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하늘 보좌와 하늘 예배의 환상 2

믿음찬교회 0 156 2021.11.02 13:16
하늘 보좌와 하늘 예배의 환상 2
계 4:6~11
2021.10.29.

환상 가운데 하늘로 올라간 요한은 맨먼저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보고, 보좌에 둘린 무지개를 보고, 보좌 주위에 이십사 장로들을 보고, 보좌로부터 나오는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를 보고, 보좌 앞의 일곱 등불을 보고, 또 보좌 앞의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를 보았습니다. 
요한에게 보여지는 이 환상 하나하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보좌에 있는 네 생물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사자, 둘째는 송아지, 셋째는 사람, 넷째는 독수리 같았습니다. 이 네 생물은 여섯 날개를 가졌고, 앞뒤로 눈이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네 생물의 모습은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스랍과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네 생물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에스겔 1장의 네 생물은 각각 4개의 얼굴을 가졌지만, 오늘 본문의 네 생물은 각 생물마다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와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네 생물과 스랍의 차이에 대해선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보좌하는 스랍이나 네 생물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의 네 생물에 대하여 초대교회 교부들로부터 현대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일치하는 해석은 이 네 생물은 각 종을 대표하는 우두머리이고, 그래서 이 네 생물은 피조물과 생명체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네 생물이 앞뒤로 눈이 가득하다는 사실은 이 네 생물이 단지 피조물을 대표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하신 능력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이자 수행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네 생물의 모습이나 특징보다, 이 네 생물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입니다. 이들은 지금 보좌 곁에서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찬양과 경배에 이십사 장로들도 함께 참여하여 머리에 쓴 금관을 보좌 앞에 드리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드려지는 하늘 예배의 모습입니다. 
이 찬양과 경배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둘째 전능하신 분으로, 셋째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으로, 넷째,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다섯째 만물을 지으신 분으로 찬양과 경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찬양과 경배의 내용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이것은 지상의 인간 황제나 거짓 우상들이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거룩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창조한 것이 없고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사람들은 황제를 dominus et deus noster(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테르 / 우리의 주 하나님)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전혀 가당치 않은 말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라는 이 찬양과 경배는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합니다. 어떤 세상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만 예배합니다. 하나님외에 어떤 사람이나 우상이나 귀신이나 권력이나 돈을 경배하고 그 앞에 머리 숙이는 행위는 신자로서 가장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간혹 점을 보고 무당을 찾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우리는 모든 거짓과 우상들을 분별하고 하나님께만 경배하는 존귀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편, 하늘에서 쉼 없이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예배는 이 땅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원형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우리의 예배는 하늘 예배의 반영이 되고 그림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늘의 예배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하나님 경배 외의 목적으로 변질되어선 안 됩니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거나 종교의식이 되어선 안 됩니다. 교회도 예배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도 예배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교회나 목회자가 예배를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것은 한낱 인간의 종교의식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는 순수한 예배만이 예배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예배를 잘 반영하는 이 땅의 예배에는 큰 영광과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예배가 그 예배에 투영되고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모인 아무리 작은 예배라도 그 예배가 하늘의 예배를 온전히 반영한다면, 거기엔 큰 영광과 거룩과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귀한 은혜가 우리 예배에도 늘 임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이 요한을 하늘로 이끄시어 이와 같은 하늘 보좌와 하늘 예배의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한과 교회들이 그 땅의 현실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두려운 박해와 혹독한 고난은 믿는 자의 믿음을 좌절시킵니다. 교묘한 거짓 유혹은 믿는 자의 믿음을 타협하게 합니다. 그런 어려운 현실을 그들이 가진 믿음과 능력과 힘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에게 이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때와 다름없는, 이 시작된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이 환상을 믿음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환상을 요한이 아니라 바로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특별한 개인적인 환상이나 신앙체험이 따로 없으셔도 괜찮습니다. 성경의 환상은 믿음 안에서 곧 나의 환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환상을 통해 요한이 깨달은 것처럼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 땅의 현실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고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현실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좌절하지 않고, 일이 잘 되어도 자만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다 그쪽으로 걸어가도 나는 그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살아도, 나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늘의 환상을 보고 하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다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찍이 모세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 선지자를 거부하는 이 시대와 교회 속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선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두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땅과 하늘입니다. 땅의 현실은 보이는 현실이지만 영원한 현실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의 현실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원한 현실입니다.
땅과 하늘의 두 세계를 믿음으로 동시에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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