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

믿음찬교회 0 334 2021.08.31 15:09
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 15:21~28
2021.08.29.

오병이어 사건과 정결 논쟁 후에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떠나십니다. 그곳은 이방지역인데, 예수님이 그리로 가신 것은 로마와 예루살렘의 눈을 피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이방지역에서 예수님은 한 가나안 여자를 만나시게 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죠. 예수님은 이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시고 이 여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사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중요한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신 부분입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례적인 이와 같은 예수님의 칭찬에 담긴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입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은 수리아에 사는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여인은 흉악한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안타까운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참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불쌍한 여인을 대하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친절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절한 요청을 3번이나 거절하셨습니다. 처음엔 침묵으로, 두 번째엔 내 사역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세 번째엔 직접적인 거절로... 특히 이 세 번째 마지막 거절이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모욕적이었죠.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성경을 읽는 누구나... 예수님이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차갑고 냉정하실까요?
예수님은 대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친절하시고 부드러우신 분이십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예수님은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키 작은 세리 삭개오를 만날 때에도 예수님은 그의 직업이나 그가 나무 위로 올라간 것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닦았던 여자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해주셨습니다. 부자 청년에게도 그를 사랑하시며 권면해주셨고,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우물가의 여인에게도 친절하고 진지하게 대화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일까요? 예수님께서 정말 이 여인을 이방인이라고 차별하시거나 모욕하시는 걸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을 대하신 과정은 조금 특별했지만, 차별하시고 끝내  거절하시는 의도는 아니셨습니다. 마지막 28절에 이 여인을 칭찬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말 번역에는 감탄사가 빠져있지만 원어로 보면,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크게 칭찬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세 번이나 거절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때문일까요? 네, 그녀의 마음과 믿음을 이끌어내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저는 항상 이 말씀을 볼 때마다, 그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대장금이란 드라마입니다. 어린 장금이가 처음으로 궁에 들어가 상궁마마에게 교육을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상궁이 장금이에게 말합니다. “물을 떠오너라.” 장금이가 소주간인가요 거기 가서 물을 떠왔습니다. 그러자 한상궁은 말합니다. “다시 떠오너라.” 장금이는 다시 가서 이번에는 우물에 가서 물을 떠옵니다. 그러나 한상궁은 또 말합니다. “다시 떠오너라.”
장금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하자 한상궁은 그제야 말을 합니다. “물도 하나의 음식이다. 물이라고 다 같은 물이 아니다. 너는 물을 떠오기 전에 어떤 물을 원하는지 물어야 했다.” 네, 한상궁은 그렇게 장금이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를 가르치실 때, 그렇게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미리 말해주시지 않고, 곤란하고 어렵게 하시고, 우리가 답을 찾도록 하시죠. 지금 예수님의 모습도 그와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개”라고 말씀하신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너무 심한 말씀이 아닌가...
네, 지금 우리로선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아주 작지만... 고려할 내용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개’는 일반적인 ‘개’가 아니라, 좀 덜 모욕적인 ‘퀴나리온’, 즉 작은 애완견을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이 ‘퀴나리온’은 주인의 곁에서 주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개로, 오히려 종보다 나은 대접을 받고 주인과의 거리도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런 의미를 살려 다시 번역한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강아지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물론 이렇다고 경멸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순전히 경멸적이지만은 않은 뉘앙스가 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냉정한 거절이 아닌, 어떤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인지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옳습니다. 주님! 그러나 강아지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네, 정말 놀라운 대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감추어진 의중 속으로 파고들어오는 말이죠. 이런 정도로 예수님과 대화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자신을 한 없이 낮추고 또 간절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기도의 정석, 기도의 모델과 같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이해하고 기도를 해야 하죠. 우리의 구하는 내용이 명분이 있고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없는 겸손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이 여인은 정말 기도의 모델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이 놀라셨습니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그녀의 이런 말과 태도와 믿음에 감탄하시고 그의 딸을 고쳐주시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떤 이의 믿음을 크다고 칭찬하신 예는 무척 드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과 한 백부장 정도가 칭찬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 백부장의 종이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가시겠다고 하자, 그는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달음이 없느냐?”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크다고 칭찬하신 것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왜 그녀의 믿음은 그렇게 크게 칭찬 받았을까요?
첫째, 큰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믿었기 때문이고, 
둘째, 거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었기 때문이고, 
셋째, 무엇보다 자신을 부인하면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기도의 모범이기도 하지만 믿음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보여주는 믿음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늘 믿으시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내 뜻대로 안 되도 하나님을 끝까지 믿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어려운 시간 속에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시간 속에 믿음은 자라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여인의 믿음의 가장 큰 점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있습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이 여인의 믿음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큰 것을 구하지 않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작은 부스러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과 작은 부스러기... 이것이 이 여인의 믿음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것을 구하지 않고 작은 부스러기를 구하는 것이 어째서 큰 믿음일까요?

여러분, 큰 것 구한다고 큰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는 얼마든지 큰 것을 구할 수 있겠죠. 하나님을 위해서는 큰 것을 구하는 것이 큰 믿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여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 저는 작은 부스러기라도 감사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셨는데, 그 은혜 받기만 하고 드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작은 것이라도 저는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믿음이 큰 믿음인 줄 믿습니다.
저는 때론 우리 신앙이 염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구원 받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은 것만 해도 감사한데, 우리는 늘 이것저것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물질의 복도 주시고, 앞 길도 열어주시고, 머리가 되게 하시고, 하늘의 권세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은사도 주시고... 물론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죠.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일까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 앉을 한 가지이면 되고, 지금 내 목 축일 한 모금 물이면 그만이지,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실 거야.’ 오히려 이런 믿음이 큰 믿음 아니겠습니까? 나를 위해서 많이 구하는 것이 어찌 큰 믿음이겠습니까?
그러고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차고 넘치는 양식이 아니라, 겨우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쩨쩨한 분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은 놀랍게도 그런 작고 소박한 간구 속에 큰 믿음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매일 의지하고 늘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큰 것 구해서 큰 것 받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 잘 의지하지 않죠. 그러면 안되는데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또 내가 기도해서 능력이 있어서 큰 응답 받았다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건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위해 작은 것을 구하고 매일 주님을 의지하고 늘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이 여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다만 그것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 여인의 믿음을 주님은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들의 모습과 신앙 상식은 어떻습니까? 비전이니 능력이니 축복이니 하면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아니라, 큰 덩어리를 원하고, 아예 주인의 상 자체를 다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그런 생각을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믿음은 본래 우리의 죄 된 인간 중심이 깨뜨려질 때 시작됩니다. 인간은 본래 교만한데, 교만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고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드시 고쳐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과 자기 중심을 고치시기 위해 고통과 실패를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여인은 그런 과정을 제대로 거친 사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작은 부스러기를 구하는 이 여인의 믿음은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그것은 그녀의 철저한 고통과 실패로부터 왔습니다. 그녀는 흉악히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용하다는 무당, 용하다는 우상 신들을 찾아다니며... 모든 방법을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어떤 우상 신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고통받는 딸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적인 자기 부정의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이 자신을 개라고 하든 강아지라고 하든 개의치 않았던 것은 이 때문입습니다.
만약 아직 자기 내면이 무너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반발했을 것입니다. “그런 못된 말이 어디 있느냐”고 얼굴을 붉히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 안에는 철저한 자기 부정의 역사가 있었기에, 주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믿음의 비밀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와 같은 영적인 체험이 있으시길 빕니다.

저는 20대까지 착한 교만한 놈이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잘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다닐 때 그런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저에게 저만의 계획이 있었죠.
저만의 계획은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무관하게 세상과 무관하게 시대와 무관하게 역사와 무관하게... 저만의 조용한 잘 사는 삶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재빨리 제 일을 하고 그리곤 조용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제 삶의 철학은 ‘나서지 않는 관조의 삶...’ 그것이 제 삶의 철학이라면 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 모습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셨습니다. 회사를 다닌지 몇 년 후, 저는 아무리 내가 내 일을 잘해도 일이 꼬이고 실패하고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실패의 시간이 계속 되었고, 저는 마침내 어느날 하나님께 제 삶을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진심으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그런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영적인 체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제 삶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중에 그렇게 정식으로 하나님께 무릎 굻는 시간이 꼭 와야 합니다. 철저한 실패와 자기 부정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죄 된 나 자신과 무능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그렇게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바로 우리 구원의 영광스런 시작입니다. 물론 이것을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억지로 무장해제하고 맹목적으로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적인 교만과 자기 중심을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입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연인에 머무르고 맙니다. 하나님이 없는 1차적인 생명 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새창조되고 새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해체되고 굴복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고백이 우리 마음 중심에서 만들어지고 흘러나와야 합니다. 진정한 구원과 믿음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동시에 기록하고 있는 이 이방여인의 믿음은 우리에게 기독교믿음의 참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생의 절박한 위기와 고통 가운데 그녀는 주님께 나아 왔습니다. 세 번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었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작은 은총을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옳습니다. 나를 강아지라고 불러도 좋고 개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나는 그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작은 은총이 중요합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실패와 자기 부인을 통해 더 온전해지고 빛나는 하나님의 선물... 그것이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그런 큰 믿음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믿음은 자기 신념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도 아닙니다.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뢰와 동행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이와 같은 진정한 큰 믿음을 소유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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