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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책, 구원의 확신, 예정론 (2)

믿음찬교회 0 327 2022.06.21 12:15
생명책, 구원의 확신, 예정론 (2)
계 13:8, 21:27 엡 1:4~5
2022.06.17.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한계시록의 생명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 생명책은 어려운 시대에 신자들을 붙들어준 구원의 확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그와 같은 강한 구원의 확신이 왜 필요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때에 구원의 확신으로 생명책과 하나님의 인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예정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신자들은 예정론이란 가르침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예정하셨다...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 구원을 빼앗을 자가 없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다’ 우리는 그렇게 배우고 있습니다.

예정론과 관련한 대표적인 말씀이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 이 긴 문장의 3개의 동사는 이런 순서대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이 순서대로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셔서,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원어대로 정확히 번역하면 이 3개의 동사는 세 번째 동사로부터 거슬러 번역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선택하셨다는 동사가 본동사이고 나머지 두 동사는 이 본동사를 꾸며주는 분사형 동사이고 또 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이 되도록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셔서 아들이 되었다’가 아니라, ‘아들이 되도록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입니다.

그러면 아들이 되도록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는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예정하신 것이고, 우리를 개인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선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을 이해할 때 하나님이 나를 창세 전에 선택하셨고 또 나의 구원을 미리 예정하셨다고 알고 있죠. 우리의 구원은 이미 선택되었고 미리 예정되었다는 그런 구원론, 그런 선택론, 그런 예정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잘 살펴보면,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아니라 공동체를 선택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예정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의 길을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우리의 구원을 신실히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의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길을 예정하시고 신실히 그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 나의 구원이 과거에 이미 결정되었고, 또 미리 예정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만 중요한 이런 구원론은 오래전 성경 이해가 부족한 시절에 만들어진 고전적인 구원론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성경해석과 이해를 통해 만들어진 올바른 구원론은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길을 예정하셨고, 또 우리가 그 구원의 길을 걸어가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 선하신 뜻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하고, 그러면 마침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올바른 구원론은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하나님의 인과 어린 양의 생명책을 통해 믿는 자들의 구원 예정과 확신을 강하게 말씀하는 것을 혹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올바른 구원론이 이와 같다면, 그렇다면 올바른 구원의 확신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미 기록되어 있고 나는 하나님의 인을 이미 받았다 라는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면, 우리는 올바른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의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 참된 의지가 내 안에 있다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비록 우리가 미숙하고 서툴러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과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런 마음과 의지가 있으면 비록 서툴고 부족해도 우리에겐 삶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것은 어떤 기독교적 실천을 가끔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포괄적인 기독교적 삶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 속에 사랑과 빛과 선함과 감사가 자랍니다. 죄와 어둠과 거짓과 불법은 점점 사라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삶의 열매를 보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의 확신은 교리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신학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영접 기도로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그래서 영접기도 한 번 한 것 가지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대속교리를 가지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칼빈주의 예정론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마음과 삶의 열매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진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사랑과 긍휼로 신실히 인도하신다’ 네, 이것이 성경적인 구원의 진리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인치시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하셨다고 말씀하고, 이것을 로마서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씀하고,
이것을 에베소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달라도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신실히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을 가지시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와 마음이 있는 한 염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때론 우리가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약하고 두려워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정죄의 눈빛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 주님의 눈빛에 마음이 찔려 나가서 울 때 예수님의 마음도 아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과 의지와 노력하는 실천과 그런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 놓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아무쪼록 늘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고 구원을 이루어 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여러분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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