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화 진주 그물 비유와 천국의 비밀
마 13:44~50
2021.07.25.
마태복음 13장의 하나님의 나라 비유는 36절을 기준으로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진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앞부분은 무리들에게 뒷부분은 제자들에게... 그래서 뒷부분에 나오는 가라지 해석과 감추인 보화와 값비싼 진주와 그물 비유는 제자들을 향한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감추인 보화와 진주 비유는 짝을 이룬 하나의 비유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어떤 모습과 자세로 참여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비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두 비유를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이어서 마지막 그물 비유도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종종 사람들이 귀한 보물들을 땅에 숨겨두곤 했습니다. 그때는 은행이나 귀중품 보관소 같은 곳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그런 보물들을 자기 땅에 숨겨두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 사람은 그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밭에서 엄청난 보화를 발견하였습니다. 아마 그 보화는 지금 현재의 밭 주인의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오래전 어느 주인의 것이었을 텐데, 이젠 주인 없는 보물이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어서 예수님은 동일한 비유 하나를 더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값비싼 진주를 발견한 진주 상인입니다. 진주를 장사하고 늘 좋은 진주를 찾는 한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날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단번에 그 진가를 알아보았죠. 그래서 이 사람은 주저 없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사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 역시 설득력이 있습니다.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산다는 것에 일말의 부동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런 값진 물건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을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두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 말해주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어떤 것이란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보이지 않는 걸까요? 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야 하는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같이, 많은 진주 속에 섞여 있는 값진 진주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의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나라는 숨겨져 있을까요? 왜 그것은 명명백백하게 이 세상 속에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걸까요?
네, 그 이유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아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진정한 그분의 백성만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와 같습니다. 이 내용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왜 안 보이는가?’ 원론적인 의미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겠죠? 이것은 하나님은 왜 내 눈에 안 보이는가 라는 질문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나라나 우리와 다른 영적인 차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중심적으로 생각하여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2차원의 삶을 사는 개미가 ‘왜 내 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가?’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개미가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미는 3차원의 공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차원의 공간 속에 있는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 차원으로 말하자면 우리 인간 존재는 3차원의 공간과 0.5 차원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왜 시간이 0.5차원이냐... 그것은 우리는 시간 속에 살긴 하지만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에서만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면 4차원의 세계를 살 수 있겠죠.
아무튼 그러므로 그런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내 눈에 안 보인다고 부정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네,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발견하려고 하면 발견할 수 있는가? 네,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찾는 자에게 찾을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경과 성령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죄의 현실과 굴레,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 우리의 연약함와 죽음...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물론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찾지 않겠죠. 보이는 세계와 삶을 전부로 믿고 살아가게 됩니다. 젊은 시절엔 힘차게, 성공하면 멋지게, 누구나 좋은 시절은 있습니다. 그러다 인생의 밤이 찾아오면 영적인 불안과 허무함이 있겠죠. 점점 죄가 다가오고, 점점 뭐가 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영적인 현상을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로 한다면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참 놀랍게도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계기로, 여러 가지 이유로... 세상의 진실을 발견하고,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나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9세기에 러시아에서 주로 사실주의적 사회 소설을 쓴 고골리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 모두는 고골리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극찬한 작가입니다. 이 작가의 단편소설 중 ‘네프스키 거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네프스키 거리는 러시아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 거리입니다. 파리의 개선문 앞 샹젤리제 거리 같은 곳이죠. 그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적어도 네프스키 거리보다 더 나은 곳이 페테르부르크에는 없을 것이다. 이 거리가 있음으로 해서 이 도시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그 거리가 하루 동안 어떤 모습으로 시시각각 바뀌는지를 잘 묘사합니다. 아침에는 어떤 사람이 그 거리를 지나고 가게들은 어떤 모습이고... 그러다가 12시가 지나면 어린 학생들과 가정교사와 관리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그리고 2~3시부터는 그 거리가 가장 활기찬 시간이 되어 각종 코트와 모자와 레이스 달린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전람회가 펼쳐지고... 그러다가 황혼이 깃들고 거리에 램프가 켜지면 이제 그 거리는 신비로운 시간이 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거리에서 그 밤에 일어나는 2가지 사건을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는 가엾은 비극이고, 다른 하나는 우스운 해프닝입니다. 고골리는 아마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사건을 독자들이 느끼도록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거리에서 대표적으로 일어난 두 사건을 말한 이 소설은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로 끝납니다.
“그러나 가장 기묘한 것은 네프스키 거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아아 꿈에도 이 네프스키 거리를 믿지 말 것이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에는 외투로 몸을 꼭 감싸고 도중에 맞닥뜨리는 것들에는 일체 눈을 돌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모든 게 허위이며, 모든 게 환영이며, 모든 게 보기와는 다르다...
이 네프스키 거리는 해가 뜨거나 지거나 곧잘 사람을 속인다. 그중에서도 저녁노을이 무겁게 거리에 내려앉고 집들의 흰 벽이 드러날 무렵, 도시는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와 반짝이는 불빛으로 넘쳐 흐르고, 무수한 마차가 다리 쪽에서 몰려와서 마부가 고함을 치며 말 위에서 뛰어내릴 때, 또는 악마가 모든 것들을 제 나름의 모습으로 보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램프의 불을 붙일 무렵이 되면, 더욱더 심해지게 마련이다.” 네,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납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고 이 소설이 말하는 ’네프스키 거리‘는 바로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고골리는 세상의 실체를 그렇게 상징적으로 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네프스키 거리 처럼 보이는 세상을 전부라고 믿으시면 안됩니다. 세상은 계속 바뀌는 것일 뿐 참된 실체가 아닙니다.
저는 가끔 옛날 제가 살았던 지역을 지나게 되면 그런 느낌을 느낍니다. 40년 전 나는 거기서 뛰놀고 학교를 오갔지만, 집들도 달라지고 길도 달라지고 40년 전 내가 살았던 시공간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장소에 서 있지만 이젠 이방인이 된 느낌입니다.
네, 세상의 실체는 그렇습니다. 계속 변하고 변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세계를 전부로 믿는다면, 우리 역시 그렇게 흘러가 버리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세상과 완전히 대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 하나님의 나라를 감추인 보화같이, 극히 귀한 진주같이 발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다 팔아 사야 하는 어떤 것이란 사실입니다.
“...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이 두 비유의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제자들의 마음에는 이 장면이 가장 크게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밭과 진주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동일한 고민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소유를 다 팔아 하나님의 나라를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인 포기와 전적인 헌신입니다. 다 판다는 것은 전적인 포기를 말하고, 밭과 진주 하나를 산다는 것은 그것 하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헌신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그 언젠가 있을 종말의 그날을 기다리는 이단 신자들 같은 모습을 말하는 걸까요?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다 포기하고 다 바치고, 오직 예배하고 전도하고 헌신하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일만 하는 것이죠. 우리도 그렇게 신앙생활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 부질없는 무의미한 세상 다 포기하고 오직 주님의 일과 주님의 교회에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요? 어떤 교회는 실제로 그런 신앙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세상 일은 아무 의미 없고 하나님의 일만 가치가 있다... 그런 신앙 정서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늘 이 비유의 전적인 포기와 전적인 헌신을 이런 의미로 말하는 것은 참 쉽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만이 우리에게 중요하니까 다른 것은 어떻게 되어도 중요하지 않다라고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것은 참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말씀에 대한 좋은 해석과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이지, 다른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에 핀 백합화 하나를 돌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전적인 포기와 헌신의 의미를 조금 달리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에만 매달려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전적인 포기와 전적인 헌신이란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죠. 이 전적이라는 말이 더러 오해와 부작용을 낳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다르게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비유의 의미를 전적인 포기와 전적인 헌신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진실한 포기와 진실한 헌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진실한 포기와 진실한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을 다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또는 내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최선으로 진실하게 추구하는 것입니다.
열정과 헌신은 좋은 것이죠.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열정과 헌신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무분별한 열정과 헌신은 결국 나를 속이고 나를 위한 수단이 되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유대인들만큼 열심히 전적으로 하나님과 성전을 위한 사람들이 없었죠. 그러나 그들의 전적인 헌신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계획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전적인 헌신이 아니라, 진실한 헌신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더 온전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진실한 헌신...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자 하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삶에서 나타나고, 오늘 내 삶에서 나타납니다.
요란하기만 한 가짜 헌신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돌짝 밭에 뿌려진 씨는 금새 말라버리고, 가시떨기 밭에 뿌려진 씨는 성장이 멈추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다 진실한 헌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든 일이 있고 삶에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헌신입니다. 예수 믿고 정직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내 삶은 생각보다 잘 살지 못하고 뒤처지는 것 같고... 그래도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 갖지 않는 것이 진실한 헌신입니다. 그런 어려움과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진실한 헌신입니다.
제가 늘 금요기도회 기도제목에 ‘우리 모든 성도님들 삶에 강건함과 평안함을 주시고 범사에 형통케 하옵소서’라고 올리긴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가 바르게 살려고 하면 어려움이 많고 형통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섭섭한 마음 갖지 않는 것이 진실한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에 품고 묵묵히 끝까지 변함없이 최선을 다하는 삶과 신앙이 진실한 헌신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진실한 헌신은 결국 사랑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더욱 아끼고 눈동자같이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이렇게 진실한 헌신과 사랑을 하시는 분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물 비유에 대해 하나만 살펴보고 마칠까 합니다.
그물 비유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물 비유는 하나님 나라 비유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그렇게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우리는 악인과 공존해야 합니다. 왜 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많은가...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한편, 이 그물 비유에서 마지막 날에 구별되는 못된 것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 못된 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부패한, 썩은’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못된 것을 내버리는 것은 그것이 뭔가 성격이 나쁘고 악해서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이 영적으로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이 세상과 세월 속에 그렇게 부패하고 썩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결국 이 악한 세상의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같이 떠내려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이 악하고 어둔 세상 속에 썩고 부패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그물과 손길에 붙잡힌 좋은 사람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