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이 시대의 예언자

믿음찬교회 0 91 2022.10.31 14:56
이 시대의 예언자
계 19:10
2022.10.28.

우리는 이 시대의 예언자라는 사실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 될 수 있을까요? 1세기에는 만연한 황제숭배와 우상숭배 속에,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주로 증언하고 고백하는 것이 곧 예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네, 그 방법은 동일합니다. 비록 오늘날에 황제숭배는 없지만, 우리 가운데 돈과 우상과 거짓은 그때와 같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을 신으로 섬기고 권력과 성공을 우상처럼 섬기는 이 어두운 세상을 향해, 진정한 신은 주님이라고 말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사람을 하나님보다 높이 두는 이 무신론적인 세상을 향해,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과 사회와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깨우치고 권면하고 경고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예언자로서의 모습입니다.
 
예언자는 본래 하나님 말씀과 계시를 통해 역사와 현실을 초월하여 멀리 보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예언자들은 멀리 보는 사람들입니다.
대체로 사람은 근시안적이고 자기 시대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멀리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금 좋으면 쉽게 교만해지고, 조금 안 좋으면 쉽게 좌절하는 악순환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교만과 좌절을 반복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향해,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위로할 것은 위로하면서 자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언자입니다.
예언자의 사명은 또한 시대를 보는 것이죠. 이 시대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인지를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시대에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시대를 평가하고 비판하고 어떤 문제 속에 있는지를 말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통해 만들어진 영적인 눈을 가지고 그 일을 행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받아 그렇게 했고, 신약의 예언자들은 성경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 그 일을 행합니다. 이와 같은 구약과 신약의 계시 및 예언 활동은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그와 같은 예언자 직분을 잘 감당치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인식과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신자들은 신자대로... 교회의 관심은 교회의 성장에 있고 성도들의 관심은 개인 구원과 축복에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는 예언과 예언자를 구약 의미로만 이해하고, 목회자들도 예언하지 않고 성도들도 예언할 줄 모릅니다. 한편 이런 와중에 일부 교회와 신자들은 말씀에 바탕을 두지 않는, 비성경적인 예언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고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목회자들만 성경을 보고 예언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여 자신의 믿음과 능력 안에서 예언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바르게 이해하여, 교회와 세상 속에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판단할 것이 있으면 판단을 하고 비판할 것이 있으면 비판을 하고, 사람을 위로할 것이 있으면 위로를 하고 권면할 것이 있으면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그와 같은 우리의 예언 사역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공동체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나 혼자 말씀을 깨우치고 감동을 받아 개인적으로 그런 예언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받고 나누고 깨우쳐 그렇게 함께 예언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비롯하여 여러 성경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죠. 그래서 신약의 예언과 예언자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깨어있는 예언자 집단이 되고, 교회와 신자들은 세상을 밝히고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이 눈을 뜨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직접적인 전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도는 이와 같이 빛을 비추는 사명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일부 교회들은 전도는 하지만 빛을 비추지는 못하는 모순에 빠져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고 예언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역은 우리가 교회이고 신자라고 저절로 그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고 나 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깨어있는 예언자가 될 때, 가능합니다.
오래전 제가 학생 시절 설교 시간에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한말 나라가 약하고 어지러울 때, 그때 우리나라는 느슨해진 중앙정부로 인해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무척 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리들이 임명을 받을 때 다른 지방은 선호하지만, 유독 평양은 선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평양엔 기독교 선교사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실정을 묵인하지 않고 계속 항의하고 고발하고 귀찮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좋은 평양 감사 자리를 다들 마다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네, 당시 평양은 실제로 그랬죠.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었고 주일에는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사람들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교회 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주일날은 시장도 거의 서질 않았다고 합니다.
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깨어있고 영향력 있는 모습을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대부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세상을 향해 예언을 한다든지, 세상 속에 예언자로서 존재한다든지 하는 인식조차 부족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설교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설교에는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목양적 설교이고 다른 하나는 예언적 설교입니다. 목양적 설교는 이를테면 어머니 같은 설교로, 위로하고 권면하고 안아주는 설교입니다. 이에 비해 예언적 설교는 아버지 같은 설교로, 깨우치게 하고 눈을 뜨게 하고 일어서게 하고 나아가게 하는 설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대부분의 설교는 예언적 설교보다는 목양적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쩌면 목양적 설교라고 할 수도 없는, 그저 달콤한 설탕물 같은 설교가 많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들은 예언을 거의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적 설교와 가르침을 잃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신자들을 예언자로 육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그저 순종하는 양으로 만들려고 할 뿐, 하나님 말씀으로 눈이 빛나는 사자 같은 예언자를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으로 눈이 빛나는 담대한 예언자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네, 그것은 신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알 때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와 관련 종교개혁가 쯔빙글리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종교개혁가 쯔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신부로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몇 명의 청년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쯔빙글리의 지도 아래 헬라어 성경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한 3년 정도 공부했는데, 그때 쯔빙글리는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쯔빙글리와 함께 성경 공부한 그 청년들이 놀랍게도 스승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노선에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은 쯔빙글리의 개혁이 미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스승 쯔빙글리가 가톨릭교회의 유아 세례 및 국가교회 체제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아 세례가 아닌 신자의 세례가 성경적으로 올바르고, 그래서 교회는 그런 자발적인 신자들로 이루어진 자유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그 청년들은 쯔빙글리보다 더 근본적인 종교개혁 노선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에서도 박해를 받고 종교개혁가들에게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할 수 없었고, 어느날 서로에게 침례를 주고 오늘날과 같은 자유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바로 재침례교도들입니다. 재침례교도에 대한 일부 오해가 있고, 또 그들은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빈과 쯔빙글리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실제로 그들은 더 근본적인 종교개혁의 길을 걸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그런데 그 출발점이 바로 제대로 된 성경공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개혁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도 예언자적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눈이 빛나는 참된 예언자를 만들고 새 역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늘 바르게 알아가야 합니다. 은혜 위주의 달콤한 말씀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이해 위주의 깊이 있는 말씀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가 이 시대를 향해 예언하는 교회가 되고, 귀한 예언자들을 길러내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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