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확신의 신앙으로

믿음찬교회 0 197 2023.01.01 11:53
확신의 신앙으로
요일 1:1~4

2023년 새해를 하나님 안에서 시작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풍성히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람이 젊을 때는 자기 삶에 규모가 없다가, 나이가 들고 연륜이 생기면 자기 삶에 나름의 규모와 형식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자기만의 방식이 있고, 일을 하거나 쉴 때에도 자기만의 방법이 있게 됩니다. 새해를 맞이할 때도 젊을 때는 그저 친구들과 즐겁게 놀면서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연말연시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분들 중에는 새해 일출을 보러 멀리 가는 분들이 있죠. 그 추운 날 일출을 보러, 전날 출발해서 당일 새벽에 일어나 일출 장소로 갑니다. 해가 뜨기까지 짧게는 30분 넘게 기다리다가, 해가 뜨면 자기 마음의 염원을 담아 기원을 합니다. 해가 뜨고 기원을 하는 그 시간은 겨우 몇 분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그것을 자기만의 새해맞이 방법으로 해마다 지킵니다. 그리고 기분 좋게 아침을 먹고 새해 첫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죠.
비록 이와 같은 모습 안에는 미신과 같은 잘못된 것이 있겠지만, 그러나 사람이 어떤 의미 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규모 있는 자기 삶의 격조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의미 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우리의 형식과 방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본질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본질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는 형식과 방법도 꼭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이 본질과 내용을 가지면서 동시에 좋은 형식과 방법을 가질 때, 우리 신앙은 균형 잡힌 훌륭한 신앙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자들이 새해를 맞이하는 것과 같은,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아 일출을 보러 가거나, 소원을 빌러 가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첫 시간을 예배로 드립니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것이죠.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세겜 땅에 나타나시어 아브라함에게 큰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곳은 의미 있는 장소,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장막을 옮겨 새로운 장소로 갈 때마다, 그 낯설고 두려운 곳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모습은 우리에게 좋은 신앙의 모범과 형식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도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가고, 새로운 장소로 옮겨가고, 중요한 일을 시작하고, 갈림길에 서고 변곡점에 설 때마다,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좋은 형식과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잠들기 전 기도를 하는 것도, 틈틈이 성경을 읽고 찬양을 듣는 것도, 감사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 고백을 하고 작은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신앙의 형식과 방법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첫 예배도 동일한 의미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어제 송구영신기도회를 드리고, 오늘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 안에서 한 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크신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길 축원합니다.

마태복음을 마무리하던 지난 연말에 저는, 2023년에는 우리가 어떤 성경 말씀을 보아야 할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요한일서 말씀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말씀을 선택하게 된 것은, 최근 제가 한 사람의 목사로서 어떤 큰 위기감과 문제의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큰 위기감과 문제의식은 바로 오늘날 우리 신앙이 이 시대 속에 전반적으로 무의미해지고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교회 밖으로는 무의미해지고, 안으로는 급격히 약화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죠.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문제를 최근 들어, 그 어느 때보다 부쩍 크고 심각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실 최근까지 주로 생각하고 염려했던 신앙 문제는 개혁이었습니다. 우리 신앙과 교회의 개혁 문제... 저는 이 문제를 신앙에 눈을 뜨고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주로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왔습니다. 우리 교회와 신앙이 성경 말씀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새롭게 개혁하고 회복할 수 있는지... 주로 여기에 저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이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보다는 매우 개혁적인 신앙과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그런 목사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근 저는 개혁보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우리 교회와 믿는 자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허물어져 가는 집을 한 번 고쳐보겠다고 구멍도 막고 창문도 고치고 문도 바꾸고 있는데, 눈을 들어보니까 저기 멀리서 큰 홍수가 밀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산에 비가 많이 오면, 어느 순간 하천의 물이 갑자기 불어나 닥쳐오게 됩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지금 우리 교회와 성도들과 신앙을 향해 큰 위기가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 위기는 바로 불신앙이라는 위기입니다.

세상이 거대한 불신앙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불신앙도 얼마 전까지는 적어도 이런 정도의 불신앙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적어도 신을 믿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교회는 불신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았고,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적어도 신앙을 좋게 생각하고 신앙의 필요성을 말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교회를 안 다녀도, 아이들은 교회를 보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정말 어두운 불신앙에 빠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나 절대자나 신이나 그런 자리는 완전히 없어져 버렸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지금 온통 인간과 자기 자신과 돈과 권력과 우상과 과학이 차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무신론의 시대... 그런 밤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절대자가 없으니, 절대적인 가르침도 없고 보편적인 진리도 없고, 그러니 각자 저마다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고 절대자가 없으니, 신앙 자체도 무의미합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 구원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역시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의지하는 작은 종교나 미신 신앙은 얼마든지 믿는 그런 모순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열심히 전도를 하지만, 하나님도 모르고 신앙도 모르고 구원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세상과 사람들은 우리의 전도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이런 어두운 불신앙이 점점 우리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날씨가 추우면, 아무리 문을 꼭 닫아도 집 안이 추워지죠. 비가 많이 내리고 습하면, 아무리 문을 꼭 닫아도 집 안이 눅눅해집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이런 세상의 불신앙이 우리 교회와 신앙 안으로 들어와 우리 신앙과 신앙생활을 갈수록 약하고 희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알거나 잘못 믿어서 개혁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앙과 믿음 자체가 확신을 잃고 믿음의 힘을 잃어버리고 약해지고 물러지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겉으로는 교회를 다니는 신자인데, 속으로는 하나님을 잘 안 믿습니다. 하나님을 잘 안 믿고 또 잘 안 믿어지니까, 비록 신자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돈이나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삽니다. 하나님보다 돈이나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기니까, 신앙 자체보다는 축복이나 승리 같은 신앙의 달콤한 결과를 더 추구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잘 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잘 안 믿어지니까, 개인 기도도 잘 하지 않고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도 약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운 문제라도 생기면, 자신의 신앙과 삶에 큰 위기가 오는 신자가 많습니다.
이렇게 지금 우리 교회 안에는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믿음의 힘이 없고 확신이 없는 불신앙의 문제가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신앙이 커지면 결국 신앙생활을 내려놓게 됩니다.

우리의 약해지는 신앙과 커지는 불신앙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어두운 시대 속에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고 확신에 찬 신앙으로 지킬 수 있을까요?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아버지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고통과 절망에 시달린 그의 믿음은 약해질대로 약해졌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은 그때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신앙과 불신앙을 오가는 겨우 실낱같은 믿음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네, 굉장히 강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강한 믿음의 말씀에 아이의 아버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그 아이도 고쳐주시고 동시에 그 아버지의 믿음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과 불신앙을 오가는 믿음과 어두운 믿음은 어떻게 고쳐질 수 있을까요?
네, 우리는 믿음의 원형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근본 되시고 본질 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쳐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불이 꺼질 때, 우리는 꺼지지 않는 믿음의 불이 되시는 그분께 나아가 우리 믿음의 불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때로는 질책도 받고... 저는 여러분을 감히 질책하지 못하지만,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직접 질책을 받으시고 믿음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생활을 통해 나아가시고, 기도 생활을 통해 나아가시고, 의롭고 정직한 생활을 통해 나아가시고, 헌신하는 생활을 통해 나아가시고... 2023년은 그런 새로운 믿음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그렇게 나아오는 자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우리 믿음은 회복될 줄 믿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도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고 확신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너무도 생생한 믿음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의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믿음인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단지 이 말씀 몇 줄을 읽기만 해도, 우리 마음에 믿음이 들어오는 감동을 받게 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이 분은 누구일까요? 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데,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가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요한일서가 요한복음을 바탕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1 말씀을 잘 알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래서 요한일서를 쓰는 이 저자는 우리가 대체로 이분을 사도요한으로 알고 있죠. 사도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말씀으로, 또 생명의 말씀으로 부르면서,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 만남이 우연이나 짧은 그런 만남이 아니라, 처음에는 들었고 다음에는 보았고 그다음에는 자세히 보았고 또 그다음에는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진, 깊은 만남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말 번역이 이 어려운 문장을 매우 훌륭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원문으로 보면 더 좋습니다.
“태초부터 있어왔던 분, 우리가 들었던 분, 우리의 눈으로 보았던 분, 우리가 주목하고 자세히 보았던 분, 그리고 우리의 손들로 만져보았던 분... 그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그런데 이 생명이 나타났고 그래서 우리가 보았고 너희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고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있어오다 우리에게 나타나셨는데...
우리가 보았고 들었던 것을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너희도 우리와 함께 사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본 마태복음이나 사도바울의 로마서 같은 그런 논리적인 말씀이 아니라, 한 믿음의 대가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씀을 하나씩... 한 호흡과 한 숨결로 하나씩 천천히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더듬더듬 어물어물 말하는 것 같죠. 그런데 이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실제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하신 그분으로부터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그냥 본 것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그분을 자세히 주목하여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들로 직접 만져보았다는 것입니다.
손으로 만졌다는 것은 손으로만 만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감각과 기관으로 그분과 전인적으로 접촉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의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우리의 귀와 눈과 생각과 지성과 모든 감각으로 확실하게 만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만난 확실한 분을 너희에게 전해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지금도 정말 살아계시는가... 예수님이 정말 역사 속에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가... 그 실제성과 역사성이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실제성과 역사성이 희미해지면, 우리 신앙은 현실과 분리되고 현실성을 잃어버리고 약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죠. 사도 요한이 앞서 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으로 높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자들이 나타나, 당시 교회의 믿음을 ‘영광의 주님/구원의 주님’만 바라보는 ‘영적인 믿음’으로 전락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이 요한일서를 통해 예수님의 인성과 그분의 성육신과 실제성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분을 실제로 믿는 현실적인 믿음, 확실한 믿음, 실제적인 믿음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으로만 이해하면, 실제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가르치시고 권력자들과 싸우시고 고난을 당하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치열하신 예수님의 삶을 잃어버리고, 고난의 실제 십자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의 십자가는 남겠죠.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신으로 추앙하고 영적인 구원을 바랄 뿐, 그 삶을 따르고 우리 삶을 바꾸는 생생한 믿음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영적인 구원을 얻고 마음의 위안을 얻고 평안도 받겠지만, 악한 내 삶을 바꾸고 내 현실을 바꾸고 오늘을 살아가는 살아있는 믿음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신성만을 추구하는 그와 같은 영적이고 관념적이고 종교적이기만한 믿음이 과연 기독교의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당시 잘못되고 약해지는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 이와 같은 말씀으로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의 신앙이 실제적인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고 듣고 만진 확신의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실제적이고 확신하는 신앙이 되면,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불신앙의 시대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렵다고 믿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 응답이 없다고 믿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작은 교회라고 믿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런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듣는 오직 말씀으로부터, 우리를 감화 감동하시는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잊지마시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그분을 보았고, 들었고, 만졌다는 이 믿음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 올 한 해도 살아있는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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