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아리마대 요셉의 믿음과 용기

믿음찬교회 0 1,012 2022.11.13 11:49
아리마대 요셉의 믿음과 용기
막 15:42~47
2022.11.13.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소개되는 세 번째 인물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마태복음은 이 사람을 묘사하는데 제법 긴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분량을 비교해보면, 예수님을 고백한 백부장이 1절이고, 여자 제자들이 2절인데, 아리마대 요셉은 4절입니다. 수학 공식처럼 배수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태는 만약 원했다면, 아리마대 요셉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1절로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그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
그런데 마태는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 그렇게 간단히 말하지 않고,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가 어떻게 빌라도에게 요구하여 허락을 받고, 그래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장사할 수 있었는지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자세히 말한다...’ 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 사람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백부장보다 좀 더, 여자 제자들보다 좀 더... 그러면 마태복음은 왜 이 사람을 이렇게 가장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걸까요? 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초점입니다.

백부장의 고백은 너무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가 그런 고백을 했다고 해서 어떤 불이익을 받거나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여자 제자들은 너무도 신실하지만, 그러나 그들도 거기 있었다고 해서 어떤 불이익과 피해를 볼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다릅니다. 이 사람이 예수의 시신을 정중히 거두어 장사한 일은 빌라도는 물론이거니와 대제사장과 성전당국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정죄한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사실 그때부터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제 나아가 공개적으로 예수의 시신을 요구하고 그렇게 장사했다면, 그것은 예수를 죽인 성전당국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힌 일이 됩니다. 그들에 반대하고 그들과 결별하고 그들과 다른 길을 걷겠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이런 위험한 일에 뜻을 같이한 명망 있는 인물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몸에 바를 몰약과 침향을 무려 30kg이나 준비해 왔습니다. 이 양은 왕의 장례 때나 쓰일 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니고데모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고 부자이고... 그런 점에서 그는 소위 잃을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만약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이 일을 문제 삼는다면, 그는 자신의 지위와 부를 한꺼번에 다 잃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역사적 자료는 남아있지 않죠.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사정을 짐작하게 하는 외경의 한 책이 남아있습니다.
‘니고데모 복음서’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5세기경에 쓰여진 ‘빌라도 행전’에 첨부되어 있는 책입니다. 거기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겪은 이야기가 조금 나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훔친 인물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로 40년 형을 언도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감옥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성배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비둘기 한 마리가 그에게 날아와 빵을 하나씩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빵과 성배의 힘으로 감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얼마 후 지진이 일어나 감옥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니고데모 복음서’에 나온 그의 이야기입니다. 이후 그의 행적은 떠도는 전설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전설은 그가 처음에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 쓰인 성배로 십자가의 예수님의 피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그 성배를 가지고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내용은 전설에 불과합니다. 성배라는 흥미로운 유물과 아리마대 요셉을 연결한 내용들이죠. 이런 성경 밖 전설을 우리가 믿거나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전설적인 내용들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둔 직접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배경으로 이런 전설들이 나오게 된 것이죠. 그래서 좀 전의 외경의 이야기도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외경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을 순 없지만, 그런 외경의 이야기가 나온 배경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마도 분명한 것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둔 댓가로 어려움이나 고초를 겪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감옥에 갇히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신의 지위나 부를 잃고 예루살렘을 떠나거나 혹은 떠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둔 행동은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부를 건 행동입니다.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의 시신을 요구한 것부터가 관례를 벗어난 위험한 일입니다.
빌라도가 어떤 인물입니까? 굉장히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죠. 이유 없이 선의나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십자가형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시신조차 비참하게 훼손되고 버려지는 죽음입니다. 그것이 십자가형의 일반적인 사후 관례이고 유대 지도자들도 그걸 원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죄수를 그렇게 고이 장사 되도록 내어주는 것은 관례도 아니고, 사형을 허락한 자신에게도 누가 되고, 무엇보다 유대 정치종교지도자들과 갈등 요인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예수의 시신을 내어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이런 모든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과감히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마가복음이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여기서 ‘당돌히’라는 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것은 권력과 힘을 가진 높은 사람에게 그보다 작은 사람이 용기를 발휘하는 모습입니다. 자기 안에 분명한 생각과 뜻을 품고 말이죠.
그래서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빌라도 총독이었지만, 아리마대 요셉의 그 뭔지 모를 강하고 분명한 태도에 밀려, 그는 예수의 시신을 내어주게 됩니다.
물론 아리마대 요셉에게 빌라도보다 더 큰 문제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이죠. 그가 예수님을 정중히 장례한 일을 그들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아리마대 요셉은 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이런 위험한 일을 굳이 했을까요? 단지 정말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서였을까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네,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리마대 요셉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도 예수의 제자라” 이 내용을 요한복음은 좀 더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제자였습니다. 비록 산헤드린 공회원이고 부자이고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니고데모처럼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 그것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많은 갈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결국 불의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게 되었죠.
이때 니고데모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계속 숨기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론 가장 좋은 방법이죠. 자신의 삶과 지위와 재산에 아무런 피해가 생기지 않는 안전하고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둘째는 그렇게 가슴 아프게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시신을 모실 묘지를 그렇게 미리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상당한 부자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를 통틀어 가족 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이것을 선택한다면, 이것은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고, 자신은 그 결과를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두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네, 그것은 그의 믿음의 결단이죠. 그것은 그가 이전에 자신의 믿음을 숨겼던 것에 대한 반성과 회개이기도 하고, 나아가 그것은 그가 이제부터는 예수의 제자로 살겠다는 믿음과 결단이기도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이렇게 대제사장과 성전당국과 산헤드린 공회와 결별하고, 자신을  예수의 제자로 공개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바울의 로마서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씀은 단지 ‘믿습니다’라고 혼자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이 말씀을 초신자에게 말하면서, ‘예수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받고 천국간다’라고 그렇게 구원론을 가르치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믿음을 당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시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기로 밝히는 것이고, 그래서 그 사람이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사람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 요셉은 이 사도바울의 말씀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그 적대적인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믿음을 시인하여,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 하나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네, 최고의 믿음이고 최고의 결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 인물로서의 아리마대 요셉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를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한 인물로 단순히 기억할 것이 아닙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정말 중요한 인물입니다. 사복음서가 다 말씀하는 아리마대 요셉은 영적으로 우리 신앙의 종착역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여러분, 불행하게도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신앙의 마지막 모습을 보시고 말았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하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고백이야 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신앙은 그때부터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좋을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감사하며 계속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설령 그 자리가 마지막 자리라고 해도 그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서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신앙은 거기서도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마지막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결단의 자리입니다. 그런 순간이 왔을 때, 그런 시간이 왔을 때, 기꺼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의 완성이 믿음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을 고백하고 적당히 따를 수 있죠. 복 받고 잘 되고 은혜받으면서, 예수님을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마지막 시험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 한 분과 바꾸는 그런 절대적인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영적인 자리에 이르고 그런 영적인 시간을 통과해야, 우리는 그분의 진정한 제자가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원리가 그렇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이런 영적인 강을 이미 건너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을 통해 이와 같은 우리 신앙의 마지막 단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을 통해 그와 같은 우리 신앙의 결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의 선택과 결단 속에 참된 믿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함석헌 선생의 일화 가운데 그분이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때 함석헌 선생은 3학년 19살이었는데, 사촌 형의 부탁을 받고 평양고보 학교 대표로 3.1운동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모으고 3.1운동 전날 독립선언서 뭉치를 받아오고 밤새 하숙집에서 태극기를 그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다음날 드디어 3.1운동이 일어나고, 함석헌 선생은 거리에서 목청껏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후 그는 며칠 동안 하숙집에 숨어있다가 어수선한 시국에 결국 잠시 고향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몇 달 지냈는데, 부모님이 학교에 다시 가라고 권하고 또 친구들도 하나둘 학교에 다시 간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그래서 함석헌 선생도 평양으로 다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에 다시 갈려면,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반성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고백을 다짐해야 갈 수 있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학교 앞에까지 갔다가 도저히 양심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근 2년을 허송세월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함석헌 선생은 자신의 속이 말이 아닐 정도로 문드러졌다고 자신의 책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잠시 눈을 질끈 감고 말만 하면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는데, 그러면 곧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계속 갈 수 있는데, 그걸 못해서 길이 갑자기 막혀버린 것이죠. 그분은 그렇게 그때부터 하나님의 발길에 채이며 굴곡진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때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결정하셨을까요?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양심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렵습니다.
돌아보면, 안타깝지만 한국교회는 비겁한 길을 걸어온 일이 많습니다. 제가 나중에 한번 기회가 되면, 한국교회의 역사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국교회는 민주화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는 불의에 항거한 시국기도회 같은 운동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한국교회가 일제강점기 시절 출옥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배제한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신앙이 많이 훼손된 채 한국교회는 성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함석헌 선생의 일화와 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불이익을 선택하며 믿음의 결단을 행한 일이 많지 않고, 그래서 또 그런 일을 무척 생소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있는 제대로 된 신앙을 찾는다면, 우리는 한국교회를 감싸고 있는 이와 같은 잘못된 틀을 깨닫고 꼭 벗어나야 합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학생 시절 민주화 시위를 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시위 주동자들에게 징역 2년형 정도 선고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그것이 정부의 방침이었고, 판사들도 거기에 따라 판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각오를 하고 재판정에 섰는데, 그런데 당시 담당했던 판사가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합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책에서 아마도 그 판사는 그 일로 판사직을 그만두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런 훌륭한 판사들도 있죠.
그러나 이에 비해 요즘 어떤 판사들은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범죄자에게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선고하고 딱 옷을 벗는 것이죠. 자신의 퇴임 시기에 눈을 한번 감고 그렇게 판결하고 큰 보상을 받고 퇴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펌에 가서 또 돈을 법니다. 서울에 있는 큰 교회에는 그런 판사, 변호사, 기업인, 고위공무원... 많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판사가 교회를 다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요? 구원의 길을 위해 희생을 하고 불이익을 선택해도 모자를 판에, 불의와 타협을 하고 돈을 선택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께 갈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그런 분은 그 일을 회개할 마음이 없다면 교회를 다닐 필요 없이, 자신의 삶을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자기 제자로 생각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정의를 위해 바른 길을 결단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직 신앙의 마지막 자리까지 가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직 그 정도까지 되지 못하여서, 두렵고 갈등하고 잠시 부인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신앙의 마지막 자리라는 사실을 알고 그 자리까지 가기를 애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그것을 잘 할 수 없죠.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늘 도우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런 바른 길을 선택하라고 능력을 주시죠.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 한 분과 바꾸는 결단을 하고, 온전한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어려운 세상 속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우리 주님과 우리 하나님을 위해, 믿음의 결단을 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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