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예수님을 고백한 백부장

믿음찬교회 0 346 2022.10.30 11:50
예수님을 고백한 백부장
마 27:50~54
2022.10.30.

가상칠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을 의미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가상칠언 가운데 하나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래서 오늘 본문 50절에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크게 외치신 말씀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보면 그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좀 더 풍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네, 그래서 우리는 마태가 생략하고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그 두 말씀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51절은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성소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말씀하고, 52절과 53절은 마태복음만 특별하게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52절과 53절은 우리말 번역을 조금 바로잡아야 하는데, 53절에 있는 ‘예수의 부활 후에’ 라는 말을 52절 앞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 후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네, 이 특별한 내용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런 사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다른 기록이나 증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은 묵시로 해석됩니다.
묵시로 해석되는 이유는 예수님 당시 시대가 다니엘서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묵시의 시대였고, 그리고 이 말씀 안에 묵시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약교회의 성도가 지금 잠들어 있을 수 없고,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 내용이 묵시임을 말해줍니다.
묵시는 무엇인가? 네, 묵시라는 것은 지금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묵시는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최후의 일을 지금 말함으로, 지금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이자 신호탄이고, 그 부활은 그날에 우리 모두의 부활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지금 예수님의 죽음과 곧 있을 부활을 말하면서, 자신의 시선을 멀리 마지막 그날로 돌려 성도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미래의 우리의 부활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우리가 이 내용을 그렇게 묵시적으로 이해할 줄 믿고,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54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백부장과 군병들의 반응과 고백을 말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에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특별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백부장과 군병들의 이와 같은 고백은 여러모로 특별하죠. 그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침 뱉고 조롱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그들은 예수님을 못 박은 후에도 그 밑에서 제비 뽑아 옷을 나누고,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오해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놀랍게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이 고백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이방인의 입장에서 그분을 고백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백은 중요하고 의미가 깊습니다. 모두가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부인하고 의심하고 조롱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보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기서도 동일하게 잠시 우리의 진행을 멈추고, 이 고백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가? ...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볼 수 있었는가? ...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발견하는 사람은 적은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이런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는 모두 이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복음서의 이 내용은 서로 몇 가지 작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 고백의 주체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이 고백의 주체를 백부장 한 사람으로 말합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누가복음도 이 고백의 주체를 백부장 한 사람으로 말합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 고백의 주체를 백부장과 거기 있던 군병들이라고 복수로 말합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렇게 마가와 누가는 이 고백을 백부장 한 사람으로 말하고, 마태는 백부장과 군병들이라고 복수로 말합니다.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상황이 백부장과 군병들이 모두 고백했지만 백부장이 주도적으로 고백했을 수 있죠. 그래서 마태는 그들 모두가 고백했다고 기록하고, 그래서 마가와 누가는 백부장 한 사람이 고백했다고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 복음서는 다 사실에 부합하게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이 백부장 한 사람이 고백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와 누가는 백부장 한 사람이 고백했다고 그대로 기록하였는데, 그런데 마태는 어떤 이유로 그것을 백부장과 군병들 모두가 고백했다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가능성을 더 높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백부장 한 사람의 고백을 복수의 사람들의 고백으로 바꾸었을까요? 학자들은 그 이유를 마태가 유대인들과 구약 율법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은 한 사람의 증언을 증언으로서 인정하지 않죠. 증언이 인정되려면, 두 사람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마태가 이것을 고려해서, 그 고백을 복수의 고백으로 변경한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저도 이 설명이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일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경의 부정확성이나 진술 오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에 일어난 후기 사건이죠.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것을 복음서 맨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의 복음서 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사실에 바탕을 두되 사실을 넘어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작은 사실을 얻고 큰 의미를 놓치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고백이 특별히 백부장 한 사람의 고백이었다고 믿습니다. 다른 군병들도 그때 거기 있었고 두려움과 특별한 경험을 했지만, 이 고백은 정확히 백부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백은 집단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그런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고백이 어떻게 유독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거기 아직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군병들도 있고 구경하던 무리도 있고 대제사장의 사람들도 있고 멀리서 바라보는 여인들도 있고... 그런데 오직 이 백부장 한 사람만이 운명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와 같이 고백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이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거기 있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어느 틈엔가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군병들은 으레히 하던 대로 죄수의 옷을 나누어 가지고, 질 낮은 포도주를 마시며 잡담을 했지만, 이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이 백부장의 남다른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충분히 그런 분이셨죠. 십자가 처형을 받는 어느 죄수와 다르게, 죄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갖은 모욕과 조롱과 구타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정오부터 어둠이 깔리고 무겁고 슬픈 기운이 골고다 언덕에 임할 때, 이 백부장은 그런 영적인 기운을 더욱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무리 역사하셔도 영적으로 닫힌 사람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어둠이 깔리고 예수님의 외침이 들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도, 영적으로 닫힌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느끼지 못합니다. 이상하고 무섭고 두려워도 그 감정을 느끼기만 할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을 처음 볼 때부터 빌라도처럼 이 사람에겐 죄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부당한 십자가형을 받고 모욕과 조롱을 당해도, 오직 침묵하시는 모습에 웬지 눈길이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뭔지 모를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날 때 이 백부장의 마음은 심히 요동쳤을 것입니다.
네, 그 결과가 바로 그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이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에 나온 순간적인 고백이 아니라, 적어도 그날 아침부터 일어난 모든 일과 경험의 총체적인 산물입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 백부장을 선택하시고 역사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그분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 그의 마음을 여시고 깊이 느끼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고백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지 온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백부장의 고백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이 백부장을 선택하시고 역사하셨을까요?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이고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일까요?
우리는 이따금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무조건적인 선택이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네, 칼빈이 말한 신학 용어이죠. 칼빈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무조건적인 선택을 강조한 분입니다. 칼빈의 그와 같은 구원론은 많은 유익을 주지만, 그러나 그 모든 내용을 절대적인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고 인간의 반응과 순종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라는 말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과 행하심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택하시거나 사용하실 때, 사람을 전혀 보지 않고 마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구슬을 선택하시듯 임의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말씀이 로마서 9:11~13 말씀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데 사도바울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가시는 큰 사건을 말하는 것이지, 야곱과 에서 두 사람 개인 구원에 있어서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배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 그들이 아직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에 그들의 행위와 무관하게 야곱을 선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 야곱을 선택하셨다는 말씀이지, 야곱의 개인적인 최종 구원이나 에서의 개인적인 최종 구원을 그들의 행위와 무관하게 사전에 결정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2:6~8절 말씀과 같이,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구원을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보응하시고,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부르실 때에도 아브라함을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라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지 그 자질을 보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도 모세를 보셨습니다.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 그 됨됨이를 보셨습니다.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사무엘을 보셨습니다. 성소에서 수발을 들고 잠을 자던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지나가다가 베드로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이미 세례 요한의 개혁적인 메시지를 듣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 나다나엘은 거기서 이사야 선지자처럼 기도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에도 사도 바울을 보셨습니다. 바울은 유대와 헬라의 두 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지식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많은 역사는 무조건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이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쪼이는 일광같이 가을 더위의 운무같이, 그렇게 따갑고 조용히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백부장을 보셨습니다. 그의 마음을 보시고 그의 영적인 자질을 보셨습니다. 그는 오랜 군인 생활을 하고 빌라도 총독 밑에서 백부장 일을 하고 있지만, 그의 내면은 거칠어지지 않고 정치적으로 변질되지 않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그의 고백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귀한 일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떨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보고 고백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일까요?
네, 우리는 그런 영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런 영적인 자질을 가져야,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신이 없는 매우 어두운 시대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과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은 신이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을 살면 그만입니다. 짧은 인생 후에 죽음이 오고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제비 뽑아 옷을 나누고 포도주를 마시던 군병들과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인 이 백부장은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영적인 내면이 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영적인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계속 발견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데마와 같이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가는 사람이 됩니다.
악이 득세하는 현실에서, 정치와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하나님이 없다’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믿음을 잃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믿기 위해선 우리 안에 영적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현실에 어두워지지 않는 마음,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인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제 이태원에서 큰 불행한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할로윈을 앞두고 그 좁은 거리에 10만명이 몰렸다고 합니다. 제가 영상으로 이태원의 거리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거기에 사람들이 모였을까요? 저는 그것이 어쩐지 하나님이 없는 시대에, 사람이 하나님 대신 무언가를 찾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 영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모두 다 이와 같은 영적인 내면을 소유한 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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