고 옳은지는 잘 보지 않습니다. 그 왕이 얼마나 맨 앞에서 나의 싸움을 싸워주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때는 그것이 전쟁이었고 지금은 그것이 나의 재물과 이익과 안전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백성들의 그와 같은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렇게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를 위하여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왕을 선택하는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스라갸 선지자 시대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스가랴 11장을 보면, 그때의 백성들도 자신들의 목자를 선택하면서... 선한 목자가 아니라 난폭한 악한 목자를 선택하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백성들의 그와 같은 모습을 본 그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그 선지자는 그 양 떼를 떠나면서 은총과 연합이라는 막대기를 꺾고 은 30의 품삯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은 30을 여호와의 전에서 우상을 제조하는 토기장이에게 던져버립니다. 
이후 하나님은 선한 목자를 버린 그 양 떼에게 다른 한 목자를 세우십니다. 그 목자는 없어진 양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양을 찾지 아니하며 상한 양을 고치지 아니하며 오히려 살진 양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는 악한 목자였습니다.
이 스가랴서 말씀은 당시 백성들이 선하고 올바른 목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목자를 선택하는 안타까운 모습과 그 결과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말씀은 메시아 예언이 되어 이후 유대 백성들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오히려 악한 목자를 선택하는 비참한 결과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왕을 선택하고 지도자를 선택하는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은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고린도교회를 세운 사도 바울은 겸손한 주의 종이었습니다. 비록 고린도교회를 세웠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나중에 지도자들을 세우고 그 교회를 떠난 후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후 그 교회에 어떤 신비주의 선생들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은사를 자랑하고 그 신자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들을 분별하지 못하고,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그 신자들은 그들의 종이 되고 잡아먹히고 빼앗기고 뺨을 맞고도 그들을 용납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와 신자들은 그 거짓 선생들의 힘과 능력과 자랑과 은사에 현혹되어, 그들을 자기 지도자로 섬기며 그들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고린도교회를 향해 사도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구나...”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린도교회와 신자들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도를 버리고, 자기를 높이고 능력과 힘을 자랑하는 거짓 선생들을 지도자로 선택했습니다. 그런 고린도교회를 향해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는 바울은 어쩐지 나귀를 타신 예수님과 닮아 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왕과 지도자를 선택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겐 왕과 지도자를 선택하는 선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누가 우리의 왕이 되고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따를까 하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씀 드린 바와 그 기준은 내가 되어선 안 됩니다. 나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 왕이나 지도자를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악한 왕의 지배와 통치를 받을 위험이 높아집니다. 악한 왕일수록 그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왕을 선택하는 그런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우리 앞에 나귀를 타신 초라한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할 수 있을까요? 나귀를 타신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흠모할만한 모습이 없습니다. 우리를 만족시킬 능력이나 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사야 53장 말씀처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우리는 이런 초라한 분을 기꺼이 왕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그 앞에 진정으로 경배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겸손히 무릎을 꿇고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께 경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진실하고 겸손하신 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실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런 참된 왕과 지도자를 알아보는 선한 눈을 가진다면, 우리 삶은 많이 달라질 줄 믿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하여 잘못된 지도자를 선택하고 따라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과 힘과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과 겸손과 진실함을 중요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선하고 의롭고 겸손하신 왕이시므로, 우리 역시 세상의 높은 자리와 힘을 탐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도자가 되더라도, 나 자신을 높이고 남을 속이는 악한 지도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귀를 타시고 우리들과 함께 떡을 떼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고, 동시에 그런 참된 지도자를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연 어느 후보가 나를 위하여 좋을 것인지, 어느 후보가 나의 싸움을 싸우고 나를 대변하고 나의 이익과 안전과 번영을 보장해 줄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왕과 지도자를 선택하는 성경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우리를 만족시킬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진실하고 참된지... 그래서 하나님은 과연 누구를 더 기뻐하시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참된 왕을 선택하고 참된 지도자를 따르는 능력은 연약한 양이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능력입니다. 우리들은 나귀 새끼를 타신 참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온 우주보다 크신 진정한 왕으로 알고 경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런 분별력과 마음을 늘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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