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악하니
마 12:1~2, 9~10, 22~24
2021.07.04.
우리는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과 세례요한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고, 권능을 행하여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무관심의 이유는 영적인 문제이고 영적인 무지이죠. 살아가는 데에는 밝아도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밝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하나님을 정말 몰라서 모르는 사람도 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초청하십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예수님은 그렇게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 고개 들어 바라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이 마태복음 11장의 내용이었습니다.
11장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12장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대와 공격을 보여줍니다. 여기엔 모두 4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안식일 밀밭에서 일어납니다. 그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그런 행동은 구약 율법에 의하면 용인되는 행동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이삭을 줍는다든지, 배고픈 나그네가 과일을 따먹는다든지... 율법은 그것을 허락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그것을 안식일에 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대의 랍비들은 모세오경을 해석하면서 수많은 안식일 금지행위를 만들었죠. 제자들이 이삭을 잘랐으니 그것은 추수에 해당되고, 손으로 비벼 먹었으니(누가복음 참조) 그것은 탈곡에 해당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벼르고 있었는데, 그 현장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 위반을 말하는 그들에게 3가지 내용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법을 말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법과 판례로 대답하셨습니다. 다윗의 사례를 말씀하고, 제사장들의 안식일 성전봉사를 말씀하고, 또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자비를 원하고 형식적인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호세아서의 근본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만든 그 안식일 법은 구약 사례 및 율법 근본과 맞지 않는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공격한 두 번째 사건도 역시 안식일 문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으로 이동하셨는데, 거기서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또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왜 그것을 굳이 안식일에 하십니까?’
이에 예수님은 구덩이에 빠진 양 이야기를 하십니다. 당시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랍비들은 그 양이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물건을 던져준다든지, 혹은 다음날 꺼내기 위해 음식물을 넣어준다든지... 그것은 안식일 위반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어쨌든 결론은 짐승을 구하는 일이 안식일 규례에 앞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례를 언급하시면서,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하냐, 그리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에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공격에 그 정도로 대응하시고 자리를 뜨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율법 해석과 가르침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고,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은 나중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급적 심각한 논쟁과 갈등을 피하시려는 예수님이었지만, 그런 상황을 피하기 어려운 사건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12장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사건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귀신축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으로 인해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다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및 이방 사회에서 귀신축출을 하는 주술가가 있긴 했지만, 예수님의 귀신축출은 방식이나 능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 하고 다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이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을 오히려 귀신의 역사로 모함했습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가급적 논쟁과 갈등을 피하길 원하셨지만, 결국 신랄한 비판과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매우 깁니다. 25~37절까지 13절이나 되죠. 까다로운 안식일 문제보다 더 많은 말씀을 여기서 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시는 어조가 매우 격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지금 화를 참으시면서 매우 신랄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신랄한 비판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다시 예수님께 도전합니다.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래서 표적을 요구하는 네 번째 사건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마찬가지로 매우 깁니다. 39~45절까지 7절이나 되죠.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까지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자기들 앞에서 표적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선지자라는 것을 알아보려는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표적을 일으켜 보라고 시키는 것이고 또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무언가 문제 삼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그들의 의도를 아시는 예수님이 거부하시죠. 그리고 이 거부하시는 말씀이 매우 길고 신랄합니다. 간단히 거절하시면 될 것 같은데, 7절이나 되는 긴 말씀을 하시고 그 모습도 매우 격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사건과 네 번째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례적으로 길고, 또 매우 비판적이고 신랄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좀처럼 그런 분이 아니시죠. 다투지도 아니하고 들레지도 아니하고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인데...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대하시는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이 두 개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그 말씀의 요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말씀의 요지는 같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너희는 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로 지금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목격하고도, 그리고 그 권능의 역사가 일어날 때 나타난 영적 분위기를 느끼고도, 그리고 백성들이 전부 그 권능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는 것을 보고도... 너희는 악하므로 그것을 귀신의 역사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는 결과도 결과이지만 분위기와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아~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냐... 이건 하나님의 역사야’라고 절로 말하게 되는... 그런 거룩하고 두려운 감정이 들게 됩니다. 우리는 마술사가 아무리 놀라운 마술을 해도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신기하다, 대단하다...’ 그런 생각이나 마음은 들어도 두렵고 거룩한 마음이나 감정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현장에서 목격하고 또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귀신의 역사로 모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귀신의 역사로 모독한 것은 만약 그 올가미를 예수님께 씌울 수 있다면, 예수님을 산헤드린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처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8:10 말씀에 너희는 너희 중에 사술을 행하는 요술사나 무당이나 신접자를 용납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도 않고 모독하고, 나아가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하고... 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그들을 향해 이렇게 길고 신랄하게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축출을 했다는 비방이 안 먹혀들자, 그들은 재차 예수님에게 표적을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본래 악이 그렇습니다. 악은 끈질기고 계속 그 악을 시도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음란하다’는 말은 성적으로 음란하다는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음란하다는 말이죠.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는 악하고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은 자들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이제 보여줄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보여줄 표적을 믿지 않을 너희들에게, 내가 이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궁극적인 표적을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나쁜 놈들에게 너무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41절과 42절 말씀을 하신 후에, 아주 특이한 일곱 귀신 이야기를 하십니다. ‘나갔던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와 그 사람의 형편이 더 악화된다’는 이야기이죠.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을 거부하는 이 악한 세대’는 그와 같이 더 혼란스럽고 어두운 영적인 모습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게 됩니다.
네, 예수님의 이 말씀 그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졌죠. 유대인들은 영적 혼란 속에 유대로마 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또 제대로 믿지 않을 때,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더 악화된다는 이 예수님의 경고를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아무튼 지금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의 요지는 ‘너희는 악하다’는 것입니다. 명백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믿지 않고, 그리고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하고 나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너희가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너희는 무관심하고 알려는 마음이 없고, 나아가 너희는 악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마태복음 11장과 12장의 말씀은 이제 13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왜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결과가 다른지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무엇이 악한 것인가... 무엇이 악한 모습인가... 이것을 일반적으로 말할 수도 있고 복잡하게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무엇이 사람의 악한 모습인지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어떤 한 모습을 지목하시면서 그것을 악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고, 표적을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표적을 구하고... 이렇게 일과 사건을 바르게 보지 않고 왜곡하는 것을 예수님은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흰 것은 흰 것이고, 검은 것은 검은 것이죠. 잘한 것은 잘한 것이라 말하고, 못한 것은 못한 것이라고 말하고, 참은 참이고 거짓은 거짓으로 아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고 말하고 인정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목적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하죠. 그것이 악입니다.
이사야서 5:20~2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이렇게 악과 선을 자기 목적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보는 것, 흑암과 광명을 자기 입장이나 돈이나 권력에 따라 다르게 말하는 것, 쓴 것을 달다 하고 단 것을 쓰다 하는 것.... 이것이 사람이 타락하고 악하게 되는 원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이 말씀 앞에는 이런 사람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되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사5:16)
여러분, 이런 점에서 오늘날은 매우 악한 시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목적에 따라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을 악으로 말하고 악을 선으로 말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정치는 당연히 그렇고, 돈 앞에서는 당연히 그렇고, 사회생활은 두말할 것 없이 그렇고, 내가 불리한 문제나 내가 책임질 문제 앞에선 으레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거짓과 혼란이 일상이 된 삶과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의 귀신축출을 보고 귀신의 역사라고 모함했을까요? 예수님은 자기들의 반대편에 서서 성전개혁과 율법개혁을 말하는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의 많은 표적을 보고도 또 표적을 행하라고 요구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에 반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귀신축출과 병자치유와 말씀이 올바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들의 목적은 사실의 참과 거짓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권력과 이익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귀신의 역사로 말하고 선과 악을 거꾸로 말함에 있어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마태복음 12장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안식일 논쟁이 무엇이고 성령모독이 무엇이고 사탄의 나라가 무엇이고 일곱 귀신이 어디에 갔다 돌아오고...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악하다는 사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악하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왜 악한 자인가 하는 사실... 이런 내용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런 우리의 악한 모습을 벗고, 모든 것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와 새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지금 세상은 너무나 악합니다. 선과 악을 자기 기준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유자재로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하고, 양심과 본성과 선한 생각을 자기 입장에 따라 능숙하게 통제하고 주저없이 다른 길로 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죄인지도 악인지도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믿어도 이 문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아무런 역사를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안에는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하나님의 선한 기준이 그 안에 만들어지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이익에 따라 늘 어지러운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은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선과 악이 바뀌거나 사실과 진실이 왜곡되거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과 양심이 힘들고 괴로워야 하죠. 그게 가시처럼 내 안에서 계속 나를 찔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회개하게 되고, 우리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 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엄연한 하나님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말하는 그들을 향해, 또 엄연한 표적에도 불구하고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악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은 선으로 말하고, 악은 악으로 말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이익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바른 마음과 바른 시각과 바른 말과 행동이 만들어지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그런 참되고 선하고 영적인 분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