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유월절의 십자가

믿음찬교회 0 241 2022.07.12 19:35
유월절의 십자가
마 26:1~5
2022.07.10.

종말에 대한 긴 말씀을 마친 예수님은 문득 유월절을 언급하십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그리고 예수님은 이 유월절에 자신이 십자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얼핏 지나칠 수 있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중요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유월절을 처음으로 직접 연결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말할 때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유월절 양처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유월절 양 잡는 날에 돌아가셨을까요? 이것은 우연일까요? 혹은 예수님의 의도이자 하나님의 계획일까요?

표면적으로 그것은 우연처럼 보입니다. 그날 밤 예수님을 체포하고 그날 아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그들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호출로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였습니다. 그것은 정식 산헤드린 공회가 아닌 비상 회의였죠.
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죽일 날짜를 모색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유월절은 유대 3대 절기 중에서도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평소 인구가 약 3만 명 정도라면, 그때엔 그 5~6배의 사람이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예수님 출신 지역인 갈릴리 사람들도 많았죠. 그래서 대중적인 인기와 대중 지도자로서 잠재성을 가진 예수를 그런 명절에 체포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라고 의논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명절 기간 내내 예루살렘에 그냥 방치한다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 많은 지지자들이 모일 것이고, 예수의 명성은 더 높아질 것이고, 명절이 끝나면 예수는 예루살렘을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명절에는 하지 말자”라고 한 말은 지켜지지 못한 빈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틀 후 한밤중에 예수님을 전격적으로 체포하고 유월절 양 잡는 날, 즉 금요일에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어떤 분들은 “명절에는 하지 말자”라는 그들의 말은 실제로는 “명절 무리가 있는 곳에서는 하지 말자”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들은 말을 잘못한 것이 아니고, 단지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어쨌든 이번 기회에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그들이 정한 날에 체포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는데, 그날이 바로 유월절 양 잡는 날 즉 금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월절 양 잡는 날에 돌아가신 것은 표면적으로는 우연입니다. 그날은 그들이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이 선택된 것은 예수님의 의도이자 하나님의 계획인 줄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날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유월절 양처럼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유월절은 잘 알다시피,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가능하게 한 열 재앙의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 문에 바른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갔습니다. 바로는 그날 밤 자신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은 것을 알고 다음 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명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한 마디로 출애굽의 날이고 구원의 날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의 의미가 구원 하나만은 아닙니다.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 문에 바른 어린 양의 피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입니다.
어떤 언약일까요? 네, 하나님은 그들을 단지 애굽에서 구원하여 자유와 해방을 주시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신 후 언약을 맺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날 그 구원을 특별히 어린 양의 피를 통해 행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정식으로 언약을 맺으신 것은 나중에 시내산 앞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의 의미는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이미 유월절 안에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약의 유월절을 돌아보면, 유월절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구원과 언약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닌 유월절을 언급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이 그날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네,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유월절은 그 의미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 옛날 유월절을 계승한 새로운 유월절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새로운 출애굽과 새로운 구원을 이루고 그래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고, 나아가 자신의 피로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목적을 위해서 반드시 유월절에 유월절 어린 양으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기다리고 계셨고, 그날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돌아가시는 일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성취되어야 하는 영적인 일이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십자가는 새로운 유월절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의 새로운 구원과 새로운 언약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를 생각할 때, 대체로 그 의미를 구원 하나로만 이해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 받으셨지...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상징이야...’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유월절을 직접 연관 지으시는 오늘 말씀을 통해, 그분의 죽음과 십자가를 구원의 의미 하나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언약의 의미로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수 믿음과 신앙 생활은 구원을 넘어 언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출애굽하여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시내산 앞에서의 총회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 개념 안에 이 언약을 꼭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출애굽하고 하나님을 믿기로 한 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실이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후 형의 낯을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하란으로 가는 그 막막한 길에 해가 지고, 야곱은 한 곳에 이르러 돌베개를 베고 거기 누웠습니다. 그날 야곱의 꿈에 하나님께서 사닥다리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잠이 깬 야곱은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신이 베었던 돌을 가져다가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이렇게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28)
네, 야곱의 이 장면은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과 정식으로 언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시면, 저도 꼭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언약의 과정이나 모습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한 사람이 하나님께 정식으로 이제부터 하나님을 믿겠다는 마음을 드리는 모습만은 동일합니다.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그렇게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이끌어 하늘의 뭇별들을 보여주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기로 했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이 땅을 네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하나님의 그 약속에 보증을 요구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는 불타는 횃불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 아브람도 해야하겠죠. 나중에 아브람도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과의 그 언약 의식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 다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로 한다면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정식으로 이렇게 언약을 맺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교회들이 이런 부분을 잘 가르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과 정식으로 언약을 맺는 것이 있는데, 최근 우리의 구원론은 이런 것이 많이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냥 교회를 다니고 그냥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고, 조금 세상 사는 일이 바쁘고, 조금 마음에 상처 받는 일이 생기면 그만 신앙생활을 소홀히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를 떠나거나 아예 신앙생활을 그만두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에 두 권사님이 있었는데, 하루는 모임을 하다가 수박 그릇을 가운데 두는 문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두 분 앉은 자리 가운데 두지 않고 한 권사님이 자기 쪽에 그 그릇을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로 그만 마음이 상한 두 분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목사님이 찾아가도 소용이 없고, 그렇게 교회를 떠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 전 삶을 걸고 믿는 것이죠. 작은 일로 작은 문제로 신앙을 그만두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어쩌면 신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단지 오래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잘 알고 잘 믿어야 하죠. 하나님 믿는 것을 잘 모르니 그런 작은 일로 교회를 떠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구원을 생각하실 때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만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정식으로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도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나를 지켜주십시오’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명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언약 대로 신실히 여러분을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하나님을 정식으로 믿기로 하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굳건한 좋은 신앙이 될 것입니다.

오래 전 저도 야곱처럼 인생의 막막한 길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고 열심히 길을 걸어왔는데, 그만 길이 보이지 않는 어느 순간이 왔습니다.
물론 저는 모태신앙이고 한 번도 교회를 빠진 적이 없는 사람이었죠. 한 번은 겨울에 회사 선배와 설악산에 갔다가, 주일 예배 빠지는 것이 마음에 걸려 토요일 혼자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한 번은 지리산에 갔다가 토요일 버스 막차를 놓치게 되어, 주일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오후 청년예배에 간신히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 자신이었지만 제 속에는 제 인생을 제 생각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큰일을 하고 싶지 않고, 다만 저 혼자 실속 있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회사 생활 도중 저는 막다른 길에 부딪치고 하나님께 정식으로 기도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인도해주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래서 돌아보건대 저도 그 기도가 야곱의 기도와 같았습니다. 물론 이후 그것을 까맣게 잊고 많이 살았죠. 그러나 하나님께 정식으로 그런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을 믿은 사실은 언제나 제 안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시길 바랍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들 안에 순수한 부흥회가 많이 있을 때에, 목사님들은 그런 믿음의 초청을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하신 분들은 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아마 우리 유목사님과 이목사님께서도 예전 찬양집회 인도하실 때 그런 초청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런 초청이 많이 사라졌죠. 많이 아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하나님과의 언약은 누구의 권유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하나님과 맺어야 합니다. 영접기도를 따라하라고 해서 그저 따라하고, 앞으로 나오라 해서 그저 앞으로 나가고... 그렇게 수동적으로 하지 마시고,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서원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언약을 맺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약을 맺었다면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언약이 작동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신실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이상, 하나님도 언제나 내 곁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자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기계적으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려울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죠. 그러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 손길과 은혜로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제가 작은 꿈을 가지고 개척을 하였을 때 1년간 교인이 없었습니다. 그저 우리 가족끼리 예배를 드렸습니다. 네, 1년간 그렇게 했다면 답은 나온 것이죠. 실패이죠. 저는 실패를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간간이 돌렸던 전도지 때문에, 몇몇 그룹 홈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교회는 계속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하고 그 아이들하고 드리는 예배... 그 모습도 그렇게 희망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교회 개척은 안 되고 교인은 아이들밖에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저와 저희 가족이 평안했습니다. 우주나 주해도 아프지 않고 잘 자라고 저와 집사람도 별다른 어려운 점이 없었습니다. 돈이 별로 없었지만, 생활하는데 돈이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안 생기고, 파도가 없는 어떤 고요한 호수를 지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저희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저만의 생각이고 저만의 느낌일까... 그런 의심을 지금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어쩐지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길 같습니다. 그저 저의 작은 소견에 새로운 설교를 하고 새로운 교회를 하고 싶고... 참 부족한 신실함이지만, 하나님은 더 크신 신실함으로 보살펴주신 것이 아닌가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이 말씀하고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적인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한, 하나님은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한, 하나님은 나에게도 최선을 다 하십니다.
예전에 한때 신학적으로 언약신학이라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신학은 언약에 있어 하나님만을 살피고 우리를 살피지 않은 단점이 있었습니다. 언약은 쌍방적인 것인데,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강조하지 않은 채 하나님이 하시는 것만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신학은 잘못된 신학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신학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죽음과 유월절을 연결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십자가와 유월절을 연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월절의 의미가 담겨 있는 유월절의 십자가입니다.
유월절은 구원이자 언약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피로써 언약을 맺으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가 그런 십자가인 줄 알고, 그분의 구원을 받고 그분과 언약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 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깊이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열정적인 분이시고, 자신의 언약을 천대까지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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