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한 달란트 받은 종

믿음찬교회 0 197 2022.06.29 16:23
한 달란트 받은 종
마 25:24~30
2022.06.26.

우리는 예수님의 3개의 종말론 비유를 다 들었습니다. 다 듣고 나신 여러분의 소감은 어떻습니까?
세상엔 많은 잘못된 종말론이 있습니다. 그런 종말론은 우리를 힘들고 불안하게 합니다. 삶과 일상을 희생시키고 무언가를 해야 하고 누군가를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말 자체는 두렵고 힘들지만, 예수님의 종말론과 종말을 대비하는 방법은 힘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달란트를 남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잘못된 종말론에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이 어두운 때를 잘 헤쳐나가시길 바랍니다. 

지난주 달란트 비유를 전체적으로 살펴보았기 때문에, 오늘은 다음 본문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달란트 비유를 잘 살펴보면, 한 가지 메시지가 더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달란트를 남겨야 한다는 전체적인 메시지 외에 한 가지 메시지를 더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종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잠깐 나옵니다. 그 종들과 주인의 대화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얼마를 남겼다고 보고하고, 주인은 두 사람을 동일하게 칭찬하고 끝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매우 길게 나옵니다. 주인과 나누는 대화가 깁니다. 그는 주인에게 여러 변명을 하고, 주인은 그것에 대해 책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달란트를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이 비유는 이와 같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마지막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이 비유는 한 달란트 받은 종에 대한 내용이 큰 분량을 차지합니다. 대략 반 정도의 분량이 이 종에게 할애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 예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달란트 비유는 전체적으로 2개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메시지로서 달란트를 남겨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정적인 메시지로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길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이 사람의 특징적인 모습 2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이 사람은 주인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내용을 우리는 24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내가 알았으므로 ...”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주인을 잘 안다고 말하는 이것은 자신의 실제 경험일까요?, 혹은 자신의 혼자 생각일까요?, 아니면 자기 변명의 거짓말일까요? 이 비유는 그것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그 종의 말대로 나쁜 사람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주인을 자기 자신 또는 하나님으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종이 주인을 잘못 아는 이유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평소 주인을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그는 변명하기 위해 주인을 일부러 나쁘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일까요? 주인이 이 종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변명하기 위해 주인을 그렇게 나쁘게 왜곡하는 것이죠. 그러나 넓게 보면 평소 주인을 잘못 알고 있는 것과 잘 모르는 것도 악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종은 평소 주인을 잘못 알고 있고 잘 모르고 또 지금 변명하기 위해 거짓말하고 왜곡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사람의 이와 같은 악한 모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인을 잘못 알고 있는 종, 주인을 잘 모르는 종, 주인을 왜곡하는 종... 우리는 이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렇게 오해하거나, 잘 모르거나, 왜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끔 저희 집 마당을 보면, 개미들이 줄지어 이동하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그 개미들을 보면서 개미와 나 사이의 엄청난 격차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도 하나님이 보실 때 저 개미와 같겠지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죠. 마치 개미가 인간을 다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 할 수도 있고 잘못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른 신과 다르게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알리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계시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계시하신 만큼 하나님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만 그 계시에 주목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계속 잘못 알거나, 크게 잘못 알거나, 나아가 내 목적과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성이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이해하거나 규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상도 만들고 우상의 하나님도 만들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시내산 앞에서 모세의 부재 속에 아론에게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한 신을 만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백성들을 두려워한 아론은 만들게 되죠. 아론은 애굽의 신 아피스를 닮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그 신을 열광적으로 예배하고 찬양했죠.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다가 그 참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잘못 알거나 왜곡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성경 말씀과 교회 생활과 개인 신앙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여러분이 주로 생각하는 하나님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야... 하나님은 승리의 하나님이야...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야...
예전에 저와 같이 사역했던 한 전도사님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능력과 은사의 하나님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은사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은 그분에겐 문제가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축복의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우리 신앙은 점점 축복과 승리와 성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에서 가난하고 힘든 분들은 점점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정론의 하나님,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함부로 사는 사람이 되고, 또 그런 쉬운 하나님께 함부로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과연 그런 하나님을 믿으며 그렇게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쉽게 산 사람이 아니라 어렵게 산 사람이고, 수고와 헌신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 크시고 넓으시고 깊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생각에 빠지거나 우리 생각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비록 우리는 우리 믿음의 모습과 분량대로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감히 함부로 생각하거나 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쉬운 하나님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잘 모르시는 하나님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필요할 때 가끔 찾아도 되는 하나님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그래도 되는 하나님이라 생각하십니까?
오래 전에 저는 처음 ccc 간사가 되어 단기선교를 가면서, 그때 하나님께 필요한 재정 반만 채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제가 반만 채워달라고 기도했을까요? 그때가 IMF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 속에 또 다른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 채워주실까 하는 불신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직장 생활해서 모은 제 돈을 의지하는 교만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불신과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반만 채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저의 생각을 모르셨을까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출발 전 마지막 주일 저녁 목사님이 따로 부르시더니 봉투를 주셨습니다. “이 선생, 단기선교 가지요? 재정에 보태세요..” 봉투를 받고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마... 네, 하나님은 보란 듯이 필요한 금액을 다 채워주셨습니다. 저는 그날 가슴이 서늘하고, 하나님을 함부로 내 마음대로 생각한 것을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잘 안다는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사무엘도, 다윗도, 하나님을 한 번에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가운데 늘 새롭게 그분을 발견했습니다.
성경 전체로 말하면, 하나님은 처음에 구원의 하나님이시고, 그 다음엔 만군의 하나님이시고, 그 다음엔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그 다음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고, 마지막으로는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작은 생각이나 작은 경험을 넘어 하나님을 깊고 넓게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왜 이렇게 알아가야 할까요?
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께 참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순종이 안 되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우상을 만들고 우상의 하나님을 만듭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알면 우리는 그분 앞에 경배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교훈 받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폭넓게 알아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귀하게 순종하는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이 사람은 주인과의 관계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25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이 사람의 이 말의 의미와 배경이 무엇일까요? “그대로 돌려주었으니 당신은 손해 본 것이 없고 나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네, 말 자체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이 할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을 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당신을 주인이라고 섬기고 그래서 지금 여기 있지만, 그러나 나는 당신의 종도 아니고 그래서 당신의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주인과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이런 종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종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아무런 책임과 의무가 없는 사람,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삶을 사는데 집중하는 사람... 네, 그런 사람이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이렇게 한 달란트 받은 종 같은 신자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이고, 나는 내 삶을 산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살아서 그것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즉 한 마디로 이 사람은 무익한 종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 중에 이 단어를 사용하시는 분들이 계시죠. 주님의 무익한 종 아무개... 물론 그것은 누가복음 말씀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 말씀에서 온 것이죠. 그러나 적어도 마태복음에서의 무익한 종은 우리가 결코 사용하지 말아야 할 표현입니다.
그것은 이 종이 결국 무익한 종으로 판명되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겸양의 표현으로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 말할 수는 있겠지만, 진짜 무익한 종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내쫓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유익한 종인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좋은 종으로 여기실까?’ 그런 묵상을 한 번 해보아야 합니다. 은혜만 받고 기도 응답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있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래 전 저는 하나님 앞에서 훈장처럼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는 일을 하나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나고 자란 교회가 큰 분란에 휩싸였습니다. 교회가 목사님 편과 장로님 편으로 갈라졌습니다. 중립을 지키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안타깝게도 장로님들이 힘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때가 되면 교회가 목사님을 교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목사님이 사역을 잘 하시고 말씀도 잘 전하시고... 점점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님들이 이제 목사님을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에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교회에 돌았습니다. 실체가 없는 소문이었지만, 교회는 분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편은 사람이 얼마 안 되고, 장로님 편에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그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목사님에게 문제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편에 서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장로님들이 젊은 교인들을 동원해서 교회 문을 지키고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러 오는 목사님을 막았습니다.
큰 소리가 나고 몸싸움이 벌어졌죠. 그때 제가 청년이었는데, 그 현장에서 한 젊은 집사님에게 멱살을 잡혔습니다. 며칠 전 우리 집에 전화한 그 집사님이었습니다. 제가 그 집사님의 눈을 보게 되었는데, 거친 모습과 반대로 매우 흔들리는 눈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화가 나기보다는, 도대체 이분이 왜 이런 일에 앞장서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국 경찰이 오고 온 동네 사람이 구경하고 목사님은 교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목사님은 재판이 열리는 1년 동안 목사님 댁에서 예배를 드렸고, 저와 어머니는 그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한 열 몇 분 정도 거기서 예배드렸던 것 같습니다. 1년 후 법원은 목사님을 막은 측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고, 최종 화해를 하지 않으면 선고를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제 잘잘못이 가려졌으니 되었다고 하시고 고소를 취하하시고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던 우리도 각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권사님이 못 되셨죠. 늘 그것을 아쉬워하셨습니다. 이후 그 목사님은 중국에 선교사로 가셔서 많이 고생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가끔 생각할 때마다, 그때 어려웠던 그 목사님 편에 제가 섰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를 기뻐하시고, 제가 여러모로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여러분들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또 교회 밖에서 하나님의 유익한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렇게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우리는 이 사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무익한 종으로 열매가 없고 기름이 없고 가라지가 된 사람입니다. 주님의 종이 되었지만, 진정한 주님의 종이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 교회 성도님들은 주님의 칭찬을 받는 종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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