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 1 (인생의 짐)
마 11:28~30
2021.06.20.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전도를 할 때도 자주 사용하여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도 잘 아는 말씀이죠.
그러나 우리 옛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옛말처럼 우리가 흔히 잘 안다고 생각한 말씀인데, 알고 보니 잘 모르는 말씀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 말씀도 워낙 유명해서, 의외로 등잔 밑같이 그런 어두운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바르게 이해하고, 그리고 그 의미와 교훈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한 번 나오는 이 말씀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이 말씀이 매우 큰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큰 특징은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굉장한 권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세상의 모든 자를 부르시고, 자신에게 오라고 하시고, 자신이 그들에게 쉼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자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고, 그것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이 말씀은 우리에겐 괜찮지만, 일반 사람들에겐 거부감이 들 정도로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이 정도의 권위 있는 말을 한 분은 인류 역사 속에 없습니다.
석가모니의 경우에도 그분이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최후의 유훈은 ‘나의 가르침과 진리를 섬으로 삼고 또 네 자신을 등불로 삼아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이런 말씀도 했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런 점에서 석가모니는 사람들에게 어떤 곳을 향해 ‘가라’고 한 사람이지, 자신에게 ‘오라’고 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공자의 경우도 “천명을 깨달아 이 세상에서 천명을 구현하라”라는 말했지만, 자신에게 ‘오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 같은 분도 “너 자신을 알라, 덕과 지혜로 순수하고 올바른 영혼을 가꾸라”라고 말했지만, 자신에게 ‘오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분들이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오라’라고 말하려면, 자신이 그들의 삶과 영혼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을 한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이죠. 완전 진짜이거나 완전 가짜이거나...
그런데 예수님은 한번 하기도 힘든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권위를 가지고 하신 말씀을 복음서에서 또 찾는다면,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7개의 자기 선언이 나오죠. 그중에 한두 개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 말씀들은 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위를 가지고 하신 놀라운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신 오늘 말씀도 그런 큰 권위 속에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특별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현대의 자기 시각으로 보고 여러모로 불편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자기가 뭔데 우리보고 오라고 하는 거야... 볼 일이 있으면 자기가 와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나의 멍에를 매라’는 말씀도 무척 거부감이 들 것 같습니다. 멍에라는 것 자체가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죠. 오늘날 우리는 어떤 멍에나 구속이나 속박도 거부하는 현대인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지 않는 분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이 멍에의 의미는 우리를 어떤 종이나 소처럼 부리려고 메어주는 멍에가 아닙니다. 이 멍에는 우리가 우리의 짐을 메는 멍에입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고 오해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으로 삼거나 구속하기 위해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기 짐을 잘 질 수 있도록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우리의 짐을 지고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그렇고,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아무런 짐이 없고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짐이 무거운 사람이 있고, 상대적으로 짐이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짐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멍에의 차이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짐을 질 수 있는 좋은 멍에를 가진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좋지 못한 나쁜 멍에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무거운 짐에다 멍에마저 좋지 않다면, 더 힘들겠죠. 멍에가 좋으면, 우리는 우리 짐을 잘 질 수 있습니다.
요즘 시골에 가면 나무 지게가 거의 없어지고, 알루미늄으로 만든 지게가 대부분입니다. 가볍고 튼튼하죠. 나무지게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러므로 짐만큼이나 멍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인생의 짐이 서로 비슷하다면, 우리가 어떤 멍에를 가졌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예수님 말씀을 통해 멍에에 대한 오해를 풀고, 나아가 멍에의 중요성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멍에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30절에서 “내 멍에는 쉽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쉽다’라는 단어를 원어로 살펴보면 그 의미가 ‘좋다’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크레스토스’인데, 이것은 ‘목적에 맞게 잘 만들어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쉬운 멍에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멍에 자체가 짐을 지기에 ‘좋고 적합하고 훌륭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짐을 잘 질 수 있도록, 그런 좋은 멍에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간혹 오늘 본문에 대한 어떤 설교를 보면, ‘나의 멍에를 메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거긴 땅이 척박해서 보통 소 2마리가 밭을 간다... 그래서 나의 멍에를 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와 함께 멍에를 매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면, 얼마나 가볍겠나... 예수님이 우리 짐 대신 져주시고 우리는 그저 예수님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쉬운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인생은 그렇게 쉽고 편안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네, 이렇게 설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좀 좋지 못한 설교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해석은 성경주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각에서 나와 퍼진 것 같은데, 주석적으로 근거가 없고 문맥적으로 그런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분이시죠.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또 연약하고 두려울 때 우리를 도와주시고 해결해주신다는 것이지, 처음부터 우리 짐을 예수님이 다 지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주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짐을 죄 짐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죄 짐을 다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설명 그 짐이 죄 짐이라고 해도, 예수님만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는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말씀의 이 짐을 무엇으로 생각하든, 우리 인생의 짐이든 우리죄 짐이든 예수님이 전적으로 내 짐을 지신다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내 짐을 예수님께 다 맡겨 버리고 나는 힘 하나 안 들이고 거기에 더해 축복도 받고 나중에 천국도 가고... 그게 무슨 신앙입니까? 그런 신앙은 예수님도 가르친 적이 없고 바울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의미가 그런 것이고 은혜의 의미가 그런 것이라면, 왜 바울은 그렇게 고생하고 매를 받고 배척을 당하고 끝내 목숨을 바쳤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기본적인 마음과 자세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복음서 말씀을 계속 살펴보는 이유는 아무쪼록 그런 신앙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인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그 멍에는... 그 멍에의 의미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렇습니다. 그 멍에는 그분의 가르침이고 그분이 말씀하신 삶의 방식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마태복음 안에서 이미 말씀되었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고,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고,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추구하고, 좁은 문으로 들아가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이런 모든 내용은 종교적인 내용들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생활의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면 우리는 그렇게 살며 우리 인생의 짐을 잘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인간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따라가면, 우리는 좋은 멍에를 가진 사람이 되어 우리의 삶의 무게를 잘 감당하며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부족한 제 자신을 돌아봐도, 저는 예수님이 제게 만들어 주신 좋은 멍에를 가지고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저는 아주 어릴 적 한쪽 눈에 병이 들어, 짧은 기간 동안 모두 5번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한쪽 눈의 시력을 대부분 잃고 말았습니다. 조리개 역할을 하는 홍채의 기능도 잃고 말았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한 번씩 제 눈을 볼 때마다 많이 우울했습니다. 햇볕에 눈을 찡그리는 것도 싫고, 사진을 찍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과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도 싫고, 혼자 거울을 보는 것도 싫었습니다. 저는 혼자 있는 것이 편했습니다. 저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한 가운데 그런 마음의 무게를 안고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제가 지고 가야 하는 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창 제가 예민한 시기였던 중고등학생 시절에, 저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친구들과 좋은 분들이 많이 계셨고, 무엇보다 그때 하나님께서 몸과 마음이 자라던 제게 많은 은혜를 주셨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 말씀을 읽는데, 그 말씀이 제 안에 뭔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달란트를 주셨다는 사실... 그때 저는 제가 달란트를 받았다면 항상 두 달란트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섯 달란트는 절대 아냐, 난 두 달란트만 받았어. 그래도 칭찬은 똑같이 해주실거니까 상관없어...’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돌아보면 그런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때 제게 짐을 질 수 있는 좋은 멍에를 만들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울하고 낙심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학생 시기를 잘 보내고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게 좋은 멍에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짐을 지고 내 삶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좋은 멍에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쪼록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좋은 멍에를 주시고 또 주실 줄 믿습니다.
멍에에 대한 오해를 해소했다면, 이제 남은 한 가지 오해를 해소할 차례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말하는 ‘마음’에 오해가 있습니다.
29절에는 ‘마음’이 두 번 나오죠. 첫 번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두 번째는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런데 이 두 단어가 다릅니다.
첫 번째 마음에는 헬라어 ‘카르디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두 번째 마음에는 헬라어 ‘프쉬케’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카르디아는 마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이죠. 따라서 첫 번째를 마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를 마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프쉬케’라는 단어는 많은 뜻을 가졌는데, 그 주된 의미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쉬케는 주로 ‘목숨, 영혼, 생명’으로 번역됩니다.
마22:37에 이런 말씀이 있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기서 ‘마음’에 ‘카르디아’가 사용되고, ‘목숨’에 ‘프쉬케’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엔 ‘프쉬케’를 ‘목숨’이라고 하기보다는 ‘생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뜻(이해, understanding)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10:28에 이 말씀이 있었죠.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여기서 영혼이라는 부분에 사용된 단어가 프쉬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경에서 프쉬케는 주로 ‘생명, 영혼’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29절 말씀을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번역한 것은 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너희 영혼이 쉼을 얻으리니”, 혹은 “너희 생명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이나 ‘내면’ 정도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차원인 우리 ‘영혼’과 ‘생명’이 쉼을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떠나서 좋은 곳에 가서 쉬면, 우리 몸과 마음이 쉼을 얻죠. 자연을 보고 새소리를 듣고 음악을 듣거나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 우리 마음에 평화가 오죠.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마음의 쉼과 평화는 곧 사라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부분 심리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일상 속에 살아가면 우리는 마음의 쉼과 평화를 또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쉼은 그런 심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안식과 쉼을 주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삶과 영혼에 영적인 잔잔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늘 걱정이 있고 염려가 있지만, 한편으론 내 맘 깊은 곳과 내 영혼 깊은 곳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이 존재합니다. 환경을 초월하는 메마르지 않는 감사와 기쁨과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면 이와 같은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런 내용을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찬양이 잘 말하고 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 찬송가엔 사연이 있죠. 작사가는 스파포드라는 미국인으로, 변호사이자 교수이자 시카고의 한 교회 장로였습니다. 그는 시카고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은 후,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가기 위해 먼저 가족들을 배로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배가 그만 사고가 나서 딸 네 명을 한꺼번에 잃고 아내만 겨우 살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급히 배를 타고 가게 되는데, 배가 그 사고 해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이들을 생각하며 울며 기도하며 말씀을 보는데,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놀랍게 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이 찬송을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단지 마음의 평안이 아닌, 이와 같은 영혼 깊은 곳의 평안과 안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속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복을 받고 이런 평안과 안식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멍에를 배우고 기꺼이 메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성도님들의 삶과 영혼 속에 주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안과 안식이 에덴의 강같이 흐르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