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포도원 품꾼 비유

믿음찬교회 0 190 2022.01.11 14:29
포도원 품꾼 비유
마 19:27~20:16
2022.01.09.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의 재교육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의 문제였습니다. 말씀에서 뜻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말씀에서 뜻으로 자라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실패입니다.
두 번째는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구원 문제였습니다. 부자 청년은 나무랄데 없는  신자였지만, 예수님은 그 청년의 부족함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고 삶의 주인을 바로 세우고 자신을 계속 따라야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제 마태복음은 제자들 재교육 세 번째 내용을 말씀합니다. 이 세 번째 내용은 한 마디로 신앙의 대가와 보상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는지... 그 대가와 보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주님을 믿는지... 그 목적과 의미의 문제로 확대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과 의미... 이것이 옳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과 의미가 예수님과 다르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닐뿐더러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올바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조금전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이 가고나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의 의미는 이런 것이죠. “예수님~ 그러면 자 보십시오... 저 청년과 다르게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이렇게 주님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확실히 영생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지요? 그렇죠? 예수님~”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28절과 29절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원한 완벽한 대답이었습니다. ‘너희는 영생도 받고 보상도 받고 나의 통치에도 동참하게 된다...’ 더 이상 완벽한 대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한 가지 말씀을 추가로 더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을 원어로 살펴보면, 그 의미가 더 뚜렷합니다. “그러나 첫 째가 맨 끝이 되고 맨 끝이 첫 째가 될 자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포도원 품꾼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비유 마지막에 다시 한 번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이와 같이 첫 째가 맨 끝이 되고, 맨 끝이 첫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30절 이하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어떤 모습인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를 중간에 두고 ‘먼저된 자와 나중된 자’ 말씀이 앞 뒤로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전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네, ‘너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와 같은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기 때문에 너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죠. ‘베드로야 너는 지금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니까 네가 첫째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너는 맨 끝이 될 수도 있어...’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매우 심각한 고민을 안겨주게 됩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그러나 만약 예수님을 잘못된 방법과 잘못된 마음과 잘못된 목적으로 따르면 맨 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낭패와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맨 끝에서 겨우 구원을 받는 그런 슬픈 일입니다. 어쩌면 구원도 불확실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당황스러운 일을 피하기 위해선, 이 예수님의 비유를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족 같은 말이지만, 이 말씀은 맨 끝에 있는 사람을 두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바른 목적으로 열심히 따르자는 말씀입니다. 적당히 뒤에서 따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 마지막 때에 그런 경계선에 있다가 예수님을 놓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첫 제자와 첫 열매가 되기를 꿈꾸며 이 비유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참고로 첫 열매 이후 다음 열매는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첫 열매이시고, 우리도 첫 열매이고 첫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첫 제자와 첫 열매를 꿈꾸시며 이 비유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있어 품꾼들을 고용합니다. 그는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을 시킵니다. 그때가 아마 오전 7시 정도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제 삼시, 즉 오전 9시에도 장터에 나가 거기 있는 사람들을 고용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그런데 그는 제 육시와 제 구시, 즉 12시와 오후 3시에도 나가 품꾼들을 고용합니다. 심지어 그는 제 십일시, 즉 오후 5시에도 장터에 나갔다가 하루 종일 일을 못 구한 품꾼들을 발견하고 고용합니다. 이 마지막 사람들은 1시간도 제대로 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드디어 날이 저물었습니다. 이 주인은 품삯을 계산해 주기 시작합니다. 나중 온 자들부터 품삯을 주는데 놀랍게 그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를 본 제일 먼저 온 품꾼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분명 더 주겠지...’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들에게도 주인은 한 데나리온만 주는 겁니다. 그 품꾼들은 당연히 불평하고 항의했죠. 그런데 주인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네, 이것이 포도원 품꾼 비유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확실히 이 비유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이상한 이야기 같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너무 억울할 것 같고, 포도원 주인은 자비로운 사람 같으면서도 제 마음대로인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정말 혼란스럽고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이 이상한 비유를 잘 설명하기 위해 많은 목회자와 학자들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해석을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열한시에 온 품꾼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비유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비유는 우리가 수고나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말하는 비유이다.’
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구원에 대한 그런 일반적인 의미라고 해석하면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이 비유를 감싸고 있는 말씀, 즉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과의 연결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와 베드로의 질문과의 연관성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그 자체가 아닌 문맥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 비유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라는 점을 놓쳐선 안 됩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우리가 과연 무엇을 얻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했죠.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질문을 하는 베드로의 생각과 마음 안에는 어떤 잘못된 것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발견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이 비유를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베드로의 마음에 있는 잘못된 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신앙의 이유입니다. 신앙의 목적과 이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것을 보상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인간적인 태도와 생각입니다. 베드로의 마음 안에는 그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일반적으로 당연하기도 하죠. 고생하고 헌신했으니, 그 대가나 보상이 있어야 하겠죠. 그러나 그것은 세상 나라에서는 맞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그분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도 우리의 신앙의 대가나 보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구원이 우리의 신앙의 대가나 보상이라면, 그것은 우리 힘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모순과 교만의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뭔가를 바라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난주에 제가 한 때 새벽시장에서 몇 개월 일했다는 이야기를 드렸죠. 그때 하루는 그 과일가게 젊은 사장이 제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 나가고 하나님 믿는 것... 다 자기 잘되려고 믿는 것 아닙니까? 자기에게 득이 되는게 있으니까 믿는거지... 안 그렇습니까?”
네, 그렇죠.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신앙의 목적과 이유를 그렇게 이해합니다. ‘내가 하나님 믿으니까, 교회도 나오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그 대가로 구원도 받고 축복도 받는거야... 아니 받아야 해...’ 이렇게 우리는 알게모르게 다 베드로와 같은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행복이나 건강이나 축복이나 삶의 의미나 영생이나 구원이나... 우리는 그것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어선 안 됩니다.
제가 하루는 기독교tv를 보니까, 어떤 목회자 분이 설교하시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얼마나 열심히 말씀하는지... ‘구원 주시고 능력 주시고 물질 주시고 기도응답 주시고 성공 주시고...’ 그러자 거기있던 분들이 얼마나 크게 아멘을 하시는지... 제가 너무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위해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고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걸까요?
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신 절대자이시고 창조주이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아무리 절대자요 창조주시라도, 그분이 선하지 않거나 우릴 사랑하지 않는 분이라면 우리는 그분을 믿지 않을 자유가 있죠.
그런데 그분은 절대자요 창조주이시고,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이시죠.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분을 기꺼이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이유나 본질은 대가나 보상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니까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구원도 받고 영생도 받고 행복과 건강과 삶의 의미도 누리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과이지 이유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순서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에,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할 때, 뭔가를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것이나 그 사람이 내게 줄 것을 고려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죠. 그건 거래이죠. 물론 지금은 그런 사랑이 만연해 있습니다. 뭔가를 바라거나 기대하고 사랑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사랑은 불행합니다.
참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굳이 성경말씀 아니라도 일반 노래도 그런 사랑을 노래하죠. ‘모든 걸 줄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네, 사랑은 사랑이 유일한 이유이지 다른 이유나 목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순수한 참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과 영생도 그분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바라고 요구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뭔가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대가를 말하는 베드로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의미를 풀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포도원에 그날 아침 일찍 온 품꾼처럼 되어선 안 된다. 하루 종일 일한 그는 자신이 한 데나리온 이상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네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무엇을 받겠느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세와 태도로 그분을 믿어선 안 된다.
차라리 너는 그날 제일 늦게 온 품꾼처럼 되어야 한다. 한 시간도 일하지 않은 그는 자신이 품삯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인이 자기를 고용해준 것 자체가 고맙고, 얼마라도 준다면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너는 그 사람처럼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
네, 이 포도원 품꾼 비유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비유는 신앙의 이유를 보상에서 찾는, 그런 잘못된 베드로의 생각과 태도를 바로잡아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고 보면 율법의 최고의 가르침도 사랑이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9~31)
그러므로 우리 신앙이란 궁극적으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비는 것이 아니고, 신앙은 엎드려서 뭘 받아내는 것이 아니고, 신앙은 남들보다 영적으로 뛰어나서 능력 받고 축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만들고, 내 삶을 사랑으로 만들어 가는 일입니다.
송정 인근 바닷가에 가면 거기 바닷가에 절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절은 바닷가 바위에 작은 암자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날 사람들이 파도치는 바위 암자에  올라가 촛불을 켜고 바다를 향해 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종교적 느낌이 물씬 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과 종교를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빌고 바라고 소원하고 그리고 얻고... 기독교 신앙도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말씀하고 예수님이 말씀한 우리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의 본질뿐만 아니라 신앙의 방법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잘 안 됩니다. 기도도 방언도 신비체험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좋은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우리의 선한 사랑의 삶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급 신앙은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상급과 축복을 많이 주신다. 하늘의 상급과 축복이 쌓인다...’ 현세의 기복신앙이나 내세의 상급신앙이나... 그 속살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이지만, 뭘 바라거나 받자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 이것저것 구하는 것이 많은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스런 신부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손을 잡고 신랑의 눈을 보아야 합니다. 신부가 신랑에게 자꾸 무언가를 요구하고 선물에만 관심이 있다면, 장차 어떻게 혼인잔치에 영광스럽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신앙은 사랑이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중 된 자 중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끝에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날에 그를 첫째로 우리 가운데 세우실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위해 맨 앞에서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분을 진정 사랑하지 못했던 제자나 믿는 자들은 끝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혁명적 원리와 가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늘 마지막 품꾼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감사하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감사하고, 나를 불러주신 은혜가 감사할 뿐, 난 그저 일을 1시간도 안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 종이 자기 할 일 했으면 그만이지, 별도의 상급을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또 알아서 자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고, 내 잔을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바라고 얻는 것이 아닌, 그분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과 저의 신앙은, 이 마지막 시대 속에서도 이와 같은 순수한 사랑의 신앙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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