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생명책, 구원의 확신, 예정론 (1)

믿음찬교회 0 421 2022.06.14 13:26
생명책, 구원의 확신, 예정론 (1)
계 13:8, 21:27
2022.06.10.

오늘 성경 말씀을 2절만 읽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 생명책에 대해 살펴보고 이것을 우리의 구원의 확신 및 예정론과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통틀어 생명책에 대한 성경 말씀은 모두 8번이 나옵니다.
구약에 1번 신약에 7번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 7번 중 6번은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있습니다.
1번 나온 구약 말씀을 찾아보면 시편 말씀입니다.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시69:28). 요한계시록 외 1번 나온 신약말씀도 찾아보면 빌립보서 말씀입니다. “...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
네, 말씀드린 이 두 말씀 외 나머지는 모두 요한계시록에 있습니다. 여섯 말씀밖에 안 되니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3:5)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13:8)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17:8)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20:12)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20:15)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1:27)
이상의 내용을 보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어느 성경보다도 생명책에 대해 많이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고, 그것을 그렇다고 설명하는 신학이 예정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당시 신자들에게 아주 강한 구원의 확신과 아주 강한 구원의 예정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구원의 확신과 예정을 말씀하는 대표적인 소재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어린양의 생명책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책에 참된 신자의 이름을 기록하시고, 또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치신다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인은 언제 신자에게 주어질까요?
살펴보면, 하나님의 인은 일곱 인 심판과 재앙 이전입니다. 그것은 곧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기 전이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 취임하신 후 일곱 인 심판과 재앙을 시행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인은 참된 신자에 부여되었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이름은 언제 기록될까요? 네, 그것은 바로 ‘창세 이후로’입니다. 원어 그대로 말하자면 ‘세상의 시작으로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세상의 시작, 즉 처음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인과 생명책에 대한 말씀은 고난 받는 신자들에게 매우 강한 능력과 확신을 주게 됩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은 왜 이런 강한 구원 예정과 확신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네, 그 이유와 배경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신앙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크고 작은 차별과 소외는 물론이고 투옥과 순교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미혹과 회유를 계속 받고, 믿음이 강한 자는 고난과 박해를 계속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구원의 확신과 예정이 없다면, 그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고난 받는 신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구원을 강하게 말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 종들의 이마에 이미 인을 치셨고, 그 이름을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해 놓으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이와 같은 강한 구원의 확신과 예정 사상을 당시의 상황과 별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볼 때, 당시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다음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1:4)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는 의미는 요한이 교회를 향해 ‘하나님이 너희를 인치시고, 너희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셨다’고 말씀한 의미와 동일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네, 당시 그 교회는 막 출생한 아기와 같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는데 사정이 있어서 그 아기를 직접 돌봐주지 못한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바울도 그때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를 통해 믿는 자들의 첫 교회가 생겼는데,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대와 훼방으로 그만 그 도시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 도시로 겨우 피하여 그 두고 온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며 이렇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말씀이나 데살로니가 말씀이나 그 안에 담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과 예정 사상은 단지 교리나 신학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당시 상황 속에 살아있는 뜨거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볼 때, 그와 같은 말씀과 상황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죠. 역사를 초월하고 시대를 초월하고 상황을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하는 영원성과 보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성과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말씀의 배경과 상황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뜻이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매일 공부만 하는 학생에게 좀 쉬고 놀아라고 한 말이 매일 노는 학생에게 그대로 전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학생은 더 노는 학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 배경과 상황을 생각하면서, 그 상황 속에서 말씀하신 보편적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당시 상황 속에서 말씀하신 요한계시록과 데살로니가전서의 구원의 확신과 예정은 참되고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참되고 유익한 구원의 확신과 예정이 그 상황과 분리되어, 이것이 별개의 교리나 신학이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회가 새신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종종 이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접기도만 하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내 느낌이나 생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원은 예정되어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성경의 상황과 분리된 이런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가르침은 오히려 신자들의 삶과 생활에 역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다운 삶은 없이, 구원의 확신만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복싱을 배우면서, 제대로 배우거나 연습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 챔피언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선수가 경기에 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다른 상황에서는 다른 말씀을 합니다. 로마서를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서에서 교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유대인 신자를 깔보던 이방인 신자를 향해 매우 엄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11:21~22)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부드럽게 말씀한 바울이 여기서는 매우 엄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도 보십시오. 당시는 교회들이 믿음이 약해지고 많은 신자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던 시기였습니다. 교회의 위기였죠. 그때 히브리서가 그런 배교하는 신자들을 향해 어떤 말씀을 했을까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6:4~8)

그러므로 성경은 언제나 똑같은 기계적인 구원의 확신과 예정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을 향해 구체적인 상황과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말씀을 선포하지, 고정된 교리나 죽은 말씀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칼빈주의 예정론이란 하나의 신학을 근거로 교리적인 구원의 확신과 예정을 말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칼빈주의 예정론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좋은 신학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생각하여 성경과 같은 수준으로 권위 있게 생각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것은 오래전 연구된 신학이고, 그간 신학 전반에는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발전이 있었다는 의미는 성경이 말하는 뜻에 보다 가까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성경이 말씀하는 올바른 예정론의 의미와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다음 주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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