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변화산 체험

믿음찬교회 0 632 2021.10.20 14:49
변화산 체험
마 17:1~13
2021.10.17.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엿새 후에...” 대개 마태는 날짜를 이처럼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는데, 이례적으로 여기에서는 ‘엿새 후’라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앞에서 일어난 사건과 오늘 사건을 뚜렷하게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일어난 사건의 엿새 후에 오늘 사건이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어떤 일이 있었나요? 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하셨죠. 그리고 그 질문에 베드로는 놀라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하셨고, 천국열쇠를 주시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처음으로 예고하셨습니다. 충격적인 말씀이었죠. 더 충격적인 것은 제자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은 제자파송 설교인 10장에서 이미 나왔지만, 그것은 마태의 편집이고 사실 여기서 처음 말씀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너희 중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이 있다는 혼란스러운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이 일들과 말씀들은 제자들을 무척 혼란스럽고 놀라고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신다는 말씀과 자신들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씀이 더 힘들고 혼란스럽고 어려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힘들고 혼란스럽고 어려운 말씀과 일들이 일어난 지 엿새 후에, 바로 오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 네,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가 다 기록하고 있는 놀랍고 신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른 바 변화산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을 따로 있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시고 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산이 가이사랴 빌립보 인근의 헐몬산인지, 아니면 전통적인 변화산으로 알려진 엿새 거리에 있는 다볼산인지, 아니면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갈릴리의 최고봉 메론산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유대인 마을이 있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메론산일 가능성이 다소 높습니다. 이곳은 올해 초 유대인들이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대규모 종교 집회를 열었다가 안타깝게도 대규모 압사 사고가 일어난 곳입니다.
아무튼 그 산이 어디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데리고 그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예수님은 그 외형이 놀랍게 변화되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 모습입니다.
오래 전 모세의 시내산 사건과 비교해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영광의 반사로 인하여 그 얼굴이 한동안 빛났죠. 그래서 모세는 얼굴을 베일로 가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경우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속에 그 얼굴 자체가 해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모세의 광채가 반사적인 빛이라면, 예수님의 광채는 본질적인 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께서 그곳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구약을 대표하는 분들이라 할 수 있죠.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예언을 대표하죠. 나아가 이 두 사람은 종말론적인 인물의 출현을 예고하는 분들입니다. 모세를 통해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가 예고되었고, 엘리야를 통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오는 선지자 엘리야가 예고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메시아 시대를 예고하는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이런 놀라운 광경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래도 베드로가 용기를 내어 그분들의 대화에 끼어듭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여기서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현실을 떠나 이 황홀경 안에 있어서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말로 그 세 분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기는 어렵죠. 이 말은 우리가 여기 있어서 세분을 위해 초막 셋을 지을 수 있어서 좋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정말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울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일이죠.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물에서 나오실 때도 이 말씀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예수님에게만 들린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자들에게 그 말씀이 들린 것입니다.
아무튼 이 장면은 모세의 시내산 사건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때 빽빽한 구름과 연기와 불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오래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지금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심히 두려웠습니다. 네, 하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했는데... 캄캄한 밤 절벽을 때리는 큰 파도소리 같이 대단히 두려운 음성입니다. 엎드린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고개를 들었을 때, 모든 것은 사라지고 홀로 예수님만 계셨습니다.
네, 이것이 제자들이 체험한 놀라운 변화산 사건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시고, 영적인 현현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고,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고, 그리고 뚜렷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은 실제일까요? 꿈일까요? 입신일까요? 환각일까요? 환영일까요? ... 그런데 9절에 보면 제자들이 경험한 이 사건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여기서 ‘본 것’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글성경은 단순히 ‘본 것’이라고 의역했지만, 원래 이 헬라어 단어는 ‘호라마’입니다. 이것은 영어로 vision이고, 우리말로는 환상입니다. 그러나 이 ‘호라마’라는 성경의 환상은 단순히 보이기만 하는 환상이 아니라, 거의 실제와 같은 환상입니다. 시각과 청각과 촉각과 심지어 후각까지 다 느껴지는 실제이죠. 엘리야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주님을 만날 때, 동일한 그와 같은 환상을 경험했습니다. 밧모섬에서 나타나신 주님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된 요한에게 그의 오른 손을 얹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의 환상이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실제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사용하시는 특별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행하는 어떤 유사 신비체험과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사건은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일어난 것일까요?
이것은 오늘 본문이 누구를 중점적으로 말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까지 가장 많이 언급되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제자들입니다. 이 환상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보다 제자들이 더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들에게 보이거늘”,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네, 그렇습니다. 이 사건의 초점은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깨달음과 이해를 주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어떤 확신과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이 환상은 준비된 것입니다.
이밖에 마태가 이 사건을 처음 말하면서 ‘엿새 후’라는 말을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두렵고 혼란스러워하는 엿새 전의 제자들을 위해서 오늘 사건이 준비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상의 절정인 하나님의 음성도 제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변화산 사건의 목적은 ‘제자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확신을 주시고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 큰 체험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교훈과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체험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간혹 보면, 신앙체험을 자랑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방언이나 신유 혹은 예언 같은 은사체험이라든지, 기도 중에 무엇을 보았다라든지, 집회나 기도 중에 어떤 현상이 일어났다든지... 한 때 우리 교회들 안에도 그런 신비체험이 많이 유행하였습니다. 저도 부사역자 시절 그런 집회에 청년들과 함께 부득이 참석하여, 방언 기도도 받고 누워있기도 하고 깃발을 들고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집회에서 느끼는 참 아쉬운 점은 그분들의 그런 신앙체험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사모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신앙체험과 신비체험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준은 성경인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그런 체험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방언을 다 받을 수 있고 다 받으라고 하는데, 성경은 방언을 다 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임파테이션이라고 해서 능력을 나누어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런 임파테이션은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잠깐 있었지 그 이후 어느 선지자나 사도들에게서 결코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도 동일하시고 그래서 기적이나 능력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경의 기적은 출애굽 시대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와 예수님 시대와 초기 사도 시대에만 나타날 뿐, 그 시대 외에는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기적을 행했지만, 나중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나 드로비모의 병을 고쳐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체험과 능력체험과 신비체험을 일상적으로 무분별하게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항상 분명한 목적과 의미가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체험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본성상 그런 분이십니다. 무분별하게 능력을 행하는 그런 어지러운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기적이나 신비체험 자체를 늘 요구하고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위적인 신앙체험을 찾거나 추구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할 때 신비체험이든 기적이든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체험은 그런 믿음의 삶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험이 많다고 좋은 신앙은 아닙니다. 신비체험을 많이 한다고 좋은 신앙도 아닙니다. 좋은 신앙은 체험이 있지만, 체험의 다수나 체험의 성격으로 신앙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많든 적든 크든 작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자기 체험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는 꼭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입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제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듣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것이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엿새 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바르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이 변화산에서 놀라운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늘 외우고 사도신경으로 정통 고백을 하고 많은 사역과 일들을 하고 각종 신앙체험과 신비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온유한 자가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고, 사람에게 노하거나 함부로 하지 않고, 원망들을 일이 있으면 가서 화해하고, 악으로 악을 대적하지 말고, 돈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고, 자기중심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는... 그런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신앙체험이나 신비체험을 중요시하거나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실제 삶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체험은 내가 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저도 인생의 작은 고비와 변곡점 마다 하나님이 체험을 주셨습니다. 처음에 직장을 다니다가 선교단체 간사가 되기로 했을 때, 후원을 받는 낯선 삶의 방식이 저의 마음을 눌렀습니다. ‘잘 할 수 있을까?’ ‘후원자를 잘 만날 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 IMF시기인데 어쩌지?’ 하루에도 몇 번 마음이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모금 훈련을 받고 내려오는 날 서둘러 입석으로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가 출발하고 영등포 역을 스쳐 지날 때, 저는 플랫폼에 서 있는 무심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후원자를 만나야 하는데 다 저 사람들처럼 무심한 얼굴이 아닐까...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격한 마음으로 아무 자리에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좌석 주인이 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천안역에 도착할 때 즈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순간 제 등에 따뜻한 손길을 느꼈고 마음이 한순간에 평안해졌습니다.
마치 아이가 막 울다가 갑자기 괜찮아진 것처럼,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괜찮아지니 너무 머쓱하고 바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마치 다윗의 시편 22편 같았습니다. 절망에서 찬양으로 시편 22편은 급격히 변화하는 시입니다. 21절에서 ‘야니타니’라는 말과 함께 그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죠. ‘야니타니’는 ‘내게 응답하셨도다’라는 말인데, 그것은 다윗 안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로 다윗은 절망에서 찬양으로 변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역사가 제게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잠시 후 천안역에 도착하니 좌석 주인이 왔습니다. 계속 웅크리고 기도하고 있었으면 창피할 뻔 했는데, 하나님은 그런 배려까지 해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교단체 간사를 시작할 때 그런 체험을 주셔서, 10년 정도 간사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후원은 늘 잘 못 받는 간사였지만, 생활하는 데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후 신학과 부사역자 생활을 마치고 교회개척을 하였는데, 그때도 저의 인생의 기로이자 변곡점이었습니다. 개척을 하고 1년 정도 가족끼리만 예배를 드렸죠. 1년 정도 지나니 ‘아 여기까지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요즘 교회가 잘 될 수가 있나... 여기까지 해봤으니 이제 됐어...’ 그런 편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동네에 있던 그룹 홈 아이들 5명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 5명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들에핀교회를 하는 동안 이런 일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마치 하도 손님이 없어서 이만 장사를 접을까 하는데, 손님이 한 명 오는 것입니다. 그러고 또 시간이 지나고 장사가 안되고... 그래서 접을려고 하면 또 손님이 오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참 이상하신 면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안 되겠다 싶으면 까마귀를 보내주시고, 또 안 되겠다 싶으면 까마귀를 보내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면서 얻는 신앙체험이 진짜 체험입니다. 기적도 체험하고 실패도 체험하고 기도응답도 체험하고 뜻밖의 체험도 하고...
그러므로 어디 모르는 곳에 가셔서 모호한 영적 체험 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로 체험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증거와 체험과 확신을 주십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오늘 이 제자들과 같이 주님을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체험을 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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