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다섯 번째 인

믿음찬교회 0 141 2021.12.22 16:42
다섯 번째 인
계 6:9~11
2021.12.17

우리는 지난 주 일곱 인 심판과 재앙 중에서 처음 4개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린 양이 두루마리의 처음 4개의 인을 떼시자 4명의 말 탄 자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내리죠. 이로 인해 이 땅은 전쟁과 박해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와 전염병과 각종 사망이 역사하는 종말론적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이 땅이 그런 종말론적인 세상임을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문득문득 세상을 돌아보면 지금 이 시대가 그런 종말의 시대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코로나 팬데믹, 위중증 환자와 사망자, 경제적 어려움과 금융 위기, 가짜 뉴스와 정치 혼란, 불의와 불법, 심각한 양극화 현상...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4명의 말 탄 자들이 역사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이 이와 같은 종말의 시대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이 종말의 시대인줄 알고는 있죠. 그러나 진짜 마지막 때라는 강한 경각심과 이해는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교회의 메시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대체로 교회의 메시지는 개인 삶에서의 축복과 승리를 말하고 교회 중심적인 개인 신앙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시대를 보여주고 이 시대 속에 깨어 있도록 하는 예언자적 메시지 보다는, 대체로 개인적이고 교회중심적인 목회적 메시지가 대부분입니다. 목회자들 중에도 요한계시록 말씀을 깊이 있게 보고, 그 말씀을 강조하는 목회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많은 목회자나 신자들이 대체로 이렇게 안일한 이유 중 하나는 요한계시록 말씀에 대한 일종의 편견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를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최후 종말의 마지막 때만을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종말이긴 하지만 아직 최후의 종말은 아니고, 우리는 이미 구원 받았는데 괜히 불안한 말씀을 말할 필요 없고, 다만 최후의 7년 대환난 같은 그런 특별한 것만 주의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요한계시록은 웬만한 목회자들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은 요한계시록 말씀을 깊이 읽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보지 못하니, 지금의 시대를 종말로 시대로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말씀을 보면, 우리는 지금 시작된 종말 속에 처해 있고 지금 이 세상은 네 말 탄 자들이 역사하는 세상입니다. 그들은 검과 흉년과 전염병과 땅의 짐승들로써 사람들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세계는 위태롭고 사회는 불안하고 절망적이고... 그래서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또 영적으로 희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나마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권력을 따라가면 어려움을 줄일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의 인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것을 본성적으로 거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과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지금이 박해의 시대라면 우리는 많은 피를 흘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4개의 인이 떼어졌고, 이제 예수님은 다섯 번 째 인을 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일곱 심판과 재앙 속에 숨겨져 있는 한 가지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그 특징은 요한계시록의 이 일곱 심판과 재앙은 앞의 4개와 뒤의 3개로 잘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요한계시록의 일곱 심판과 재앙은 모두 3번 나오죠.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그런데 이 일곱 시리즈는 다 앞의 4개와 뒤의 3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소위 4와 3의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네, 그것은 앞의 4개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을 보여주고, 뒤의 3개는 그것이 하늘과 영적인 차원으로 확대되는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일곱 인에서 앞에는 네 말 탄 자가 등장하고 뒤에는 하늘의 제단과 우주적 대변화와 일곱 천사가 등장합니다. 일곱나팔에서도 네 번째까지 그 재앙은 땅과 바다와 강과 해에 임하는데, 다섯 번째부터 그 재앙은 무저갱의 문이 열리고 결박된 네 천사가 놓이고 일곱 번째 나팔에는 마침내 하늘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일곱 대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이 다섯 번째 인을 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과 재앙은 땅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영적인 차원에서도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역사가 같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다섯 째 인을 떼자, 하늘의 제단이 보이고 그 아래에 죽임을 당한 많은 신자들의 영혼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영혼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어느 때에 세상의 악과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시려 하나이까?”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흰 옷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 수가 차기까지 아직 잠시 기다리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다섯 번 째 인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 위로의 말씀이지만, 또한 이것은 믿는 자의 고난과 희생은 아직 계속 될 것이라는 의미라는 사실입니다. 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위로와 인내를 동시에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임 당한 신자들의 수가 차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신앙 속에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난과 희생... 우리는 그런 신앙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잘 되려고만 하는 신자가 아니라, 예수 믿어서 어려움과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 저는 한 기독교 언론사에 올라온 기사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기사의 제목은 두 종류의 목사였는데, 두 명의 목사를 비교하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한 분은 신학생 시절 분당의 한 대형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 교회는 교역자들에 대한 대우가 좋기로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사례비는 평균의 두 배였고 학비도 100%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사역한 교회는 당시 분당에 새로운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설 때, 모든 교역자들이 매주 토요일 축호전도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루는 토요일 전도를 마치고 교회버스를 타고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그 곳 상가에 있는 여러 작은 교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우리 같은 큰 교회가 이렇게 대형버스로 전도를 하면 저 작은 교회들은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생각이 떠나지 않고 양심에 자꾸 걸리고 그래서 그분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그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나중에 그분은 일본 오키나와의 한 작은 교회를 맡아 섬기는 선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분당에 그 대형교회의 담임목회자를 형님으로 모시며 그 교회를 벤치마킹한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또 다른 중요한 롤 모델은 조용기 목사였고 그렇게 그분은 교회를 크게 키워나갔습니다. 큰 교회를 성공적으로 건축했고 그분은 이제 두 번이나 국가조찬기도회의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평소 대형교회를 대기업에 비유하면서 나라 발전에 대기업이 중요하듯이 대형교회가 중요하다고 늘 강조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교회는 동탄 신도시 개발이 한창일 때 동탄에 진출하려고 거기에 기도처소를 마련했죠. 그런데 이에 대해 그 지역 교회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그분은 말하기를, 우리의 적은 이슬람이지 같은 교회가 아니라면서 우군끼리 정당한 경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분에겐 다른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닌가... 또  교회가 세상의 방식인 경쟁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문을 낳게 되죠. 아무튼 그 기사는 그렇게 두 명의 목회자를 소개하고 비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는 기독교 역사에는 이렇게 분명히 다른 길을 걷는 두 종류의 목사가 있다고 하면서 글을 맺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대형교회의 전도 방식을 고민하다가 사임한 그 목사님의 선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분은 세상적인 방식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작은 이유 때문에 편안한 자리를 포기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죠. 
대개 전도사 시절은 가난하기 때문에 한 푼이 아쉬운데, 그분은 그 결정으로 학비며 사례비며 여러모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목회의 길이 많이 좁아졌겠죠. 그래서일본 오키나와의 한 작은 교회로 가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종말의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 그 목사님과 같이 신앙양심을 지키려는 사람은 불이익과 손해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은 이와 같은 사실을 계속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어려움이 있다, 고난이 있다, 불이익이 있다, 손해가 있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 그 수가 차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요한계시록의 이 어려운 말씀을 믿음으로 잘 받아들시는 신자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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