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

믿음찬교회 0 303 2022.05.17 19:11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
계13:1~18
2022.05.13.

오늘 성경 본문에는 세 악의 화신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과 두 짐승입니다.  첫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고 둘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옵니다.
이 세 악의 화신을 악의 삼위일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용과 짐승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늘 모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들의 그렇게 ‘하나님을 따라하고 모방하는 거짓된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악의 삼위일체는 각각 그 정체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정체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용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신화적인 배경에서 볼 때 바다는 용의 거처이고 악의 근원적인 장소입니다. 사탄은 그곳에서 자신의 하수인인 첫째 짐승을 내보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첫째 짐승에 대해 설명합니다.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고, 그리고 뿔 위에는 열 왕관이 있고 머리 위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네, 이것은 용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모습입니다.
또 이 첫째 짐승은 표범과 곰과 사자의 모습을 한 데 섞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짐승의 모습은 다니엘서 7장의 네 짐승으로부터 왔습니다. 다니엘서의 네 짐승은 네 나라를 상징하는데, 바벨론과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제국입니다. 다니엘서는 그 네 나라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이와 같은 다니엘서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이 첫째 짐승의 정체는 사탄의 사주를 받는 세상 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른바 사탄적 국가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역사하는 것처럼 사탄은 그런 나라를 통해 이 땅에 역사합니다. 1세기 당시에 그 나라는 로마제국이었습니다. 사탄은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로마제국에게 주었습니다. 그런 영적인 힘 속에서 로마는 국가적인 우상숭배 및 황제숭배를 실시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3절은 이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살아났다고 말씀합니다.
대체로 짐승의 머리는 그 국가의 최고 지도자나 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 왕 하나가 거의 죽게 되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14절을 보면, 그 짐승의 머리가 상한 것은 어떤 병이나 다른 이유가 아니라 칼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칼에 의해 그 짐승의 머리가 치명상을 입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내용은 무슨 의미일까요?
네, 이 의미는 우리가 ‘칼에 의한 짐승의 머리의 상처’라는 이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 짐작이 가능합니다.
첫째, 상처 또는 재앙을 의미하는 이 헬라어 ‘플레게’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이 가하시는 징벌이란 의미로 11번이 사용된 단어입니다.
둘째, 여기서 칼이란 헬라어는 ‘마카이라’인데, 이것은 실제 무기를 뜻하는 ‘롬파이아’와 달리 권세를 뜻하는 비유적 의미의 칼입니다.
셋째, 머리에 가해진 치명적인 상처라는 내용은 명백히 한 구약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그것은 매우 유명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창세기 3:1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의 내용을 고려하면 그 짐승의 머리 하나가 칼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이 내용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으로 입은 치명적인 상처입니다.

물론 다른 요한계시록 해석은 이 내용을 이렇게 상징적 의미로 보기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의미로 봅니다.
그래서 그 상하여 죽은 인물을 네로 황제라고 생각합니다. 네로 황제는 갑자기 죽습니다. 네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로마제국은 큰 타격을 입은 듯 보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박해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황제를 통해 로마는 다시 제국의 면모를 회복하고 박해는 다시 심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바로 그런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1세기의 그와 같은 상황이 마지막 때에 그대로 재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7년 대환란 때에 적그리스도가 그와 동일한 과정을 통해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고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어떤 구체적 역사적 사건에 적용하는 것은 언제나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래 요한계시록은 그런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여타 일반적인 예언서와 많이 다른 책입니다.
그래서 네로와 죽었다가 살아난 짐승의 한 머리를 동일시하는 것은 세부적인 면에서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지막 7년 대환난에 적그리스도가 그런 방식으로 출현한다고 해석하는 것도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고, 무엇보다 적그리스도가 한 개인으로 나타날지 아니면 어떤 국가나 제도로 나타날지 아직 우리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그렇게 구체적인 역사적 의미로 보기보다는 비유적 의미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으로 사탄과 짐승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12장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고 그들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들에겐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탄과 짐승은 그들의 패배를 숨기고 위장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을 계속 미혹하고 신자들을 박해한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조금 전 죽었다가 살아난 짐승의 머리를 말하면서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오지 않죠. 그러면 신약의 다른 성경이 말하는 적그리스도를 요한계시록에서 찾는다면 과연 무엇일까요?
네, 바로 이 첫째 짐승입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는 어떤 세상 국가 혹은 그 지도자가 적그리스도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정체는 마지막 때가 될수록 드러나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둘째 짐승은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합니다. 이것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한 모습이고 특히 용처럼 말을 한다는 것은 이 둘째 짐승이 거짓 선지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계19:20을 보면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째 짐승의 정체는 한 마디로 거짓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20:10에도 최후 심판 때에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지기 때문에 이 둘째 짐승의 정체가 거짓 선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로서 이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을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12절을 보면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둘째 짐승은 이적을 행하고 첫째 짐승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경배하게 하고 거기에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죽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둘째 짐승의 보다 구체적인 정체는 국가로부터 위임을 받아 국가에 협력하는 종교 제도나 종교 기관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예수님 당시로 말하면 성전 당국이나 산헤드린 공회, 중세로 말하면 이단재판소나 교황청, 오늘날로 말하면 종교연합회나 교단 등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짐승은 종교 분야만 아니라 경제 분야에도 나타납니다. 16절 이하를 보면 이 둘째 짐승이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이 표를 가진 자 외에 매매를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째 짐승은 종교분야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우상화된 악한 국가에 적극 협력하는 하위 기관이나 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오늘 우리는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마지막 때에 우상화된 악한 국가를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국가의 협력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내용인데, 왜 이런 당연한 내용을 우리가 생각해야 할까요?
슬프게도 교회가 그렇게 행한 역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하고 그가 권력을 쥐었을 때, 독일 교회는 그 독재자를 축복하고 협력했습니다. 한국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대다수 교회는 일제에 협력하고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교회는 정권의 온갖 혜택을 받으며 그 정권을 비호했습니다. 일본 종교단체가 남긴 건물과 땅을 무상으로 넘겨받고 미군의 지원품을 교회가 받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 등 각종 정책에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서북청년단을 만들어 제주도에 보냈습니다. 그것이 그 비극의 4.3사태를 만들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불의한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와 같은 악순환은 군사정권 시절에도 계속되었고, 현재에도 진행중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오늘 말씀과 역사적 사례를 통해 교훈을 받아, 세상 정치와 국가를 늘 분별함으로 악한 협력관계를 맺거나 이용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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