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최후의 심판 (2)

믿음찬교회 0 197 2022.11.29 14:31
최후의 심판 (2)
계 19:17~20:15
2022.11.25.

이제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는 오늘 성경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앞서 19:11 말씀부터 최후의 심판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요한계시록은 엄청난 환상을 연속적으로 보여줍니다. 백마를 타신 분과 하늘의 군대, 죽음의 큰 잔치를 예고하는 천사, 최후의 전쟁과 짐승의 최후, 천년의 사탄의 결박과 천년의 성도의 왕 노릇, 다시 최후의 전쟁과 사탄의 최후, 최후의 법정과 생명책, 그리고 모든 것이 던져지는 불못...
이 내용을 영화로 말하면 정말 숨 막힐 듯 압도적으로 전개되는 클라이막스이고, 음악으로 말하면 정말 휘몰아치는 엄청난 템포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정독하고 제대로 읽는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압도당하는 느낌을 느끼게 됩니다.

본래 요한계시록에는 특별한 기법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각적으로 엄청난 장면을 이중 삼중으로 또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읽는 사람은 그 장면들을 시각적으로 잘 상상하지 못하고 압도당하게 됩니다.
그런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앞서 밧모 섬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러하고, 이제 하늘로부터 내려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런 여러 상상할 수 없는 현란한 장면들은 읽는 사람들의 시각과 상상력을 압도하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이와 같은 내용을 연구한 어떤 학자는 놀랍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기법은 일차적으로 사람의 눈이나 시각적 상상을 자극하지만, 그러나 그 궁극적 목적은 사실 귀를 자극하는 것이다.’ 즉 이런 엄청난 장면들은 결국 사람의 귀를 자극해서 마치 어떤 소리가 들리도록 의도한다는 것입니다. 그 학자의 견해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눈보다 귀를 자극하려고 할까요?
그 이유는 본래 사람의 뇌는 시각보다는 청각에 더 빨리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포영화를 볼 때도 소리를 제거하고 보면, 그렇게 무섭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무서운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즉각 긴장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요한계시록은 유난히 듣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22:17~18) 
이렇게 요한계시록은 듣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 귀에 환상과 말씀이 생생히  들리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늘 본문의 크고 현란한 장면들로 이루어진 최후의 심판 말씀은 우리 눈과 귀를 자극하고, 그 결과 우리에게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깊은 감정은 바로 두려움과 경외감입니다.
천년왕국을 중간에 두고 두 번의 심판을 기술한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사탄과 짐승의 심판을 한 번에 묘사하는 것은 단순하죠. 그런 단순한 글은 읽는 사람에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을 천년왕국을 두고 두 번 반복하면, 우리는 하나의 장면을 마치 두 개의 그림처럼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 안에 좀 더 두려움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죠.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최후의 심판 말씀이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이 말씀 앞에 조용히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마무리하시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드러나고 선악이 밝혀지고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날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큰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두려움보다는 경외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고 떨리는 경외감 속에 그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는 자의 그날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는 우리에게 최후 심판의 날은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 그날은 결산의 날입니다.
사람은 죽음에 가까워지면 자신의 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법입니다. 살 때는 잘 몰랐지만 돌아보면 너무나 짧은 생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나의 삶이란 선택과 결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작품임을 느끼게 됩니다.
인생이 무엇이냐? ... 인생이 뭔지 모르겠다는 노래가 많지만... 우리 인생이란 한마디로 그분 앞에 내어놓는 나의 작품입니다. 그날에 우리가 그분 앞에 가지고 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재물도 소용없고 경력도 소용없고, 그저 이 한 몸과 내 한 삶을 가지고 가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설명도 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이렇게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때는 힘이 들었고 이때는 너무 좋았고 이때는 이런 마음이었고 이때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설명을 듣는 하나님은, 아이가 하루종일 놀다가 집에 돌아와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를 듣는 부모님 같으실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도 있고, 어두운 이야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며 신실히 살아온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날은 두려운 결산의 날이지만, 믿는 우리에게 그날은 따뜻한 결산의 날입니다. 우리는 위로받고 눈물을 그치고 모든 수고를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따뜻한 그날을 바라보며 열심히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결산을 날을 기억히사고, 더 아름다운 삶과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그날은 회복의 날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립니다. 생명과 기대가 넘쳤던 유년시절과 분주하고 정신없는 중년시절과 하나씩 문이 닫히는 노년시절은 우리 인생의 미스터리입니다. 우리 인생의 국면은 너무나 다릅니다. 이렇게 변하고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 인생일까요? 우리는 그런 의문을 가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나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속에 모든 것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기억은 모든 것을 그날에 회복합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바로 보좌 앞에 펼쳐진 책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기억을 의미하는 은유와 상징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거기 담겨있고 우리의 생명도 거기에 담겨있습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그 책을 여시고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그냥 천국 가는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고 그때의 상처와 아픔도 회복하는 그런 온전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그 책을 펼치시고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을 슬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없다면 잃어버림은 잃어버림으로 끝나겠지만, 그날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십니다. 그러니 상실을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쉬움도 아쉽게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슬프고 괴로운 일이 많더라도 늘 믿음과 용기를 내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그날은 역전의 날입니다.
그래서 그날은 첫째가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이 첫째가 되는 날입니다. 불의한 높은 자와 성공한 악인은 어두움으로 내리시고, 정직한 가난한 자와 초라한 의인들은 영광의 자리로 올리십니다.
하나님은 작고 초라해도 진실한 마음으로 산 모든 이들을 높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따라 악한 모양으로 산 모든 이들은 하나님이 그 대가를 다 치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 대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유황불 붙는 불 못은 문자적인 장소는 아니죠. 거기 들어간다는 것도 육체적인 고통은 아닐 것입니다. 사탄은 영적인 존재이고 부활한 악인들도 영적인 몸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이 바깥 어두운 곳이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고 또 예비된 영원한 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 실체가 무엇인지 우린 상상할 순 없지만, 하나님이 사탄과 악인들을 그렇게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 역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우리 믿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한편으론 두려움이 되지만, 한편으론 소망이 됩니다. 그날은 결산의 날이고 회복의 날이고 역전의 날입니다.
아무쪼록 그날을 믿음으로 소망 가운데 바라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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