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하늘 보좌와 하늘 예배의 환상 1

믿음찬교회 0 191 2021.10.26 13:29
하늘 보좌와 하늘 예배의 환상 1
계 4:1~11
2021.10.22.

제 기억에 저의 어린 시절 우리 교회들 안에는 크고 작은 신앙체험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는 대체로 성경이해도 단순했고 설교도 단순했고 예배도 단순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또 시대와 사람들의 사고도 단순했기 때문에 그런 신앙체험들이 많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찬송이나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뜨겁게 흘리는 것은 기본이고, 기도회를 하면서 몸이 막 뜨거워진다든지, 갑자기 방언이 터진다든지, 또 기도하다가 어떤 음성을 듣는다든지 환상을 본다든지...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저의 어머님도 한 동안 어린 저를 데리고 밤마다 교회에 기도하러 가셨는데, 어느날 깜깜한 예배당의 앞쪽 문이 열리면서 발자국 소리가 나는 일도 있었다 하시고, 저희 집 구역예배 때 장로님이 제 눈을 위해 안수기도 해주셨는데 갑자기 방언기도가 되면서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역사도 일어나고 그래서 기도 끝나고 제게 눈이 뜨겁지 않았냐고 물어보시기도 하셨습니다. 집사님들은 ‘누가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나무뿌리를 뽑았다 하더라, 기도하는데 악한 영이 기도를 방해해서 물리치느라 애를 먹었다 하더라...’ 이런 이야기들을 교회에서 심심찮게 나누곤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교회 안에 그런 일들이 많이 줄어들었죠. 일부 인위적인 신비주의 은사 및 성령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지금은 우리 신앙의 그런 시절은 많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30~4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안팎 시대나 삶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지금의 사람들은 그때에 비해 여러모로 다른 사고와 지식과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혹 그리워도 우리 신앙은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기 어렵지 않나 생각됩니다.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말이죠. 그래서 우리의 신앙체험이나 신앙모습을 그때로 그대로 되돌리는 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진리는 영원하지만 우리의 신앙모습이란 시간에 따라 달라지고 발전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우리는 새로운 신앙과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튼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신앙이 30~40년 전이었다면, 그래서 영적인 체험이나 경험이 낯설지 않고 우리 사고도 좀 단순하고 순진했던 때라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훨씬 쉽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환상을 영적 체험으로 인정하고 환상을 사실과 다름없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던 때라면, 이 말씀은 읽기만 해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큰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환상 중에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다고 하는 1절부터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내 경험이랑 비슷하네’, 혹은 ‘아무개 집사님 경험이랑 비슷하네’ 하고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1절부터 막히고 은혜는커녕 도대체 성경말씀이 왜 이런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기독교의 신앙체험 중 하나인 환상에 대해서 일단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으로선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적어도 당시엔 그런 체험이 많았구나’ 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환상을 경험한다든지, 음성을 듣는다든지, 신비한 응답을 받는다든지 할 때, 잘못된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무의식의 세계가 있어서, 꿈이나 특정 상황에서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듣기도 하죠. 그러나 그런 것은 가짜가 많기 때문에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영적 체험이 있습니다.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기도도 안했는데 마치 하나님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신 것처럼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진짜 환상 체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남용하시지 않지만, 역사 속에 자기의 뜻을 환상과 계시로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요한은 지금 밧모섬에 있는데, 맨 처음 자기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환상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분을 보기만 하지 않고 그 음성도 들었죠. 성경적인 진짜 환상의 특징은 그 환상이 입체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단순히 시각적인 내용만이 아니라, 청각 즉 소리도 들리고 촉각이나 후각도 느껴집니다. 압도적이고 거룩한 감정과 분위기도 물론입니다. 그래서 그 환상은 우리 영혼에 굉장히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성스러운 감정 속에 은혜와 위로가 되고 우리 영혼이 깊이 채워집니다. 
이에 비해 인간 무의식이나 악한 영의 꿈이나 환상은 이런 하나님의 체험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환상의 내용도 아름답지 않고 입체적이지 않고 뚜렷하지도 않고, 느낌도 전혀 거룩하거나 평안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요한은 이제 4장부터 새로운 환상을 보게 됩니다. 4장은 이렇게 시작하죠.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렇게 해서 요한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특별한 세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시공간과 전혀 다른 시공간... 그래서 영적이고 무시간적이고 무한하고 언어로 잘 표현하기 어려운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요한은 그곳에서 맨 먼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본래 하나님은 감히 우리가 볼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요한이 본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요한은 그분의 직접적인 모습 보다는 그분의 영광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3절에 그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분의 어떤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의 빛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벽옥은 재스퍼라고 하는 보석으로 적색, 갈색, 황색, 녹색 등의 다양한 색깔을 가진 불투명한 보석입니다. 또 홍보석은 어떤 특정 보석을 말하기 보다는 붉은 색깔의 보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벽옥과 홍보석이라고 표현했는데, 벽옥과 홍보석을 함께 언급한 것으로 보면 이것은 같은 빛깔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다는 것은, 요한이 붉은 빛의 찬란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은 또 보좌에 둘린 무지개를 봅니다. 그런데 그 무지개는 분명 무지개인데, 녹보석 즉 에메랄드 같다고 했습니다. 좀 이상하죠? 우리는 요한이 뭔가를 보고 전달하지만 아무래도 모호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무지개에 이어서 보좌 주위의 이십사 장로들과 그들의 보좌들을 봅니다. 그리고 보좌에서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또 보좌 앞의 일곱 등불을 보고, 보좌 앞의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봅니다.
그리고 요한은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을 봅니다. 그 첫째는 사자 같고, 둘째는 송아지 같고, 셋째는 사람 같고, 넷째는 독수리 같은데, 이들은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눈들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은 이 네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장면을 봅니다. 이상이 요한이 본 하늘 보좌와 하늘 예배의 환상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본 이 모든 환상의 내용들은 다 하나하나 구약의 이미지와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로마의 황제숭배와 우상숭배 앞에 박해와 고난을 당하는 요한과 교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요한이 맨 처음 본 것은 하나님의 보좌였습니다. 요한이 맨 처음 본 하나님의 보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주권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백 번 천 번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고 하나님이 온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이심을 고백해도, 환상 가운데 그분의 보좌를 한 번 보는 것만 못합니다. 요한과 당시 교회들은 로마의 힘과 권력, 우상들의 힘과 권력에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보좌를 베풀고 믿는 자들을 심문하고 재판하고 처형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은 이 하나님의 보좌를 보면서 그와 같은 땅의 보좌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았던 막강한 제국의 권력과 힘, 또 높은 신전과 우상의 권력과 힘은 허상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한이 본 것은 하나님 보좌의 영광이었습니다. 그것은 보석과 무지개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보석과 무지개는 그 영광의 심오한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무지개는 아름다움 외에 그분의 자비와 평화, 그리고 무엇보다 새 창조를 상징합니다. 아시다시피 무지개는 노아 홍수 후에 등장한 새 창조의 상징물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에 무지개가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인해 하늘에서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상의 로마제국의 현실은 보기엔 진정한 현실 같지만, 실제로는 낡아지고 쇠퇴하고 사라지는 가짜 현실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백성을 지금 하늘에서 창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이 땅의 현실에서 밀려나고 초라해지는 믿는 자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여러분, 이 땅의 현실과 이 땅의 사람들에 너무 실망하고 힘들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늘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현실이 진정한 현실인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요한은 이십사 장로들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를 연상케 하는,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공동체 전체의 대표자들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을 대표하여 지금 하나님의 보좌 곁에 있습니다. 그들이 흰옷을 입고 있고 금관을 쓰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하늘의 상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들을 보고 자신도 끝까지 충성하면 그와 같은 상을 받으리라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 구원의 영광과 소망에 마음이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요한은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그날에만 이루어지는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보좌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은, 지금 이 땅의 현실에 내려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비록 이 세상은 지금 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하지만, 그러나 이런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죄는 드러나고 하나님의 심판은 내려지고 있습니다.
요한은 보좌 앞의 일곱 등불도 보았습니다. 그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상징합니다. 그분의 보좌 앞에 그분의 영이 등불처럼 대기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이 땅에 즉각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시간으로 땅의 상황은 하늘에 보고되고, 실시간으로 하늘의 뜻과 의지는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보좌 앞의 수정 같은 유리 바다도 보았습니다. 본래 바다는 고대인들에게 그 심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바다엔 레비아탄과 같은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으며, 통제되지 않는 혼돈의 세력이 거기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신화가 물을 나누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같은 의미로, 그분의 보좌 앞의 수정 같은 유리 바다는 그 세력이 하나님에 의해 이제 완전히 정복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유리 바다는 계시록 말미에 가면 최종적으로 사라집니다. 그래서 계시록 22장을 보면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 같은 맑은 생명수 강은 나오지만, 바다는 영원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수정 같은 유리 바다와 사라지는 바다를 보면서 이 땅의 악의 현실과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위기와 고난 가운데 하늘 보좌를 본 요한처럼, 여러분들께서도 오늘의 현실 가운데 하늘 보좌를 보며 힘과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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