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요한계시록의 경고 (1)

믿음찬교회 0 227 2022.12.24 17:17
요한계시록의 경고 (1)
계 21:8, 21:27, 22:15
2022.12.16.

오늘 우리는 세 군데의 본문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마무리하는 21장과 22장의 이 짧은 본문 안에 경고의 말씀이 무려 3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성경말씀이 무엇을 3번 말한다는 것은 충분히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충분히 말씀하는가? ...
네, 이 내용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성 밖에 있게 되고 결국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 성 자체가 새 하늘과 새 땅임을 고려하면, 그들이 갈 곳은 아마도 다른 차원의 장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어떤 이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어떤 이는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저는 쉽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몇 년 전 노회찬 의원이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분의 사망 사건을 제법 긴 시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사건의 내용을 많이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돈을 받는 절차상의 문제와 그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 거짓말... 이 두 가지가 그분의 안타까운 죽음의 이유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분의 죽음을 폄하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저는 그분의 죽음이 안타까운 죽음이고 양심적인 죽음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야고보서 말씀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부끄럽게 하고 또 저로 하여금 사람의 의로움과 구원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에 저는 차를 운전하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부산 한 순복음교회의 목소리가 젊은 목사였습니다. “여러분, 순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다스림의 조건입니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으로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힘든데, 저는 그 말을 들으니 맥이 딱 풀리고 사망한 노회찬 의원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순종은 구원의 조건도 아닌데 거짓말 하나 때문에 죽다니...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순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그 말은 결코 성경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 목사의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어설픈 신학과 교리에서 왔습니다. 예정론, 성도의 견인, 하나님의 주권... 그런 것에서 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국에는 하나님과 성경은 모르고 그런 어설픈 신학이나 교리만 아는 목회자가 더러 있습니다.
여러분, 잘 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평생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며 산 무종교의 사람도 자신의 양심을 피로 지키는데, 목사는 양심을 지키지 않아도 천국에 가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그런 신앙이라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그런 파렴치한 저열한 신앙이 한국교회에 통용되고 있으니, 지금 우리 교회는 빛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노회찬 의원은 비록 교회를 다닌 분은 아니지만, 그분의 삶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귀한 삶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분은 노동자와 서민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몸소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노회찬 의원과 같은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그분의 진실한 삶을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길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구원이 쉬운가 어려운가에 대한 말씀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단적으로 말해서 구원이 만약 쉽다면 오늘 본문에서 요한계시록이 3번 경고할 필요가 있을까요? 천국을 말하고 글을 마무리하는 이 부분에서 “믿는 자는 다 천국에 들어가리라”하고 행복하게 마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 절정 부분에서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3번의 경고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외면할 수 없는 내용을 살펴보고 그 의미와 교훈을 생각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3번의 경고의 말씀을 편의상 21:8을 1번, 21:27을 2번, 22:15을 3번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잘 살펴보면 우선 이 말씀들이 각각 다른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1,2,3번 모두 거짓말하는 자를 마지막으로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1번이 가장 상세한데 이런 1번을 기준으로 할 때 2번은 1번의 요약 형태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3번은 1번의 처음 3개가 ‘개들’이란 말로 대체된 동일한 형태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3번의 경고의 말씀은 전체적으로 같은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3번의 경고의 말씀은 누구를 향한 말씀일까요?
이 문제에 있어서 우선 고려할 점은 이 말씀이 새 예루살렘 성을 말하는 문맥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전체 구조 속에서 이 새 예루살렘 성은 완성된 교회로서 2~3장의 불완전한 지상 교회와 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경고의 대상은 바로 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믿지 않는 비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실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죠. 주의와 경고는 교회 내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3번의 경고의 말씀은 교회 내 신자들을 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3번의 경고의 말씀이 교회 내 신자들을 향한 같은 의미임을 이해하면서, 이제 21:8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엔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총 8부류의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오늘은 이 첫 번째 내용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 두려워하는 자들은 누구이고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네, 그것은 박해를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단지 박해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고 타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박해야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 것은 모든 박해가 다 극심한 박해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목숨을 내어놓는 극심한 박해도 있지만 대체로 그런 박해의 비율은 낮습니다. 1세기 로마제국 당시도 그랬습니다. 지역별로 교회별로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심각한 박해는 주로 교회 지도자들 같은 소수에게 일어났는데, 일반 신자들은 투옥되거나 사회적 지위를 잃거나 미래가 불투명해지거나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는 정도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물론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참된 신자라면 못 견딜 정도의 박해는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언급된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여 믿음을 저버리거나 타협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자기의 사회적 안전이나 경제적 이익이나 성공을 최우선에 두고, 그래서 그것에 손해가 될 경우 순간순간 신앙을 저버리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목숨을 위협받는 극단적인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도저히 자기 믿음으로 감당하지 못해 일시적으로 신앙을 부인하는 것은 한 번 생각해 볼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도 그랬죠. 예수님이 체포된 대제사장의 뜰에서 그는 3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엔도 슈사꾸의 「침묵」도 그런 주제를 다룬 소설입니다.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목숨을 내어놓는 순교는 저 자신도 두렵고, 그것은 하나님이 감당할 힘을 주셔야 감당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이 문제 삼는 것은 그런 극단적인 박해가 아니라, 보다 일반적인 박해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반적인 박해 마저 두려워하는 것은 순수한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순수한 두려움이 아니라 신앙의 대가를 기꺼이 감당하고자 하지 않는 악한 마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이 아니라, 그분으로 인한 달콤한 다른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상실되고 오히려 손해가 될 때 주님을 저버리는 것이죠.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듯, 이렇게 대가를 치르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으로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첫 번째 말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는 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분명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분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지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신앙의 대가를 치르는... 그런 순수한 믿음을 가진 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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