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죽음과 하나님의 뜻
마 13:53~14:12
2021.08.01.
마태는 하나님 나라 비유 후에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이어서 계속 말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계속된 갈릴리 사역에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관심을 갖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하고, 적대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따르는 사람은 적었고, 대부분은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시고, 그간 성공적인 갈릴리 사역을 배경으로 이제 선생으로서 마을 회당에 서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그 형제들도 알고 그 누이들은 지금 결혼해서 이 마을에 살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거부를 뒤로 하고 떠나시게 되는데, 이제 예수님은 회당과 결별하고 다시 회당에 서시는 일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 예수님의 이름과 사역은 갈릴리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소문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 왕 헤롯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이 헤롯은 헤롯 안디바라는 인물입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역의 통치자였죠. 그는 얼마 전 유대 백성이 존경하며 따르던 세례요한을 처형한 바 있습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유대 백성의 반감과 원망을 사고 있었는데, 세례요한을 처형한 일로 더욱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백성들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는 예수의 소문은 그를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에게 ‘죽은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헤롯 안디바의 이 말은 자기의 무리한 결정, 자책하는 마음, 미신적인 생각, 그리고 불안하고 불길한 심정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마태는 헤롯 안디바가 세례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 제법 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처음에 어떻게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나서 어떻게 그 의로운 선지자가 죽게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마태가 여기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세례요한의 죽음을 말하는 이 부분에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마태는 왜 세례요한의 죽음을 비중 있게 다루는 걸까요?
그래서 오늘 설교는 우리도 잠시 멈추어 서서 세례요한의 죽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례요한의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뜻과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마태가 세례요한의 죽음을 마태복음 안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이유는 크게 2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그 출생부터 생애와 사역 그리고 죽음까지 여러모로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죽음을 비중 있게 다루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둘째는, 세례요한의 죽음은 이제 예수님의 죽음의 예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세례요한의 죽음을 말하면서 이제 예수님의 죽음 역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일종의 복선이죠.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마태의 목적과 별개로, 세례요한의 죽음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 훌륭한 분이죠. 예수님에게 가려졌지만,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신약의 새 시대와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한 선지자로서, 또 특별한 삶과 사역 끝에 안타까운 순교를 한 선지자로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인물입니다.
사실 그는 출생부터 남달랐습니다. 그의 출생은 천사에 의해 예고되었습니다. 남다른 출생과 성장을 한 그는 당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시대와 백성을 예언자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식적으로 받게 됩니다.
그 후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했던 백성들을 각성하게 했고, 그 결과 수많은 백성이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고 그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와 같은 자신의 사역이 한편으론 메시아를 위한 예비적인 사역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날, 그는 자신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사역을 묵묵히 감당해 나갔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공동체를 만들고 금식 등 경건생활을 하고 신앙적 규율과 가르침을 전수했습니다. 그는 놀라운 예수님의 사역과 별개로, 그렇게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백성들의 대중적 지지를 받는 영향력 있는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세례요한은 갈릴리의 통치자 헤롯 안디바를 비판하게 됩니다. 헤롯 안디바가 아내를 버리고, 그의 이복형제 헤롯 빌립 1세와 이혼한 헤로디아와 결혼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롯 빌립 1세는 이두매 지역을 다스렸던 헤롯 빌립 2세와 달리, 별도의 공직을 맡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마 정치적 야심이 있던 헤로디아는 그런 자신의 남편을 버리고 헤롯 안디바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한편 여기서 세례요한이 유대인이 아닌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를 왜 유대 율법으로 비판하였는지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들의 그런 모습은 통치자로서 올바른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이를 비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의 비판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사안이었고, 해결해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는 즉각 세례요한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을 미워하고 이 일을 심각한 정치적인 문제로 판단한 것은 헤로디아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주저하는 헤롯 안디바와 달리 세례요한을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세례요한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바로 헤롯의 생일날 자신의 딸 살로메를 보내어 그 잔치 자리에서 춤추게 하고, 헤롯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이죠. 그 작전은 완벽히 성공합니다. 대개 당시 춤추는 여자는 창녀 계층의 여자가 추었는데, 살모메가 파격적으로 그것을 한 것입니다.
헤롯은 살로메에게 소원을 말해보라 하고,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충동적인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살로메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합니다.
네, 하나님의 특별한 선지자였던 세례요한은 그렇게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세례요한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면서, 그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강한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종인 세례요한이 헤롯과 헤로디아 같은 악인의 한낱 정치 행위와 여흥 거리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려고 하나님은 세례요한의 출생에 천사를 보내셨단 말입니까? 그러려고 하나님은 그 아이의 성장과 미래를 축복하시고 예언하셨단 말입니까? 그러려고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를 먹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단 말입니까?
그렇게 하루아침에 권력자의 노리개와 희생양이 될 사람을 왜 하나님은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는 특별한 사명자로 세운 걸까요?
하나님은 의로운 자기 종을 어떻게 그렇게 악인의 손가락 하나와 고갯짓 하나에 쉽게 죽게 하신 걸까요? 죽음도 다 같은 죽음이 아닌데, 고작 한 여자아이의 춤 값으로 죽는 보잘것없는 죽음이 되게 하신 걸까요?
우리는 세례요한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면서 이런 허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례요한의 죽음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날 우연히 살로메가 춤을 추고, 우연히 헤롯이 충동적인 약속을 하고, 우연히 살로메가 헤로디아에게 달려가고, 그래서 결국 헤로디아가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하라고 한... 그렇게 단순히 많은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해프닝은 아닙니다.
그 사건은 세례요한이 백성을 대표하는 선지자로서 권력자의 비리와 잘못을 지적했기에 결국 일어나게 된 필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죽음은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필연적인 선지자다운 죽음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이 선지자다운 죽음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런 귀한 하나님의 종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 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되면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은 단지 그의 죽음이 안타깝고 초라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뜻은 이 악하고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세워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세례요한의 죽음은 그런 세상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런 현실과 악과 거짓과 왜곡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놀랍게 이루어져 가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뜻은 항상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쉽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자기 백성을 만드실 때에, 아브라함의 불순종은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불순종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로잡아 나아가셨습니다. 100세에 이삭을 주시고 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 마침내 아브라함의 신앙을 온전한 신앙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삭 또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죠.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야곱이 아닌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놀랍게 역사하셔서 결국 그 축복이 야곱에게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야곱은 에서를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죠. 그러자 하나님은 거기서도 야곱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들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요셉을 노예상인에게 팔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애굽에서 계속 진행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구약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그런 하나님의 신실하신 역사를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실수하고 왜곡하고 위기를 초래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든 왜곡되고 잘못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뜻을 신실하게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했고 그래서 망했고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도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고, 바벨론에서 그들을 불러내셨습니다. 물론 돌아온 그들도 곧 다시 타락하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성전과 율법을 차지하였습니다. 헤롯 왕은 탄생한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그의 아들 헤롯 안디바는 이제 세례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방해와 인간의 불순종과 왜곡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행하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행하실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죽었고, 이제 곧 예수님도 죽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례요한의 죽음보다 더 안타깝고 더 비참하고 더 좌절스러운 죽음이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권력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받을 때, 과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은 이 땅위에 세워질 수 있는가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그런 왜곡과 초라함과 죽음과 패배를 뚫고 나아가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승리하는 이와 같은 방식은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과 능력과 기적으로 이기기보다는 실패와 패배와 죽음으로 이기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살면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은 자주 이 세상 현실에서 위협을 받고 좌절되고 희미해지고 패배하는 것 같습니다. 일반 사회를 봐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은 늘 요원하고, 거짓과 악이 항상 선을 이기는 것 같습니다.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거짓과 왜곡과 눈물이 있는지... 그런 왜곡된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늘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더 잘 살고 더 성공하고, 나는 예수 믿어 뭐 시원하게 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을 보아도 늘 많은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지만, 상황은 별로 나아지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평안과 소망은 내 심령과 우리 가족과 우리 교회에 임한다고 하지만,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 현실과 역사와 나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 속에 성취되고 있고 성취될 수 있는가 하는 강한 의문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나라는 늘 커지고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한 번 우리 가운데 심겨지면, 그것은 스스로 자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지는 것이 쉽지 않지만, 심겨진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자랍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성취되고, 우리 가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성취되고, 우리 교회와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성취됩니다.
비록 우리 눈에 잘 안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답답한 현실과 이 세상의 악하고 모순된 현실 속에서도 전진하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믿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 고향이 경북 영주인데, 거기에 저의 이모님 한 분이 살고 계십니다. 이모님은 이모부님과 사이에 딸만 9명을 두셨습니다. 어릴 때 저는 영주에 가면 이모님 댁에서 며칠간 머무르다 오곤 했는데, 저희 집도 가난했지만 이모님 집도 무척 가난했습니다. 이모부님 혼자 돈을 버셨는데, 이모부님은 그 시절 강원도 황지에서 광부를 하셨습니다. 황지는 지금 태백시가 되었죠. 그래서 식구들은 많고 또 다 딸들이고... 물론 다 착하고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긴 했지만, 어릴 적 제가 생각해도 이모님 가정은 참 암울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형제 중에 제일 가난한 그 이모님과 동병상련으로 같이 마음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모부님은 돌아가셨지만, 그 평범했던 아홉명의 딸들이 전국 각지에서 다 잘 살고 계십니다. 미국으로 가서 사는 분도 있고, 특히 셋째 누님은 영주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의 목사 사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그 사촌 누님들을 보면 이젠 집안이 훤해졌다 할까요... 예전엔 좀 암울하고 어두웠던 가족이었는데, 세월 속에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이젠 밝고 건강하고 어엿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그 아홉명 중 여덟째는 저와 동갑이고, 아홉째는 제 동생이 되는데... 지난 번에 보고 제가 놀랐습니다. 얼마나 얼굴이 편안하고 좋아졌는지... 관상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씨가 그 이모부님과 이모님의 어려운 가정에 떨어져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고 믿습니다. 비록 그때에는 잘 몰랐지만, 하나님의 뜻은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나의 현실이 어려워도, 우리 가족의 현실이 어려워도, 이 사회와 세상의 현실이 답답해도...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오늘을 살아가면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비록 세례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의 한낱 정치행위로 보잘것없는 죽음을 맞았지만, 세례요한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그 죽음을 온전히 통과하여 성취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었던지, 그의 제자들은 그 후에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계속 지켜갔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나중에 그 제자 몇 명이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을 만나게 되는데,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물으니 그들은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였고, 성령님이 임하시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네, 비록 세례요한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고 자신들의 제자들도 그렇게 훌륭히 신앙을 지켜갔던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도 어렵고 힘든 현실에 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씨를 계속 심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자라게 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