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자기부정, 믿음
마 10:38
2021.05.30.
일반적으로 회사에 입사하려면 시험을 치고 면접을 봅니다. 요즘은 대체로 면접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도 전도사님을 사역자로 뽑을 때 면접을 보죠. 그런데 그런 면접 때 목사님들이 전도사님들에게 하는 단골 질문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복음이 뭡니까?”
그러면 전도사님들이 신학공부를 많이 하고 준비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해서 잘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겁니다’라고 대답하면 1점,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겁니다’ 하면 2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예수님을 통해 그 나라에 들어가 지금 그 나라의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하면 5점 ...
그런데 어떤 전도사님은 목사님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복음은 곧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네, 로마사 1:2에 이런 말씀이 있죠.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점수가 얼마가 나올까요? 네, 그렇게 말하면 그 목사님이 ‘아 이 전도사가 뭔가를 좀 아는 전도사구나’ 라고 생각하고 10점 합격을 준다고 합니다.
아마 그것은 그 목사님이 어떤 교과서적인 답을 원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스스로 소화해서 어떻게 체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런 답을 원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도사님을 면접할 때 하는 ‘복음이 뭐냐’ 라는 질문도 어렵지만, ‘십자가가 뭐냐’ 라는 질문도 사실 어렵습니다. 복음이나 십자가나... 그 의미가 매우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나 십자가나 그 의미를 아주 다양하게 말할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다양한 의미 속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의미를 잘 알고 있어야 하겠죠. 우리는 그 본질적인 의미가 자기부정이라는 것을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나아가 이 자기부정이라는 십자가의 의미가 우리의 믿음과 어떤 관계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의미는 죽음입니다. 당시 상황 속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를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그때 그런 상황 속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관점을 가지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의미를 영원한 관점을 가지고 영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16:24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실제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이런 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 말씀하고 계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편, 이와 같은 깊은 십자가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가르친 분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의 의미를 나중에 깊이 깨닫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십자가의 의미는 다 실제적인 의미를 넘어선,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기독교를 예수가 아니라 바울이 만든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넘어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않는, 그분의 종입니다.
한 때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기독교 서적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이 읽히는 신앙서적이죠. 그 저자는 이용규 선교사라는 분인데, 하버드대학을 나오시고 몽골 선교사로 헌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내려놓음을 실천하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책을 보니까 그분도 내려놓음이라는 의미를 자기부정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말하기를, 자신은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가 본래 말하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내려놓는 것, 이렇게 자기를 부정하는 것... 표현은 달라도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알아야 할 사실은 이와 같은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우리의 믿음의 의미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고 우리 신앙의 본질이라면, 십자가는 반드시 우리의 믿음과 어떤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 가운데 십자가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믿음을 자기신념으로 이해합니다. 신념이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 지식과 판단으로 무엇을 믿고 확신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믿음은 이와 같은 자기주관적인 자기신념과는 다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과정과 행위에 있어서 믿는 내가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대상인 그분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차이를 우리는 잘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믿음은 적극적인 내 믿음이 아니라, 자기부정 속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맡기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믿음이 그런 믿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의 주요 인물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욥도, 베드로도, 바울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됩니다. 그것은 대단한 결단이고 훌륭한 믿음이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의지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되었지만,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처음엔 잘 믿지 못했습니다. 애굽에 내려가기도 하고, 거기서 사래를 자기 누이로 속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브라함은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았죠. 이스마엘 사건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랫동안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99세 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그리고 이삭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듬해 마침내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보다 철저히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내라 하신 말씀을 믿고 그 두 사람을 보내게 됩니다. 이삭을 바치라 하신 말씀을 믿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나중에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자기 종을 보내어 이삭의 아내를 데려오게 되죠.
이렇게 아브라함의 생애는 하나님을 처음엔 제대로 믿고 신뢰하지 않았던 아브라함이 점점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고 잘 따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좋은 믿음의 삶은 내가 내 믿음을 가지고 어떤 것을 계획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가지고 내 자리에서 성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고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정확하시고 더 잘 아신다고 믿고,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믿음입니다.
모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젊을 때 그는 애굽 왕실에서 자라며 똑똑하고 강하고 자기 힘이 넘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도 알고 자기 민족의 어려움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넘치는 의욕에 그만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실 때에도, 그는 애굽으로 안 간다고 했고 못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세였지만 홍해와 광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게 되면서,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그분께 철저히 순종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특히 시내산에서 그분을 만났던 경험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여호수아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때, 그의 마지막 당부와 걱정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율법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32:45~47)
이렇게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생활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게 됩니다.
욥은 의인이었지만,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 앞에 항의한 사람이고, 자신의 의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른바 자기 의와 자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죠.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욥은 모든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자신은 철저히 부정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욥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3~6) 이와 같은 욥의 고백이 바로 욥기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베드로도 그런 믿음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처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좋은 제자였지만 실수가 많고 의욕이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의 다음 말씀은 베드로가 노년에 어떤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전5:6~11) 이렇게 베드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귀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말고의 귀를 자르던 베드로가 어떻게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와 같은 믿음의 성장 과정을 바울도 거쳤습니다. 바울은 젊을 때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으로 유대인 중에 유대인으로 자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로마와 헬라 세계와 문화에 대해서도 잘 아는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버리고 자기를 비우게 됩니다. 자기의 지식, 학문, 출신, 배경, 율법에 대한 확신... 다 버렸죠. 그리고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하고 이제 자기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이렇게 자기 자신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과 같이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주요 신앙의 인물들이 다 어떤 연단을 받고 어떤 과정을 거치고 결국 어떤 믿음을 얻게 되었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한마디로 자기신념과 자기믿음과 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고 따르는 자기부정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 이해를 가지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 안에 있는 믿음은 이런 믿음과 어쩐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들은 오히려 자기신념과 자기믿음과 내 믿음을 믿음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비전을 가지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다... 내가 뭔가 큰 뜻을 품고 큰 꿈을 꾸고 기도하며 나아갔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다... 그런 간증과 가르침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큰 꿈과 큰 믿음을 가져라고 합니다.
네, 물론 우리가 얼마든지 비전을 가질 수 있고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뭔가를 계획하고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동기가 순수하고 그 열정이 선하다면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사용하시고 기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계획과 꿈과 비전 속에는 나도 모르게 내 중심적인 생각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인간적인 내 소원이고 내 바램이고 내 믿음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내 믿음이 되고 내 공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보다 높은 믿음으로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궁극적인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도 좀 더 순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너무 많은 우리의 요구와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나쁜 힘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길게 하나님을 붙잡고 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으로 오래 기도한다면 그건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단순명료하게 말하시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기도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기도할 때 말만 하지 마시고 그 일을 마음으로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맡기는 믿음의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이 좋은 믿음인가... 십자가라는 자기부정이 들어있는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내 계획과 내 생각과 내 의욕으로 넘치는 믿음이 아닌, 그분의 뜻을 먼저 알고 거기에 순종하고 그분을 신뢰하고 따라가는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인간적인 힘을 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이와 같은 십자가의 믿음을 가지신 우리 들에핀믿음찬 교회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