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두 번째 종말 비유(열 처녀 비유)

믿음찬교회 0 334 2022.06.14 13:28
두 번째 종말 비유(열 처녀 비유)
마 25:1~13
2022.06.12.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 그런데 이 말씀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단순히 잠을 안 자는 것도 아니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깨어 있을 것인가?, 무엇이 깨어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 비유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기 일과 삶에 충실한 종을 말씀하셨습니다. 네, 그것이 깨어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자기 일과 삶을 버리고 다른 특별한 일을 하거나 다른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일수록 삶과 일상을 재발견하고 거기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열 처녀 비유입니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비유이죠. 비록 마태복음에만 나오지만, 예수님의 많은 비유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가 매우 중요하죠. 왜 중요합니까? 네, 그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열 처녀 비유는 왜 중요할까요? 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어떤 결정적인 내용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열 처녀들은 모두 다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다섯에게 그 문은 닫혔습니다.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닫힌 그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말씀입니까?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시고, 길 잃은 한 마리 양도 기꺼이 찾으시는 주님께서 어찌 이렇게 딱 끊으신단 말입니까? 트렌취라는 신학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어느 누구의 회개도, 어느 누구의 기도도, 어느 누구의 울부짖음도
    더 이상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우상 숭배한 아론을 받아들인 문, 간음하고 살인한 다윗을 받아들인 문,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받아들이고 그 문의 열쇠를 내어준 그 문은
    이제 닫힌다.
저도 순수하게 성경을 읽던 시절 이 부분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도대체 이 기름은 무엇일까?’ 강한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네, 이 비유를 진지하게 읽으시는 모든 분은 이 비유의 많은 내용 중에서 단 하나 ‘기름’에 주목하게 됩니다. 누가 읽더라도 그렇게 됩니다. 그것은 이 비유가 거기에 주목하도록 쓰였기 때문입니다.
기름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지점에서 계속 등장하고, 신랑의 등장을 가운데에 두고 기름과 관련된 원인과 결과가 뚜렷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를 가르는 기준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자격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기름’입니다.
그래서 내용으로 보나 구조로 보나,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기름’입니다.

기름 외에 다른 이야기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등은 무엇이냐 하는 내용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 처녀들이 다 같이 졸며 잤다는 내용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랑이 아주 늦게 왔다는 것을 말하는 이야기 요소일 뿐입니다. 다섯이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매정한 태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책임을 말하는 이야기 요소일 뿐입니다. 그리고 기름의 의미를 알게 되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기름은 나누어 줄 수 없는 기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중에 미련한 다섯이 기름을 산 장소를 말하는 분도 있는데,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이 비유의 울타리를 넘는 불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를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합니다. 풍유는 그런 것이죠. 모든 이야기 하나하나에 다 의미가 있다...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이고 신랑은 무엇이고 조는 것은 무엇이고 거절은 무엇이고... 이것은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는 방법입니다.
풍유를 다른 말로 하면 알레고리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이야기의 각 내용을 풍유적으로 즉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이런 해석을 또 다른 말로 영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영적 해석이라고 하면서 자기 감동대로 자기 임의로 함부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혼란을 낳고 결국 이단적인 가르침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풍유적으로 즉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비유를 간혹 풍유적으로 해석할 때도 있습니다.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이 직접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고 말씀할 때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오늘 비유의 ‘기름’과 같이 그것이 핵심 단어인 경우, 우리는 그 핵심 단어를 풍유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다른 내용은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직 그 핵심 단어만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오늘 이 비유의 핵심인 기름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루터는 기름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하고, 그래서 루터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를 하나님의 은총 없이 자신의 힘으로 봉사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기름을 믿음으로 말하고, 그래서 칼빈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를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밖에 많은 분들은 이 기름을 ‘성령’ 혹은 ‘사랑’ 혹은 ‘선한 행위’ 등으로 말했습니다.
네, 이 모든 해석은 다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름을 기독교의 핵심 내용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그것을 각각 은혜, 믿음, 사랑, 성령, 선한 행위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름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렇게 충분히 해석할 수 있고, 그리고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했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마태가 기록한 이 ‘기름’의 의미를 대략 이렇게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문제는 없지만, ‘과연 이렇게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는가?’ 하는 일말의 아쉬움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어떤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이 기름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분명한 의미를 마태는 성령의 도움으로 영감을 받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그것을 마태복음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름의 의미를 마태복음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안에는 이 기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열쇠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발전된 성경신학은 이 기름의 의미를 마태복음 안에서 거의 찾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학자들의 해석이고, 예수님이나 마태를 직접 만나 뵙고 물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현재까지 이 해석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구조적으로 보면 마태복음은 13장의 하나님 나라 비유 말씀을 중심으로 교차대구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나비의 두 날개처럼 그렇게 13장을 가운데 두고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안에는 예수님의 5개의 큰 설교들이 있죠. 그런 점에서 이 5개의 설교들도 마치 나비의 두 날개처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맨 처음에 산상수훈이 있고, 두 번째로 제자파송 설교가 있고, 세 번째로 한가운데에 천국비유 설교가 있고, 네 번째로 교회 공동체 설교가 있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종말론 설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를 중심에 두고 첫 번째와 다섯 번째가 짝이고 두 번째와 네 번째가 짝입니다. 두 번째와 네 번째는 우리가 안으로 공동체를 어떻게 이루고 또 밖으로 어떻게 전도하고 선교해야 하는지를 말한다는 점에서 짝이 됩니다.
첫 번째와 다섯 번째도 역시 짝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팔복’으로 시작하죠. 예수님의 종말론 설교는 ‘일곱 번의 화 있을진저’로 시작합니다. 산상수훈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종말론 설교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어떻게 이 마지막 때를 살아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예수님의 종말론 설교는 산상수훈과 짝을 이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름의 의미가 혹 산상수훈 안에 이미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말씀은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름에 해당하는 말씀이 산상수훈에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산상수훈 안에는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중에서 어떤 말씀에서 이 기름의 의미를 찾아야 할까요?
그런데 마태는 어쩌면 우리를 위해서 너무도 분명하게 그 단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데 혹시 아이가 못 찾을까 봐, 선생님이 너무도 찾기 쉬운 곳에 보물을 두는 것이죠.
그 결정적인 단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네, 이와 동일한 말씀이 산상수훈에 있습니다. “이르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0~23)
여기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 산상수훈의 말씀이 바로 오늘 비유에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신랑의 대답도 동일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은 그 다섯을 몰라서 모른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름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그 기름은 무엇입니까? 네, 바로 그들의 열매입니다. 이 부분 산상수훈 말씀은 그것을 열매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실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 ... 네, 이것이 바로 기름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태복음 전체가 바로 이 메시지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열매, 실천, 행위, 삶... 왜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는 비슷한 시기에 이와 같은 메시지를 말씀할까요? 네, 시대가 그 말씀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유대 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망하고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그 그럴듯한 신앙들은 다 거짓으로 판명났습니다. 율법에 모르는 것이 없고 구약을 줄줄 다 외우고 작은 율법 하나 가지고 며칠을 토론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성전에 있었지만 정치와 권력과 돈에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백성들은 그런 그들의 가르침을 무분별하게 따랐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무너지고 그들 모두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이유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그 옛날 바벨론에 망할 때 선지자들이 했던 것처럼, 그들도 그 이유를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새로 시작된 교회 안에서도 그런 반성의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한 그 귀한 믿음의 법이 일부 사람들에 의해 오해되고 남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믿으면 다 된다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우리는 다 구원 받는다더라, 우리는 다 예정되었다더라...’ 고린도교회도 방언 하나 하는 것 가지고 이미 구원 받았다고 믿고 무슨 일을 해도 괜찮고 바울도 필요 없다고 하는 무리가 생기고... 또 일부 신자들은 초기 영지주의로 넘어가 그노시스라고 하는 영적 지식을 소유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하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네, 여러분 그런 시기에 바로 이 마태복음 말씀이 나왔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크신 역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대가 어지럽고 하나님의 뜻이 어지러울 때에 하나님은 마태를 통해 바로 이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열매를 말하고, 삶을 말하고, 행위를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 믿음의 결정체로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결정체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 최종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정통 교리도 중요하고 정통 신학도 중요하고 정통 고백도 중요하고 의식도 중요하고 어느 교회냐 하는 것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그 사람의 삶과 행동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들으시죠. 우리의 눈물도 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과 눈물이 믿음이 되고 행동이 될 때, 최종적으로 우리를 인정하십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약속을 믿을 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 대한 약속을 믿을 때, 그 믿음을 다시 한 번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칠 때, 그 믿음을 최종적으로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이 내용은 각각 창세기와 로마서와 야고보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신 역사는 그의 생애와 삶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할 때에 이와 같은 내용을 말씀하는 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만 말하지, 그의 삶이 그 믿음을 어떻게 완성했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지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죄송하게도 아직 한국교회는 삶을 말하고 행위를 말하면 무척 부담스러워합니다. ‘행위 구원이 아니냐, 어떻게 우리 공로로 구원받는다 말인가?, 그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냐? ...’ 이렇게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오해할 필요가 없는 간단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위와 같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름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기름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행동들...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우리의 삶과 행동들... 비록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바치진 못한다해도, 각자 자신의 삶에서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애쓰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우리의 기름으로 여겨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셔야 합니다. 내 삶에서 그것을 어떻게 열매 맺을 것인가... 그런 고민과 실천이 기름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신앙이 되시길 바랍니다. 정직한 돈을 벌고, 올바른 편에 서고,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고, 남을 속이지 않고, 선한 말을 하고,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고, 하나님을 위해 돈을 사용하고 ...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비록 겉으로 하나님을 믿지만,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이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과 자기 감정을 따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은 기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믿음을 실천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실천과 행동이 바로 기름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이 다 그런 슬기로운 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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