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구원

믿음찬교회 0 279 2021.12.30 10:21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구원
마 19:13~26
2021.12.26.

마 19장과 20장의 의미는 제자들에 대한 재교육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가치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지난주 그 첫 번째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문자적인 율법과 말씀을 넘어 그분의 뜻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애쓰고 힘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깨달아 자연스럽게 30,60,100배의 결실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뜻으로 열매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성장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오늘은 이제 두 번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시고, 천국이 이런 어린아이의 것이라는 말씀은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18장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넘어가고, 부자청년과 나누신 말씀을 두 번째 내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부자 청년과의 대화...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구원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영생, 생명, 구원, 천국에 들어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
그리고 이 구원을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 사도바울의 말씀도 중요하고, 사도요한의 말씀도 중요하죠. 사도바울의 대표적 말씀은 엡2:8과 롬10:9~10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도요한의 대표적 말씀은 요한복음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마도 이 세 말씀이 우리가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익숙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말씀이나 요한의 말씀이나 다 하나님 말씀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히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당연히 더 중요하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과 부자청년의 본문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 다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세 복음서가 이 본문을 구원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이 마태복음은 바울서신 이후에 기록된 성경이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말씀했죠. 바울은 믿음의 의를 말씀했습니다. 그와 같은 사도바울의 가르침과 사역으로 교회는 유대교와 결별하고 율법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말씀은 당시 교회 속에 일부 오해를 불러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믿음만 강조되니 선한 삶이 약화되고... 물론 사도바울은 믿음을 그런 의미로 말씀한 것이 아니었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서신 이후에 나온 성경들은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는 믿음과 함께 우리의 선한 삶과 행위를 균형있게 말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태복음의 구원 말씀이 바울서신의 구원 말씀을 보완하는 귀한 말씀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과 부자청년의 대화는 구원의 거의 모든 용어가 등장하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세 복음서가 기록하고, 바울서신의 구원론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만약 구원이 궁금하다면, 우리가 맨 먼저 보아야 할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구원론에 대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시는 바와 같이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을 말할 때, 이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대화는 자주 외면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에베소서 말씀과 로마서 말씀과 요한복음 말씀이 주로 거론됩니다. 왜 이 말씀들이 예수님 말씀보다 자주 거론될까요?
네, 이유가 있죠. 이 세 말씀들은 우리에게 구원을 쉽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씀하고, 로마서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받는다고 말씀하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다 구원을 쉽게 말씀합니다. 여기에 더해 에베소서와 요한복음은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좋아할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이 말씀들은 대부분 새신자 교육이나 전도용 말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대화는 그리 주목 받고 있지 못합니다. 인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쉽게 간단히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성경 안에 있는 어쩐지 결이 다른 두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한 쪽은 그 문제를 쉽게 말씀하고, 한 쪽은 그 문제를 어렵게 말씀하고... 우리는 이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쉬운 말씀만 보고 어려운 말씀은 외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마태복음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우선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한 이 청년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의문을 품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죠. 율법을 지키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선민사상과 율법과 성전 등으로 인해 영생과 구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환경 속에서 이런 의문을 품었다는 것은 이 청년이 매우 진지하고 지적이고 영적인 호기심이 있고 건전한 비판의식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청년은 지금 자신이 가진 율법과 성전과 선민사상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은 우선 선한 분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말씀을 하시며 그 청년의 실수를 바로 잡으십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입니다.
그러자 청년이 질문합니다.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6가지 계명을 예를 드십니다. 이 6가지는 십계명 중 사람을 향한 계명 6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계명은 물론이고 사람을 향한 계명들을 우리가 잘 지켜야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네, 이것이 구원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계명과 말씀과 뜻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단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오해를 꼭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다 구원해주신다...’ 아직도 우리 교회 안에 이런 잘못된 구원론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또 모태신앙으로 자라고 신학을 공부하고 특히 구원론과 관련한 신학을 많이 살펴본 저의 말도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맞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결국 구원받는다는 그런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예정론도 그런 기계적 운명적 예정론이 아니고, 은혜의 의미도 그런 무조건적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목적은 계속 죄 짓고 계속 어쩔 수 없는 죄인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라고, 새 삶으로 나아오라고 계속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거나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에 들어가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지키는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도둑질 하는 사람은 도둑질 하지 않는 삶이 시작되어야 하고, 거짓말 하는 사람은 거짓말 하지 않는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계속 남의 것을 훔치고, 거짓말하고, 피해를 주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면... 아무리 주일마다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려도 구원은 아직 시작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뉴스에 보니까 일부 공무원 분들 중에 야근 수당을 받기 위해 밤에 다시 사무실에 가서 야근했다고 체크하고 오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계속 그런 생활이 있다고 한다면 구원은 시작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기준을 가지고 재산과 지위와 힘과 권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생활과 태도를 아무런 죄의식없이 계속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비록 크리스천이라도 아직 구원은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판사나 검사나 변호사가 하나님을 믿기는 믿어도 양심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고, 늘 돈과 정치와 권력에 따라 판결하고 기소하고 변호한다면, 그런 사람도 구원 받기는 어렵습니다.
기자도 마찬가지이죠. 사실과 진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돈에 따라 기사를 쓰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교묘한 기사를 계속 쓴다면, 그런 분은 아무리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구원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과 뜻을 지키려고 해야 구원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시자 부자청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 아직도 뭔가 부족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의 두 번째 단계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계명을 흠없이 지킨다고 우리의 구원이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대체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준수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죠. 이 부자청년뿐만 아니라 상당수 유대인들이 그런 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회심하기전 바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과거의 자신을 말하면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 하노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4~6)
바울은 정통 유대인으로 율법을 잘 지키고 율법의 의에 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올바른 의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도바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는 우리의 구원이 온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온전해지는가? 네 우리는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죠. 정확히 살펴보면 마태복음은 “네 소유들을 팔아”, 마가복음은 “네가 가지고 있는 만큼 팔아”, 누가복음은 “네가 가지고 있는 만큼 모두를 팔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만약 이 말씀의 의미가 글자 그대로이고, 이것이 부자 청년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 필수 조건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해야 구원 받을 수 있겠죠.
그러나 이후 제자들과 교회가 다 이렇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교회 역사를 다 살펴보아도, 이렇게 하나님을 믿은 교회와 신자들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말씀은 그 부자 청년에게만 요구하신 특수한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런 특수성과 함께 우리 모두를 향한 보편성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 있는 우리 모두의 구원을 향한 보편적인 말씀이 있다는 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네, 22절과 23절과 24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고 돌아간 후, 제자들과 그 청년에 대해 추가로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여기서 22절에 재물이란 단어가 나오고, 23절과 24절엔 부자 즉 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재물과 부...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네, 이것은 바로 두 주인의 문제를 말하는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은, 네가 단지 하나님의 계명을 네 힘으로 잘 지키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너의 삶의 궁극적 주인이 바뀌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삶과 인생의 주인이 바뀌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인은 둘 중 하나입니다. 자기 자신이거나 자기 재물이거나... 이 둘 중의 하나이죠. 또 이 둘은 서로 놀랍게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중심 속에 돈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계명을 잘 지킨다고 해도, 결국 자기 중심 속에 돈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돌짝 밭에 떨어진 씨 같이,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 같이... 싹이 나오긴 나오지만 결국은 뿌리가 없어 마르고 가시가 자라 그 성장을 막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돈을 주인으로 삼고 돈의 아들과 딸들이 되지 않으려면, 돈을 잘 써야 합니다. 돈을 벌 수 있으면 많이 버십시오. 정당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으면 그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돈을 섬기거나 거기에 매이지 마시고, 그럴려면 돈을 잘 써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부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잘써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필요를 잘 채우고, 동시에 돈을 잘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을 돈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잘 삼는 것이 구원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세 번째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그리고 나를 따르라”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주님을 계속 따름으로써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그런 구원론은 버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구원에 이르도록 견인하신다는 말씀은 맞는 말씀이지만, 우리 역시 그분을 계속해서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구원은 우리 안에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마침내 이루어질 일입니다. 이 구원의 3가지 시제는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받아 가고 있고, 앞으로 받을 것입니다. 이 3가지 시제를 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구원은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씨가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그런 과정과 시간과 함께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영접기도 한 번으로 끝나고, 구원의 확신 한 번으로 끝나고, 어떤 구원의 진리를 한 번 깨닫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으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고 자라가야 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제자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구원에 대한 재교육을 다시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구원의 말씀을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둘째로, 우리 마음과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특히 돈과 재물을 조심해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을 모시고 말씀을 지키면서 계속해서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저는 이 세가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가장 좋은 가르침이라 믿습니다. 칼빈의 5대 교리 보다도, 예정론과 선택교리 보다도... 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저는 저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이렇게 구원에 이르도록 이끌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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