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권고하는 공동체 용서하는 공동체

믿음찬교회 0 166 2021.12.14 14:29
권고하는 공동체, 용서하는 공동체
마 18:15~35
2021.12.12.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새로운 공동체는 모두가 어린 아이 같이 낮아지고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여길 때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에 “아멘” 하기를 원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는 너희는 서로 권고하는 공동체가 되라는 말씀이고, 네 번째는 너희는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세 번째와 네 번째 말씀을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너는 가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죄가 어떤 죄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럴 때는 우리가 그 죄가 어느 정도의 죄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그 형제의 죄를 한 사람이 가서 말하고, 또 한 두 사람을 더 데려가서 말하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죄는 결코 가벼운 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실수나 작은 죄가 아니라, 좀 무겁고 심각한 죄로 생각됩니다.
네, 죄에 경중이 있죠. 작은 죄가 있고 큰 죄가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우리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중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말씀이 있어서, 모든 죄는 서로 비슷하고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의미는 모든 죄가 다 비슷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는 신자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과 같은 작은 죄도 소홀히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죄에는 경중이 있습니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경중을 보십니다. 큰 죄를 작다 말씀하시지 않고, 작은 죄를 크다고 부당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이 죄는 공동체에 영향을 끼치는 중한 죄라고 우리는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죄로 그치지 않고, 공동체에도 영향을 끼치는 중한 죄... 성경 안에서 어떤 사례가 있을까요? 대표적으로 구약의 아간의 범죄가 있었습니다.
아간은 여리고성 전쟁 승리 후, 몰래 시날 산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덩이 오십 세겔 하나를 감추었죠. 그러나 그 전쟁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전쟁으로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그 전쟁 자체가 거룩한 의식이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그 지시를 듣고도 무시하고, 그 물건들을 감추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것은 전리품 몇 개를 챙긴 가벼운 죄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명백한 지시를 어기고, 그 공동체에 죄의 구멍을 만든 영적인 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간은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신약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이 판 땅 값의 일부를 바치면서, 전체인 양 교회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려 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모르고 받아들여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와 하나님은 속임을 당하고 만홀히 여김을 당하시고 공동체는 영적으로 오염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새롭게 출발하는 교회 공동체에 거짓과 죄의 싹을 심으려는 사탄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각각 다릅니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고, 개인적인 죄가 있고 개인을 넘어서는 죄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죄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인정하고 사과하고 배상하고 회개하고... 우리는 그렇게 죄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죄는 반드시 처리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일종의 영적인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영적인 물질이기 때문에 생기면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속죄제입니다. 그 속죄제의 엄격한 절차는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속죄로 바뀌었습니다. 비록 그 엄격한 제사 절차와 과정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죄가 그런 과정을 거쳐 속죄됨을 알아야 합니다. 과정이 쉬워졌다고 해서, 예수님의 속죄를 쉽게 생각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개인을 넘어서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큰 죄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죄가 들어오고 자리를 잡고 죄가 공동체 안에 계속 존재하게 되는... 그런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영적인 공동체라면, 반드시 그것을 잘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그 일을 아는 사람이 먼저 가서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안 될 때는, 두 번째로 다른 사람 한 두 명과 함께 가서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왜 굳이 이런 여러 단계를 밟는 걸까요? 네, 이것은 공동체 안에 발생한 잘못과 죄를 처리하되, 그 죄를 지은 형제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부끄럽지 않게... 다른 사람이 모르게... 그렇게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그 사람을 바로 정죄하고 죄인 취급하고 바로 공개하고... 그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이 아니죠.
그 형제가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자라면 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 안에서 해결될 줄 믿습니다. 비록 세상과 일반 사회에서는 이런 조정이 어렵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신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권면과 대화가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 합니다.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는 이렇게 대화하고 권면하는 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성숙한 공동체가 되기를 빕니다.
 
네, 교회는 거룩한 주님의 몸된 곳이면서 동시에 아직 인간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아직 우리의 성화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크고 작은 문제와 죄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교회는 그것을 이렇게 주님의 말씀과 뜻 안에서 권면하고 대화하며 해결합니다. 대화하고 합의하고 같이 기도하고... 이런 과정은 사실 굉장한 영적인 과정입니다. 우리의 서로 다른 마음을 성령님께서 하나로 만드시는 영적인 일입니다. 이런 과정이 살아있어야 주님이 다스리시는 좋은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자랐던 교회에서 큰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 사이에 벌어진 분란이 교회 전체로 번져, 교회는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저는 비록 청년이었지만, 저의 어머니와 함께 그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한 마디로 ‘교회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교회의 주인이 누구냐’였습니다. 그 교회는 이전까지 장로님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목사님들은 일정한 기간이 되면 계속 교체되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때 그 목사님은 말씀도 훌륭하시고 점점 교인들의 호응을 받고 힘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그런 분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네,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 그런 것이 교회 안에 있는 영적인 죄 중의 하나이죠. 그 갈등과 문제는 권면과 대화로 해결되지 못했고 결국 교회는 갈라지고 충돌을 하고 그 사람들은 목사님을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목사님은 1년 정도 몇몇 교인들과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고소 고발이 해결되자 결국 떠나시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저와 어머니도 그때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세상적인 그와 같은 분란과 어려움을 겪지 않으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밝은 이해와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있기 때문에 서로 대화하고 합의하며 그것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혹 자신이 권고를 받는 당사자라면, 권고와 대화 속에 그 권고의 말이 옳고 납득이 되면, 정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올바른 것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믿음과 건전한 상식으로 진실한 권면과 대화를 하고,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누구일까요? 네, 바로 여러분입니다. 15~17절의 이 모든 말씀의 문장의 주어는 “2인칭 단수”입니다. 네가 가서 권고하고, 네가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고하고, 그래도 안 될 때에는 네가 최종적으로 교회에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모든 일련의 일은 교회와 목회자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 속에 형제의 죄를 알게 되고, 그래서 그것을 지금 자발적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몸 안에 병균이 들어왔을 때, 우리 몸의 백혈구와 항체가 자발적으로 작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와 목회자 차원에서 지시를 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죄를 인지하고 기도 속에 신중히 생각하고 그래서 자발적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무분별하게 해서는 안 되겠죠. 자기 생각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찾아가서 정죄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잘 실천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에 대한 밝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별을 최고의 은사인 사랑 안에서 사용하는 신앙적 성숙과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이 말씀의 주체는 바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백혈구가 되고 항체가 되어서, 우리 몸에 생기는 병균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유기적인 몸이죠. 위에서 일방적인 지시를 받는 조직체가 아닙니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그저 덩치만 큰 조직인 경우가 많습니다. 큰 교회 안에는 그저 예배만 조용히 드리고 돌아가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서로 누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서로 잘 모르는데 어떻게 권고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교회의 모습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교회의 모습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 권고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그런 아름답고 성숙한 공동체가 되면, 우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우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공동체가 됩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 중 몇 사람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해도 하늘에서 그대로 이루어 주시는 복된 공동체가 됩니다.
네, 이런 모습이 우리가 다니고 싶고 누리고 싶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신자들은 수동적이고 목회자 혼자만 바쁜 그런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다 함께 주님의 일을 하고 같이 합심 기도하여 하늘의 응답을 받는 그런 귀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21절부터는 예수님의 4번째 말씀이 나옵니다. 이 4번째 말씀을 한 마디로 하면, “너희는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란 좋은 것이죠. 우리가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그런 공동체가 되면 당연히 좋죠.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가 감사하는 공동체가 되면 안 좋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면 안 좋겠습니까? 성령의 공동체, 소망의 공동체, 거룩의 공동체가 되면 안 좋겠습니까? 교회를 향해 해 주실 좋은 말씀은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많은 좋은 말씀 중에 유독 너희는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라고 하실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여기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저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의 공동체는 용서하는 공동체라고 말씀하실까요? 네, 이것은 용서가 그저 좋은 말씀이어서 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이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신의 공동체가 가져야 할 본질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 작은 자 하나, 권고하는 공동체...
그러므로 이 용서의 공동체라는 말씀도 예수의 공동체로서 본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동체가 용서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제법 긴 비유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왕에게 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입니다. 만은 당시 가장 큰 숫자이고, 달란트는 당시 가장 큰 돈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로 쉽게 말하면, 그는 왕에게 수천억원의 빚을 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은 자신에게 그런 큰 빚을 진 사람을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것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을 비유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아서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마디로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으로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용서 받은 사람들로서 용서라는 옷을 입고 지금 그분의 공동체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고, 우리는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여기에 와서 은혜와 용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그 은혜와 용서를 받아 새 출발을 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죠. 
그래서 우리는 누가 나에게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것을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예수 믿는 신자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목사로서 마음이 무척 힘듭니다. 그래서 집에서도 저희 우주나 주해가 엄마에게 혼나면서 잘못했다고 하면, 옆에서 얼른 용서해주라고 말합니다. 저희 집사람은 좀 확실한 대답을 받고 용서하는 편인데, 저는 그냥 용서해주라고 자꾸 말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용서를 하는 방법은 우리가 서로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수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 잘못을 한 후 잘못했다고 말하면, 무조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적절한 보상이나 배상은 받으셔야 하겠죠. 그러나 용서를 꼭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은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미국에 가면 기독교 한 분파로서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종교개혁 당시 재침례교도들의 후예인데, 자신들의 신앙적 삶을 위해 전기도 없고 차도 없이 오래전 옛날 모습으로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소박하고 경건한 신앙과 신학에서 지금 우리 현대교회들이 배울 것이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일부러 그분들을 찾아가 안식년을 보내고 오기도 합니다. 이분들은 특히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죠. 그 말씀을 자신들의 신앙과 삶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와 관련된 이 분들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2006년의 어느날 어떤 사람이 아미쉬 공동체의 한 작은 학교로 찾아와 끔찍한 총격사건을 벌였습니다. 남학생들은 내보내고 여학생들만 남겨서... 그 사건으로 어린 여학생 5명이 죽고 5명이 중상을 입고, 범인은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곧 밝혀졌는데, 그는 아미쉬 마을 사람들에게서 우유를 받아 배달하던 이웃 마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감리교인으로 오래전 자신의 첫딸이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둔 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 그 강박관념과 하나님에 대한 복수심으로 평화롭게 사는 아미쉬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런 참혹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자신의 딸을 잃은 아미쉬 사람들이 그 사람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그의 부인에게 그를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불과 오전에 딸을 잃은 아버지들이 오후에 그 집을 찾아가 용서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후에 “아미쉬 그레이스”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장면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 영상 ) 그리고 나중에 그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을 통해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자신의 발을 묶고 총을 쏘려는 그 범인을 향해 여자아이들이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아저씨를 용서해드릴께요” 그리고 어린 동생들 대신 자기들을 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접하고 이런 고민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저 정도로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그분들에 비해 때가 많이 묻은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각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결론은 이렇게 우리는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용서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속에 새 사람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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