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목적
계1:1~3
2021.05.21.
지난 주에 우리는 계 1:1~3을 통해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 살펴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묵시이자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시와 예언이 무엇이고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죠. 묵시는 예언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잃은 시기에 나오는 것으로, 종말에 대한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때에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의 말씀이 나왔을까요? 그것은 그때 교회의 상황이 매우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예수님 시대에 황제 체제가 들어서는데, 1세기 중반이 되면 황제숭배가 점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1세기 말이 되자 황제숭배는 로마제국 안에서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됩니다. 특히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와 가깝고 또 로마제국의 주요 도시들이 있는 곳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교 축제 속에 황제숭배 및 충성의식을 경쟁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것은 제국 안에서 자신들의 출세와 지역의 발전을 위해 무척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의 교회와 신자들은 이 같은 흐름에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간 황제숭배에 저항하며 버텨왔는데, 이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취임 이후 본격적인 황제숭배가 이루어지면서 대대적인 박해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신자들은 이미 변절과 타협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신자들도 저 멀리 일어나는 박해의 먹구름과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몸부림치던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어느 날 묵시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계시였죠. 그래서 그는 그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구약의 묵시 및 신약의 복음에 입각하여 정교하게 기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말씀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 예고된 박해 앞에서 교회와 믿는 자들의 믿음을 흔들리지 않도록 강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묵시입니다. 묵시는 하늘과 땅과 이 세상의 종말론적인 최후를 보여줌으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목적이 이것만은 아닙니다. 당시 교회에는 다가오는 박해를 두려워하여 영적으로 타협하고 돌아서는 신자들이 많았죠. 교회는 그 안타까운 신자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양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그들을 일깨우고 돌이키려는 마음과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예언입니다. 예언은 회개와 회복과 갱신이 목적이죠.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묵시이자 동시에 예언입니다. 대개 일반적으로 묵시는 묵시이고 예언은 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 두 가지 특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려는 신자에겐 최후의 믿음을 심어주고, 믿음을 저버린 신자에겐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것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최후의 종말과 심판을 선포하는 묵시의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신앙으로 돌아오고 믿음을 회복하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시이자 예언인 요한계시록의 이와 같은 목적과 성격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요한계시록의 상황과 목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이란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지켜져야 하고 신앙은 신실해야 합니다. 믿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때와 달리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가볍게 교회를 다닙니다. 그저 복 받고 잘 되고 천국 가려고 교회 다니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뭐냐? 그것은 끝까지 지키는 것이고 끝까지 붙드는 것이다. 우리가 왜 교회를 나오는가? 그것은 우리 신앙을 지키고 이 시대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엄숙히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요한계시록이라는 말씀을 볼 때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신앙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가볍게 믿고 편하게 믿고 적당히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은 언제가 시대 속에 타협하게 됩니다. 교회를 습관처럼 다니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대한 이해가 없고, 자기 신앙이 아닌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언젠가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한편, 우리는 이 사실을 개인 차원이 아닌 한국교회 전체 차원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역사는 신실하지 못한 타협 신앙이라는 근본 문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타협한 신앙의 모습을 원죄처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신앙을 배우자마자 일제 강점기 시절을 거치게 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때 한국교회 대다수는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타협했습니다. 일부만 거기에 저항하고 순교하고 투옥되었지, 대다수 교회와 목회자와 신자들은 신사참배에 동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사에 가서 한 번 절하고 오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주일 예배시간마다 천황을 향해 절하고 기원을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신앙의 변절이자 타협이었죠.
그리고 해방 후 한국교회는 그런 타협한 목회자와 신자들에 의해 재건되고 주도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안타깝게도 계속 그런 타협과 변절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이승만 정권과 타협하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박정희 정권과 타협하고 전두환 정권에서는 전두환 정권과 타협을 하고... 그렇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과 계속 손을 잡았습니다. 교회는 잘못된 정치를 향해 제대로 쓴소리 한 번 하지 못했습니다.
정치와 권력뿐일까요? 더 큰 문제는 한국교회가 물질과 타협했다는 사실입니다. 축복을 선포하고 성공을 기원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면서, 그렇게 교회는 부와 물질과 성공을 우리 신앙의 맨 앞에 두었습니다. 한국기독교를 서울기독교 혹은 강남기독교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제대로 된 신앙을 배우기 전에 변절과 타협을 했고, 그리고 그와 같은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성장해 버렸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고 구원받고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소원을 비는 신앙에 머무르면서, 박해가 오면 변절과 타협을 하고 권력이 오면 권력을 따라가고 물질이 오면 물질을 따라갔습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신앙이 되지 못한 채, 타협과 변절은 우리 신앙의 한 성격과 한 부분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한국교회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훌륭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잘 되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복 받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실한 것이 신앙이고 끝까지 지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박해와 어려움이 눈앞에 다가오고 고난과 불이익이 불가피하더라도, 타협하지 않고 피해가지 않겠다는 곧은 마음과 생각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진정한 신앙을 생각하면서 이 요한계시록 말씀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의 어떤 비밀을 알거나 종말의 시간표를 알기 위해, 그런 잘못된 동기로 읽는 성경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이 시대의 박해와 어려움과 불이익 앞에 거룩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읽는 성경입니다.
1세기의 성도들은 이 말씀을 붙들고 그 시대의 박해와 어려움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 시대의 유혹과 어려움을 이기고 통과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은혜와 믿음이 여러분들에게 늘 있으시길 빕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