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요한계시록의 구조 2

믿음찬교회 0 622 2021.08.09 17:57
요한계시록의 구조 2
계 1:19
2021.08.06.

일반적으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처음에 읽으면, 요한계시록이 시간 순서대로 진행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곱 인 다음에 일곱 나팔이 나오고 일곱 나팔 다음에 일곱 대접이 나오고, 그래서 마지막에 최후의 심판과 새 예루살렘이 나오는 것이죠. 더구나 1:19 말씀이 그런 구조를 뒷받침하는 것 같습니다.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그와 같은 직선적인 시간 구조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주에 1:19 말씀이 요한계시록 말씀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는 것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특히 미래에 해당하는 ‘장차될 일’이라는 표현이 다니엘서의 ‘후일에 될 일’에서 왔다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장차 될 일’은 원어로 ‘이후에 될 일’인데, 이것은 요한이 다니엘서의 ‘후일에 될 일’을 의도적으로 바꾼 내용이죠. 다니엘서에서 볼 때 그것은 먼 후일이었지만, 요한이 볼 때 그것은 지금 이후에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먼 미래를 말하는 것 같은 ‘장차 될 일’을 ‘지금 이후에 될 일’로 바꾸어 읽고, 그 의미는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지금부터 시작된 것’으로 가깝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이 소위 7년 대환난 같은 먼 미래의 마지막 시기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작된 종말을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 말씀을 1:19에 의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무엇이고, 어떻게 되어 있는가?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알기 위해 살펴보면, 첫 번째로 우리 눈에 쉽게 발견되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안에는 많은 내용이 반복되고 중복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우선 2~3장의 일곱 교회에 대한 많은 내용과 주제가 4장 이후 환상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참 유대인과 거짓 유대인(2:9, 3:9 / 7:4, 14:4), 교회의 환난과 박해와 순교, 거짓 예언자와 사탄적인 왕(2:12~15 / 12:17~13:1, 13:13~14), 이세벨과 음녀(2:20 / 17:1) 등 많은 내용들이 중복됩니다.
또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도 서로 많은 부분이 중복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판과 구원이 요한계시록 많은 곳에서 중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과 구원은 20장 이후에 한 번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여러 번 나오고, 특히 11:15~18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구원과 심판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이와 같은 중복을 본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단순히 시간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구조에는 이와 같은 중복과 반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두 번째로 ‘교차대구 구조’가 많이 나타납니다. 교차대구 구조는 아시다시피 글이 A-B-C-B′-A′로 진행하는 것을 의미하죠. 그리고 그렇게 진행하면서 글의 중심 내용을 C에 두는 기법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와 같은 교차대구의 틀을 뚜렷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의 서론은 결론과 댓구를 이루고, 2~3장의 불완전한 교회는 21장의 새 예루살렘 즉 완전한 교회와 댓구를 이룹니다. 그리고 그런 댓구 속에 요한계시록의 중심에 용과 짐승 그리고 여자와 아들과 성도들의 싸움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강조하는 것은 사탄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있어서 이와 같은 교차대구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 구조는 수많은 중복과 병행이 있고 거기에 교차대구가 가미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최근에는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의 관련성 연구가 진전되면서, 요한계시록이 다니엘서의 단어나 구절만 이용한 것이 아니라 그 구조까지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즉 다니엘서에 5개의 환상 구조가 있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에도 그런 5개의 구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요한계시록 구조에 대한 내용을 종합하면, 요한계시록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1:1~8 서론
   
              1:9~3:22 세상에 있는 교회의 불완전함           


                  4:1~8:1  일곱 인
                    8:2~11:19 일곱 나팔
 
                      12:1~14:20 사단과의 싸움
                    15:1~16:21  일곱 대접
 
                  17:1~21:8 최후의 심판

              21:9~22:5 영광 중에 있는 교회의 완전함
   
                        22:6~21  결론
그렇다면, 우리는 이상과 같은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은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면 교회라는 틀이 앞뒤로 요한계시록의 내용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기본적으로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서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는 것 이상으로 교회를 지켜보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의 교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전체적으로 불완전한 일곱 교회가 완전한 교회로 성장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의 교회들이 세상 현실 속에 불완전한 모습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함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교회의 또 다른 사명입니다.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라, 스스로 완전한 교회로 자라고 성장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잘못되면 성도들의 구원과 성화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 현실 속에 올바른 믿음을 지켜가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체로 교회는 성도 개개인에게 깨어 있으라고 많이 말하죠. 예배 잘 참석하고 기도 많이 하고 믿음으로 사세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요한계시록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깨어있는 것보다 교회적으로 공동체적으로 깨어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 이것이 맞는 말씀이죠. 아무리 개인적으로 깨어 있으려고 해도 교회 전체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그 안에 있는 개인이 깨어 있기 힘듭니다. 그 안에서 계속 기도와 말씀을 공급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지금 좀 우려스럽습니다. 성도 개개인은 깨어 있는 분들이 많지만, 그분들이 속해 있는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의 중심에는 사단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심 메시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중요하게 말씀하는 것은 우리의 사단과의 궁극적인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을 귀신의 역사나 사단과의 싸움으로 인식하고 늘 싸우라는 의미가 아니죠. 안 좋은 작은 일 하나까지 다 귀신의 역사라 생각하고 늘 기도와 믿음으로 물리치고... 작은 일 하나까지 영적으로 해석하고 살아라는 의미가 아니죠. 
이것은 우리 신앙과 삶이 궁극적으로 그 악한 존재와의 싸움이자 분투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궁극적이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신앙 속에 싸우며 살아가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 정신을 가지고 죄와 무기력과 불의와 타성과 타락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은 싸움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신앙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은 달콤한 축복이나 손쉬운 승리나 현실을 위로하는 아편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싸우며 사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자녀를 믿음으로 기르는 것도 싸움이고, 내 삶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것도 싸움이고,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한 것도 싸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싸우며 살아야 하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싸우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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