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가라지비유와 천국의 비밀

믿음찬교회 0 265 2021.07.23 19:13
가라지 비유와 천국의 비밀
마 13:24~26, 31~33, 36~40, 44~52
2021.07.18

오늘 설교는 먼저 13장의 구조를 살펴보고, 이어서 오늘 본문인 가라지 비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3장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 말씀은 52절까지입니다. 이 안에는 모두 8개의 비유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8개의 비유가 어떤 구조와 어떤 순서로 되어 있는지 오랫동안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8개의 비유가 보일 듯 말 듯 모호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이중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견해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맨 마지막 비유인 8번째 비유를 하나님 나라 전체 비유 해석에서 일단 제외하는 것입니다.
52절에 나오는 이 8번째 비유는 엄밀히 말해 하나님 나라 비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비유를 들은 제자들이 이제 그것을 전해야 한다는 비유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 비유에서 일단 제외하고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 전체 구조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7개의 비유 구조만 알면 되기 때문에 일이 쉬워지고, 또 13장 비유들의 결론을 8번째 비유로 고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역시 일이 쉬워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7개의 하나님 나라 비유와 1개의 다른 비유가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두 번째는, 36절 말씀을 13장 구조 분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13장은 처음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서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그날 배에 올라가 앉으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 비유를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씨 뿌리는 비유를 말하고 이어서 가라지 비유를 말하고 또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도 말씀하셨습니다.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거기서 계속 제자들과만 말씀하시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비유 말씀에 있어서 36절을 기준으로 장소와 대상이 뚜렷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마태의 의도를 따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 말씀 전체를 2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청중들에게 말씀하신 앞부분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뒷부분... 이렇게 2부분으로 말이죠.
그러면 청중들에게는 비유 말씀 4개가 주어지고, 이어서 제자들에게는 해석과 함께 비유 말씀 3개가 주어지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되면 비유들은 4:3으로 나누어지는데, 그래서 어쩌면 마태가 8번째 비유를 넣어서 비유들을 4:4로 맞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36절을 주목하여 여기에 마태의 의도가 있다고 본다면, 뒷부분에 나오는 1개의 해석과 3개의 비유는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시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 해석됩니다. 가라지 비유 해석은 제자들에게 좀 더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보화 비유와 진주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제자들의 자세와 태도를 말하고, 그물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렇게 13장 전체 말씀을 36절을 기준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하나님 나라 비유 해석의 중요한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나라 비유 7개를 하나님 나라의 시작에서 종결까지 시간적 순서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비유 7개를 놓고 차례대로 읽으면, 누구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1) 씨 뿌리는 비유 :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결실
2) 가라지 비유    : 하나님 나라의 위기
3) 4)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 하나님 나라의 성장
5) 6) 보화 비유, 진주 비유  : 성장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태도
7) 그물 비유      :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결과
그러므로 이 7개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위기를 맞고...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참여하고 마침내 어떻게 완성되는지... 그 일련의 과정을 말씀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하나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고, 이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대개 일반 사람들은 그저 우리가 교회에 모여 종교생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종교적 가르침을 따르고 종교적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의 삶을 살고 그 나라와 함께 성장하고 그 나라가 가는 곳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결국 종교 생활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 생활이라는 것은 그 종교의 창시자가 남긴 가르침과 삶을 내가 따르는 것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참여하고 편승하는 것입니다. 주체와 원동력이 완전히 다른 것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와 활동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 구원 열차에 다 올라타시길 바랍니다.

네 번째는 7개의 비유들 안에 강약 즉 경중이 있고, 또 서로 짝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7개의 비유가 그 의미와 중요성에 있어서 똑같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고, 또 어떤 것은 해석이 있고 어떤 것은 해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는 길죠. 그리고 그 두 비유는 해석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두 비유가 특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해석이 있는 비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7번째 그물 비유입니다. 49~50절이 해석이죠.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그러므로 7개의 하나님 나라 비유는 3개의 해석이 있는 비유와 4개의 해석이 없는 비유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3개의 해석이 있는 비유가 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가장 기본적인 비유로서 중요하고, 가라지 비유는 가장 주의해야 할 비유로서 중요하고, 그물 비유는 마지막 결론으로서 중요한 것입니다.
또 7개의 비유는 서로 2개씩 짝이 되는 것 같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가 짝이 되고,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가 짝이고, 보화 비유와 진주 비유가 짝입니다.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이 비유들이 그 의미를 두 번씩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가라지 비유를 통해 좋은 땅에 뿌려진 좋은 씨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더 말하고, 겨자씨 비유는 누룩 비유로 한 번 더 말하고, 보화 비유는 진주 비유로 한 번 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그물 비유는 혼자 남게 되는데, 그런데 이 그물 비유도 그 내용으로는 가라지 비유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구별되고 그물에 잡힌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네, 마태복음 13장 비유의 구조에 대해서 이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이 말씀을 보는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뚜렷한 구조이고, 여기서 더 들어가면 좀 어색하고 무리한 자기 해석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13장 전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라지 비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가라지 비유는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에는 없는 하나님 나라 비유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씨 뿌리는 비유와 스스로 자라는 씨 비유 그리고 풍성한 겨자씨 비유... 이렇게 3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하나님 나라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씨가 뿌려져서 풍성하게 자라는 것을 희망적으로 전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은 왜 그런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마가복음이 초기 복음서로서 임박한 종말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세상은 혼란스럽고 종말론적인 분위기였지만, 주님은 금방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루살렘이 정복되고 성전이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역사는 아무 일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나올 시기에 교회들은 주님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고치게 됩니다. 임박한 종말론을 버리고 지연된 종말론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지만, 그것은 미래의 일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도 그런 긴 세월 속에 힘들고 기다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교회 안에서는 가라지와 같은 신실하지 않은 신자들이 나타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각종 이단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라지 비유를 재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고보면 마태복음 안에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 예복을 입은 자와 입지 않은 자,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등 그런 경고의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가라지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이 세상과 세월 속에서 신실한 믿음이 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이 가라지 비유의 의미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일부 있습니다. 이 비유의 대상이 나는 해당 되지 않고, 나는 해당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주된 2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13:38 말씀을 근거로 이 밭을 세상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알곡은 믿는 자로 가라지는 안 믿는자로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다 알곡이므로 이 비유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주석해놓은 주석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참고하는 NICNT 주석이나 WBC 주석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도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세상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죠. 마태복음을 잘 살펴보면 마태도 교회를 그런 시각에서 corpus mixtum 즉 혼합체(영과 육, 거룩한 것과 속된 것,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현실 교회를 봐도 그렇습니다. 교회마다 문제가 많고 목사라고 다 거룩한 것은 아니죠.
그리고 역사적으로 돌아봐도 이 비유를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해석한 경우가 더 많고, 또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마태복음 내부적으로도 일관성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마태복음은 알곡과 쭉정이,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양과 염소,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교회 안에서의 이런 대비를 계속 말씀합니다.
특히 15:13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 있지만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라지 비유를 세상이 아니라 교회인 우리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이 가라지 비유를 칼빈주의 예정론에 입각하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견해입니다. 비록 이 말씀이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애초부터 알곡과 가라지는 하나님이 예정하셨기 때문에 알곡은 처음부터 알곡이고 가라지는 처음부터 가라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우리는 다 알곡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가라지는 누구냐 하면, 가라지는 교회를 다니다가 도중에 신앙을 저버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다 알곡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에는 이런 칼빈주의 예정론에 입각해서 이 비유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태는 예정론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정론으로 마태복음을 보는 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오히려 마태복음은 바울 서신 이후에 나온 성경으로서, 바울의 예정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보완하고 교정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를 후대의 야고보서가 행함에 대한 강조로 교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는 개인 예정론이 과연 바울이 말씀한 올바른 예정론인지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이 중요하게 말씀하는 이 가라지 비유를 오늘날 우리들이 신학의 하나인 예정론에 입각하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신학적 예정론은 계속 변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가라지 비유를 나와 무관한 말씀으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유는 교회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가라지는 저도 될 수 있고 여러분들도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가라지는 논이나 밭에서 자라는 피나 강아지풀과의 잡초 종류가 아닙니다. 우리말 번역을 가라지라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사전을 보면 이 가라지를 독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독보리는 다른 말로 깜뿌기이죠. 이것은 벼나 보리, 밀, 수수, 옥수수 등 거의 모든 곡식에 나타나는 일종의 병으로, 원래의 곡식이 깜뿌기 균에 의해 추수 때에 검게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깜뿌기는 곡식이 감염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엔 전혀 구분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 그 낟알이 까맣게 변하고 독성을 가지게 되죠. 그것을 조심히 거둬 소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터져 바람에 날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기존 곡식알에 붙거나 땅에 떨어져 잠복하게 되고, 그러면 이듬해 농사는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에 좋은 씨가 뿌려졌더라도 추수 때에 얼마든지 깜뿌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라지 비유에 앞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네 가지 밭에 뿌려진 씨가 각각 거기서 어떻게 자라는지 말씀하셨죠. 그리고 이어서 이 가라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가라지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의 속편입니다.
4가지 밭 중에서 좋은 땅에 주목하여, 거기서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씀하는 것이 바로 이 가라지 비유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유는 거기서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그 좋은 땅에 악한 사단이 역사하여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종들이 집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렇습니다. 땅도 좋은 땅이고, 씨도 좋은 씨였습니다. 그런데 자라는 과정에 악한 사단이 역사하여 가라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가라지 비유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비유는 우리에게 믿음의 진실함과 신실함을 말하는 비유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좋은 씨였어도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결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변질되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변질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짓거나 실수를 하거나 한순간 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을 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박하사탕이란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설경구씨가 남자 주인공 영호였고, 문소리씨가 여자 주인공 순임이었습니다. 처음에 영호는 순수했습니다. 영호는 순임이 준 박하사탕을 받고 그녀를 좋아합니다. 이후 영호가 군대에 가고 순임은 영호를 면회가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그때 영호는 광주사태 진압군으로 가게 됩니다. 영호는 거기서 오인 사격을 해 한 소녀를 죽이게 되는데, 그때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제대 후 그는 형사가 되어 민주화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잡아다 고문하는 폭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런 형사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순임이 그를 찾아옵니다. 허름한 식당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나오죠. 그러나 영호는 더러워진 자기 손을 바라보면서 순임의 사랑을 거절합니다. 순수한 그녀를 만나기엔 자기가 이미 너무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순임이 없는 그의 삶은 더 전락하여 결국 철길 위에 서게 됩니다. 그 마지막 대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아무튼 이 영화는 한 사람이 어떻게 타락하고 변질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은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큰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변질은 그런 정도의 넘어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의 근본적인 틀이 달라지고 영혼에 근본적인 변질이 오고 영적으로 회개를 할 수 없고 그래서 결국 종자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비유는 우리에게 늘 깨어있는 신앙을 말합니다. 깨어있는 신앙은 변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세상과 사단은 우리에게 가라지의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늘 한결같은 순수한 신앙을 지켜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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