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슬픈 얼굴
마 10:24~33
2021.05.16.
제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저희 교회 학생부 전도사님 한 분이 새로 오셨는데, 제가 그분의 설교를 인상 깊게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은 나이가 좀 있으신... 30대 초반 정도 되신 전도사님이셨는데, 설교하실 때 옆길로 새는 말을 거의 안 하시고 땀을 막 닦으시면서... 매우 진지하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막 중학교 1학년이 된 저도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설교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영향인지 아무튼 저도 그런 설교를 좋아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좀 재미가 없어도 들을만한 진지한 설교를 하는 목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도 말씀드리고, 또 무엇보다 오늘 성경 말씀이 매우 진지한 설교를 할 수밖에 없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무거운 분위기는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3번이나 하신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6절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31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한 본문에 세 번이나 같은 말씀이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세 번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파송된 제자들에게 굉장히 두려운 상황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두려운 상황이 무엇인가? ... 네 그것은 바로 박해입니다. 박해는 세상으로 파송된 제자들이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일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미혹을 하고, 믿음이 강한 자는 박해를 하는 것이 사탄의 방법입니다.
제자들이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때, 그 메시지는 예루살렘의 성전당국을 거스르고 나아가 황제숭배를 도모하고 있던 로마제국을 거스르게 되죠. 예루살렘과 로마의 세상 권력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와 제자들을 싫어하고 박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 사람들도 교회와 제자들을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제자들이 그들의 죄와 거짓된 삶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파송 설교의 첫머리부터 박해를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늑대 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박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말씀을 하십니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바알세불이라고 비난한 것처럼 너희들에게도 그와 같은 비난을 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물론 그 비난은 예수님에 대한 비난보다는 조금 덜하겠죠. 제자들이 예수님이 받으신 비난만큼 비난받는다면, 그건 제자로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고 그 선생만큼만 되면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런데 이 26절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면 좀 어쩐지 이상합니다. 우리가 아는 그런 의미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시고 너희의 어려움을 다 아시고 해결해 주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은 실망스럽게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우리말 성경은 이 구절의 두 문장 사이에 있는 ‘왜냐하면’을 생략하고 있죠. 우리나라 말은 그런 접속어를 가급적 생략하는 것을 좋은 문장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왜냐하면’을 의미하는 ‘가르’라는 헬라어 단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좀 쉽게 풀어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감추인 것은 (꼭) 드러날 것이고 숨은 것은 (꼭)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네, 이것은 너희가 세상에 전하는 이 복음이 박해하는 그들로 인해서 세상에서 가려지거나 묻히거나 사라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너희를 아무리 박해하고 이 말씀을 탄압해도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은 세상에 온전히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 너희를 보호해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의 사명을 감당하고 그러다가 잡혀서 감옥에 갇히거나 또 설령 죽게 된다면 편안히 그 결박과 죽음을 맞으라는 의미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의미인 것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계속 확인됩니다. 27절은 그들의 방해와 탄압을 두려워하지 말고 전하라는 말씀이고, 28절은 그들이 너희를 죽여도 너희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29~31절의 참새 비유는 하나님이 그 작은 참새를 땅에 떨어지지 않게 보호하시듯이, 물론 너희를 지켜주시지만 무엇보다 너희 영혼을 지켜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32~33절은 너희가 그렇게 세상에서 나를 시인하고 박해 받고 죽으면, 내가 하늘에서 너희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고 인정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이 모든 말씀은 ‘너희는 세상이 너희들에게 내리는 박해와 고난과 죽음을 편안히 감내하라’는 말씀입니다. 맞으면 맞고 갇히면 갇히고 죽으면 죽고...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네, 좀 슬프죠. 세상에 파송된 제자의 숙명이란 이렇게 좀 슬픕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그리 좋을 일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소망과 기대와 안식처는 저 하늘나라의 주님 품밖에 없습니다. 저 하늘나라의 주님 품만이 우리의 고향이자 안식처이죠. 그러나 거기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험하고 슬픈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제주도의 이중섭 미술관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중섭 작가는 한국 근대 미술가로서 독보적인 분이죠. 그 미술관을 둘러보던 중 그분이 쓴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시의 한 대목이 유독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그는 6.25 피난 시절 가족과 함께 어려운 삶을 살았던 제주도 서귀포의 단칸방 벽에 그 시를 남겼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소의 말’인데, 전체는 이렇습니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그의 미술 세계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소는 그에게 이렇게 남다른 의미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과 은총이 그런 것처럼 말이죠.
아무튼 이 시 속에서 이중섭은 뛰어난 예술가로서 천재로서 누구보다 삶의 슬픔을 깊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삶의 슬픔을 느끼고 발견했다고 믿습니다. 참고로 이후 이중섭은 극심한 생활고에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게 되고, 그런데 가족과의 재회를 기대하며 마지막 혼신을 다했던 개인전과 작품 판매에 연거푸 어려움이 생기고... 그 충격과 몸의 쇠약으로 결국 병원에 입원한 그는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쓸쓸한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네, 인간의 삶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슬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죠. 슬픔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슬픈 존재이고, 인간의 그런 근본적인 모습은 지금 내가 젊고 잘 살고 모든 일이 잘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제자의 삶은 거기서 한 걸음 더 슬픔으로 나아갑니다. 그분으로 인한 고난과 박해가 있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제자들은 고난과 박해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세상 속에 자신의 짐만 지면 되는데, 우리는 자신의 짐만 아니라 그분이 맡기신 짐도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보상은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후에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 이야기도 하시게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우리를 향한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슬픈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우리는 지금 대체로 잘 살고 있고, 예수님을 자유롭게 믿고 핍박과 박해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1세기 제자들이 겪었던 그런 상황과는 너무나 많이 다르죠. 너무나 많이 다르니까 지금 우리는 이 말씀이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마태가 소중히 기록한 이 말씀을 우리가 쉽게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배워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면목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 제자의 삶의 마지막 단계이자 마지막 제단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마지막을 앞두고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
제단에 올려진 제물에 포도주나 독주를 붓는 의식... 그것은 제물이 이제 곧 불태워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도 감옥에 갇혀 곧 처형을 앞두고 있었죠. 바울은 하늘에서 받을 자신의 의의 면류관을 말하기 전에, 이 땅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이렇게 슬프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바울이나 이 땅의 기독교는 이렇게 슬픈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 속 기독교의 본연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세상 속 기독교의 본연의 모습이고, 세상 속 제자의 본연의 모습이라면, 모든 것이 찬란하고 승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금 한국 기독교는 과연 무엇일까요?
서울에 가면 유명한 큰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초동 대법원과 검찰청사 옆에는 사랑의 교회가 있고, 국회의사당 맞은편에는 순복음교회가 있고, 서울 강남 한복판에는 압구정역 오른쪽에 소망교회가 왼쪽에는 광림교회가 있습니다.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 옆에는 날아갈 듯 새로 지어진 새문안교회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은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얼굴들이죠. 다 멋지고 화려하고 승리에 찬 모습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매주 울려 퍼지는 예배와 찬양과 설교 역시 주로 승리의 모습입니다.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매주 힘찬 예배를 드립니다. 거기에 다니는 신자들의 모습도 대체로 그렇습니다. 힘 있고 여유 있고 잘 사는 신자들이 많죠.
그 교회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하고 있고, 한국의 대부분 교회들이 그 교회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한국 기독교는 서울 기독교 혹은 강남 기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 교회들의 겉모습이 크고 화려하고 멋지다고 무조건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들에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모습과 분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승리의 모습만 있고 고난과 슬픔의 모습이 어쩐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알아야 하죠. 그러나 이 땅에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 예수님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제자의 고난과 박해를 잊어선 안 됩니다. 그것을 잊으면 우리는 기독교의 슬픈 얼굴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기독교의 슬픈 얼굴을 알아야 이 땅에서 제자로서 우리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승리하고 영광스럽고 잘 되는 신앙과 삶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잘 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참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분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길이 진리의 길이고 구원의 길이니까,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잘 되려고 예수 믿으면 안 됩니다. 축복받고 성공하고 올라가고 세상의 중심에 서고... 그런 생각 속에 예수 믿는 것은 참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그 나라를 말하기 위해 세상에 파송된 제자입니다. 사람들에게 구원을 말하고, 새 삶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공평과 정의를 말하고... 우리는 그런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길을 세상이 싫어합니다. 세상의 정치와 권력이 그것을 싫어하고, 자기 죄와 자기 중심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는 그때와 같은 그런 극한 박해는 없지만, 우리 시대와 사회 속에 이런저런 불이익과 어려움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때로는 큰 어려움을 겪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권력자의 뜻을 거스리고 양심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결한 그리스도인 판사가 법복을 벗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말하는 목사와 신자가 겨우 초라한 교회를 이루고, 업계의 치부와 비리에 동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신자가 모함을 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일과 개혁적인 일에 앞장섰다가 고초를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잘 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얼마나 주님의 뜻을 잘 따랐는가... 그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제자로서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자기 믿음이 허락하는 만큼 걸어가는 것이 좋은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신실한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물론 자기 믿음이 감당할 수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억지로 할 수는 없죠. 하나님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길을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힘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 영혼이 땅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의 말씀이 가리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제자의 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땅에서 불가피하게 힘들고 초라하고 슬픈 얼굴을 하게 됩니다. 슬픈 얼굴로 고개 들어 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이 땅의 기독교입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그날에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과 눈물을 다 닦아주시고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