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제자들의 믿음 실패

믿음찬교회 0 361 2021.10.26 13:27
제자들의 믿음 실패
마 17:14~20
2021.10.24.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백성들에게 문제가 생겼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왔을 때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문제는 제자들이 한 아이의 병과 귀신들림을 고쳐주지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마태보다 앞서 쓰인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 사건을 매우 길게 기록하고 있죠. 마가복음은 아이의 아버지에게도 초점을 맞추고, 또 제자들에게도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에 비해 마태복음은 이 사건을 제자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마가복음보다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이의 병을 고쳐주지 못하고 귀신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큰 무리가 둘러싸 있는데 아이는 귀신으로 인해 경련을 일으키고 땅에 구르고 있었고 제자들은 그 일을 해결하지 못한 채 서기관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보신 예수님은 굉장한 유감과 탄식을 하시게 됩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거기있던 서기관들과 아이 아버지와 백성들과 그리고 그 시대 전체를 탄식하십니다. 악한 귀신에게 유린 당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무기력한 제자들과 지도자들과 그런 세상과 그런 시대 전체가 예수님의 마음을 힘들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그들의 시대를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패역하다’는 말은 ‘삐뚤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영적인 모습이 삐뚤어지고 굽어지고 꼬여있다는 말씀입니다. 나무로 말하자면 생명력과 힘이 없고 삐뚤어진 나무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시고 세우신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아니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중에 뛰어난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메마르고 삐뚤어지고 율법에 눌려있고... 그래서 한낱 악한 영과 귀신에게 무기력하게 유린당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이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인 서기관들과 제자들도 백성들의 그런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은 매우 마음이 힘들고 분노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고 꾸짖어 그 아이의 귀신들림과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이 사건이 정리된 후 제자들은 조용히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조용히 예수님께로 갔다는 말은 자신들의 문제를 알고 부끄럽고 면목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왜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보시고 아까와는 다르게 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귀신 축출 실패 이유가 믿음의 문제였다고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도 없었던 제자들의 작은 믿음...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그 문제가 믿음의 문제였다고 말씀하셨지만, 따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작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래서 제자들의 믿음이 어떤 문제인지, 그래서 어떻게 그 문제를 고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 안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말씀을 보고 생각하기를 ‘아~ 제자들이 믿음이 작았구나... 그게 그들의 문제였어... 그러므로 우리는 큰 믿음을 가져야 해...’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작은 믿음이 아니라 큰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내용이죠.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믿음이 작다는 것은 무엇이고, 왜 그들은 믿음이 작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이 부분을 살펴보고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우선 제자들은 병고침과 귀신 축출을 이미 해본 경험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10장에서 제자들을 갈릴리로 파송하실 때, 그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이 권능을 잘 사용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6:12~13)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미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성공적으로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실패했죠. 그때는 되었는데, 지금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지금 그것이 몹시 궁금한데, 예수님은 그 문제가 믿음의 문제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네, 제자들의 실패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기도나 능력이나 다른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앞서 쓰인 마가복음 본문을 간략하게 줄이면서, 여기서 혹 오해가 될 만한 말씀 하나를 바꾸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8~29) 
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그것이 기도의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그렇게 기도의 문제라고 마무리하는 것은 자체적으로 조금 잘못된 마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도 그 사건을 믿음의 문제라고 처음부터 계속 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처음 탄식도 이 세대가 믿음이 없다는 탄식이었고, 아버지의 문제도 믿음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문제를 기도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무리하고 있으니... 그러므로 마가복음 본문 자체가 어떻게 보면 조금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이와 같은 마가복음 본문을 다듬었다고 할까요... 그런 혹 오해가 생길 만한 부분을 다듬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의 애매한 부분이나 오해를 살만한 부분을 다듬은 경우는 이외에도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가는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말하는데, 마태는 요한의 세례가 회개의 세례라는 문제적 표현을 생략하죠. 그 이유는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한다면, 그 회개의 세례를 예수님이 받으신 것은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한 부분을 생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이 이 사건을 ‘믿음, 믿음 하다가 기도’라고 말하는 것을, 마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일관되게 다듬어서... ‘믿음, 믿음, 그래서 믿음’으로 잘 정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오늘 사건에서 귀신을 내쫓지 못하고 병을 고치지 못한 근본 이유는 기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러면 마가복음의 그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네, 우리는 마가복음의 그 기도는 믿음의 기도라고 해석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마태는 제자들의 근본 문제가 믿음이었음을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보면 마가복음만을 보고 제자들의 실패 이유를 기도의 문제로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고 기도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네, 물론 기도는 좋은 것이고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 기도에 대한 지나친 강조 안에는 조금 불건전한 미신적인 이해가 일부 있기 때문에 조금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능력이 생긴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생각하면 그런 능력과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에 공을 들이면 무조건 하나님이 그 기도에 비례하여 능력과 은사를 주실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의 유익과 제자들의 사역을 위해 제자들이 따로 기도하지 않아도 그런 능력과 은사를 먼저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런 능력과 응답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그런 능력과 응답이 온다는 생각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어떤 신과 무엇을 향해 소원을 비는 그런 민족이었고, 그런 우리의 기도 행위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에 대한 샤마니즘적인 이해가 우리 신앙 안에 일정 부분 들어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라는 것은 그 성질상 기도하는 사람의 자기 확신이나 자기 신념을 강화하는 특징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기도의 능력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진 자기 강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좋은 것이지만 기도가 말씀보다 앞서지 않는 세심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과 성령 안에서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되고, 신자의 삶과 믿음 생활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이 두 본문을 잘 비교하면서 그들의 문제는 다름아닌 믿음의 문제였다고 결론 내려야 하겠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믿음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고,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겨자씨 한 알 보다도 작은 희박한 믿음이 되어버렸습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은사를 이미 받았지만, 지금 그들의 믿음에 문제가 생겨 그 능력과 은사는 발휘되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기초적인 사실부터 재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믿음이 무엇인가... 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에 대한 많은 오해는 ‘믿음을 내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믿음에 대한 생각이죠. 내가 누구를 믿고, 내가 무엇을 믿고, 그런 신념을 가지는 것... 그런 확신과 신념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항상 말씀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그런 자기 신념이나 자기 확신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믿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다른 말은 신실함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한 것이 믿음입니다.

분명 제자들은 자기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전에도 병을 고쳤고 귀신들을 쫓아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아이 아버지가 요청하자 기꺼이 응한 것이죠.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와 같은 믿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새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권능을 받고 그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된 것이고,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복습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나의 자기 확신’이 아니라 ‘나의 신실함’입니다. 그리고 그 신실함은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한번 신실한 것이 아니라 계속 신실한 것, 계속 신실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은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영적 개념이죠. 기도 많이 하는 아무개 목사도 여기서 실패하고, 믿음 좋은 아무개도 집사도 여기서 실패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열심히 믿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나는 실패한 바리새인이고 실패한 제자인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잘 아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고, 기도를 많이 하고 사역과 일에도 충성인데 역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근본 마음과 태도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나중에 심판하실 때 “나는 너희를 모른다” 하시겠습니까? 목사도 하고, 장로도 하고, 권사도 하고, 집사도 했는데 왜 하나님이 모른다 하실까요?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고 그분을 신실하게 따라간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위해서 내 목적을 가지고 즉 천국 가고 부자 되고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믿었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이 쉬우면서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을 잘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신실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그 관계를 잘 가지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선한 일을 합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그치고 기도가 기도로 그치고 예배가 예배로 그치고 선행이 선행으로 그치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를 만들지 못하면 믿음은 제로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가장 잘 아느냐... 네, 귀신이 그것을 잘 압니다. 저 사람은 내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구나... 그렇게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도 그렇게 실패한 인물이 나옵니다. 에베소에서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였지만, 귀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행 19:14~15) 그래서 그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랐고, 그들은 간신히 벗은 몸으로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나 우리나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믿음 즉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과 신실한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특별히 귀신을 쫓아내거나 이적을 행하는 그런 능력이라는 은사가 있죠. 그 능력이라는 은사를 받으면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따로 받지 않아도 예수의 제자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귀신과 악한 영들은 기본적으로 믿음으로 쫓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은사나 능력이나 기도나....네, 물론 다 좋은 것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사실...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믿음이 없으면... 즉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그것은 그냥 하나님 앞에 말이 많은 것에 불과하고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결국 삶이고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은혜를 많이 받고 방언의 은사도 받았는데 돌아서서 다투고 나가서 이웃사람과 양보 안하고 싸우는 생활을 하면... 그건 믿음 즉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가 있다면 그렇게 살 수 없죠. 이 이야기는 저의 이모님이 제게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이모님 교회의 한 집사분이 그랬다고 하시면서 은사가 다가 아니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축복을 많이 받고 성공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한 한 신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분의 부가 정당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고 또 그 평소 모습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자랑하고 인색하다면... 이것도 믿음 즉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가 있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죠. 
그러므로 능력도 은사도 기도도 축복도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 즉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한 삶... 우리는 거기에 우리 신앙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은사를 많이 받았느냐, 얼마나 능력을 많이 받았느냐, 얼마다 기도를 많이 하느냐, 얼마나 축복을 많이 받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신실한 관계를 맺고 신실한 삶을 사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은사도 능력도 기도도 축복도 결국 신실한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 사실을 일찍부터 잘 알고 강조했다면, 어쩌면 지금과 달랐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은사도 능력도 기도도 축복도 다 있고 다 받았지만... 신실함이 부족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소홀히 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도 우리 교회를 향해 쓴소리를 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짧았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이 말씀은 짧지만, 그 의미는 매우 큰 줄 믿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하나님과 신실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 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신실한 큰 믿음을 가지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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