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일과 사람이 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면서 서로 간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가 밝혀진 후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도 기다려온 메시야이십니다. 그들이 기다려 온 메시야는 죽을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인간 이상의 왕입니다. 그들이 기다려 온 이상적인 왕, 메시야는 “기묘자”, “묘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하나님”, “평강의 왕”이어야 했습니다. 그들 눈앞에 마침내 그런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포함해서 이스라엘 군중들이 지상나라 건국을 기다리며 예수님을 스토커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려 왔던 왕, 메시야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21절 말씀의 포인트는 네 가지입니다.
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② 고난을 받으신다. ③ 죽임을 당한다. ④ 제3일에 살아난다.
베드로가 나섭니다. 22절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격앙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지상왕국”, 정치적 메시야가 다스리는 이상적인 나라의 건국자라야 합니다. 베드로를 보면서 인간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의미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반드시 올라가야 합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과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실천해야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고통스럽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히브리인들입니다. 이상적인 왕, 메시야가 오셔서 이상적인 지상왕국을 세워 로마 압제에서 벗어나고 이웃 열방들을 향하여, 다윗 왕, 솔로몬 왕 때 보다 더 영광스런 조국을 만들고 싶은 게 나쁠 수 없습니다. 악한 계교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인 베드로의 신앙으로서는 “고난 받는 메시야”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베드로의 비전과 예수님의 비전은 일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비전을 방해하는 베드로를 엄하게 꾸짖으신 후에 예수님 제자의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24절 말씀. 철저한 자기포기와 주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상당히 부담스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4절.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제 목숨을 찾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5절. 예수님의 가르침은 역설적입니다. 그러면서도 상식적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 자신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6절. 천하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노력으로 할 수 있지만, 목숨은 사람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천하만사가 다 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부귀영화가 자신의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27절. 마지막 날, 예수님 다시 오시면 영원한 생명과 멸망을 구분하실 것입니다. 마25:31-46.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분은 마지막 날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다가 주안에서 영원한 승리를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