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인과 4 말 탄 자 2
계 6:1~8
2021.12.10.
두 번째 인을 떼니 붉은 말이 등장합니다. 이 붉은 말을 탄 자가 일으키는 것도 전쟁인데, 특히 내전의 성격이 강합니다. 4절에서 “~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라는 부분이 그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 흰 말을 탄 자가 일으키는 것이 외부 정복 전쟁이라면, 두 번째 붉은 말을 탄 자가 일으키는 것은 내부 전쟁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말세에는 한 나라 안에 내부 갈등과 민족 갈등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붉은 말을 탄자는 4절에 “~ 또 큰 칼을 받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칼’이란 헬라어 ‘마카이라’인데, 이것은 통치 권력을 상징하는 말로, 신약성경에서 믿는 자에 대한 박해 및 정치적 억압을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말의 국제적 분쟁과 내부 분쟁 속에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여러모로 억압과 박해를 받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잘못된 국가 권력에 반대하고 동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 번째 인을 떼니 검은 말이 등장합니다. 이 검은 말을 탄 자는 손에 저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고, 밀 한 되는 한 사람의 하루 식량입니다. 보리 석 되는 한 사람의 3일치 식량이든지 혹은 한 가정의 하루치 식량입니다. 그러므로 이 검은 말 탄 자가 상징하는 것은 기근과 심각한 경제적인 어려움입니다. 이러한 경제적인 어려움은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죠.
여러분, 한 가장이 하루 종일 일해서 밀 한 되나 보리 석 되 값을 받아 집에 온다면 그 가족의 경제 사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살 것도 많고 다른 지출도 많은데, 겨우 하루치 식량 밖에 못 사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가격은 당시 가격보다 8배에서 16배 비싼 가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올리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필수품이 아닌 사치품이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이 기근이 상대적으로 부자에게는 영향을 덜 준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반면에 그것을 일반적인 가정의 필수품으로 이해하면, 이 기근은 그래도 극심한 기근이나 극심한 경제적 위기까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아무튼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말세의 중대한 어려움 중 하나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체적으로 양식과 생필품이 부족한 위기가 오기도 하고, 또는 어떤 사람은 잘 살지만 어떤 사람은 매우 가난한, 소위 경제 양극화와 차별이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우리는 이와 같은 다양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근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가혹할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국가권력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한층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그래도 근근이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끼니를 거르고 자식들을 굶기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때에 더욱 힘들게 됩니다. 한 마디로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되는 것이죠. 여기서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생활도 어렵고, 여러가지 차별과 불이익과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우리 믿는 자들은 신앙의 박해뿐만 아니라 가난과 경제적 어려움이 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사업하고 정직하게 사회생활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 교회 안에 이와 같은 가난과 경제적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신자가 얼마나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복과 부와 성공과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는 신자들이 교회 안에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이 세 번째 검은 말을 탄 자의 환난과 시험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네 번째 인을 떼니 청황색 말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이 청황색 말을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고 음부가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네 번째 인에서 사망과 음부는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받아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사람들을 죽이게 됩니다.
한편, 이 8절에서 사망이란 말이 두 번 언급되는 것이 좀 이상하죠? 본래 사망이란 헬라어 단어 싸나토스는 일반적 의미와 구체적 의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 의미는 사망이고, 구체적 의미는 전염병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여기서 첫 번째 사망은 일반적 의미로, 두 번째 사망은 구체적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석하면, 이 8절 말씀은 사망과 음부가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받아 검(전쟁, 롬파이어)과 흉년과 전염병과 땅의 짐승들(잔인한 권력자)로써 사람들을 죽인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검과 흉년과 전염병은 이미 앞의 흰 말과 붉은 말과 검은 말에서 나온 심판과 재앙이라 할 수 있죠. 그리고 이 청황색말에서는 땅의 짐승들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이 네 번째 청황색 말 탄 자가 앞의 모든 심판과 재앙을 합친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 네 번째 말 탄 자가 종말의 모든 재앙과 환난의 궁극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청황색 말 탄 자의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망과 음부가 최후의 심판 때 마귀와 짐승과 함께 불 못에 던져진다는 말씀을 고려하면, 이 사망이란 이름은 사탄적 뉘앙스를 가졌고 그러므로 이 자는 결국 사탄 및 사탄의 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쟁과 정치적 혼란과 기근과 경제적 어려움과 박해와 전염병과 악한 권력자 등 모든 종말의 재앙과 환난의 배후에 궁극적으로 사탄의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한편,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 사탄의 세력이 다만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래도 그 어려움이 부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종말의 때란 견딜만한 심각한 어려움이 계속되는 시간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 최후의 대환난이 닥쳐올 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종말의 때는 이와 같습니다. 최후의 대환난 문제는 다음에 한 번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네 명의 말 탄자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해석은 매우 다양하지만, 제가 방금 말씀 드린 해석이 가장 일반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 그러면 우리는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종말의 심판과 환난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종말의 세상엔 이와 같은 어려움과 혼란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전쟁과 정치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 등 많은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늘 일어나는 것이 종말의 세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종말의 시대를 담담히 이해해야 합니다. 나의 일반적 삶이든 신앙적 삶이든 힘들고 불행한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왜 이런 불행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내게 닥치는 거지?’... 이렇게 혼란스러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는 풍랑이는 어두운 바다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그 이유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종말의 시간을 하나님을 믿고 지혜롭게 헤쳐 나가느냐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셨죠. 너희는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시대 속에 현명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용당하지 말고 속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상처받지 말고 혼란스러워하지 말고 지혜롭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고 더 씩씩하고 용기있게 잘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는 종말의 심판과 환난을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이 말씀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인 네 말 탄 자는 종말의 세상에 심판과 재앙을 내리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허락과 어린 양의 통제 하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양이 인을 떼심으로 그들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종말의 세상이지만,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알고 믿음과 평안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1세기 당시 세상은 절망적인 종말의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60년의 대지진, 64년의 로마 대화재 및 네로의 박해, 79년의 베수비오 화산 폭발, 92년의 재앙에 가까운 곡물파동 등... 광범위한 재앙들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부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는지, 하나님이 세상을 궁극적으로 통치하시는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의 혼란과 교회의 시련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 말씀이 그때 흔들리던 많은 신자들을 붙잡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말씀을 잃고 흔들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탄과 악한 영들이 믿는 자들을 계속 흔듭니다. 아무쪼록 어려움과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여러분들 되시길 빕니다.
세 번째, 우리는 이 종말의 어려움과 환란을 믿음의 단련과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종말의 어려움과 환란은 본래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에겐 심판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믿음의 단련과 성숙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의 믿음이 이 종말의 때에 단련되고 성숙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은 우리가 예수 믿어서 갑자기 올라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현실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예비되고 준비되어서, 그래서 마침내 그 나라에 영광스럽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어려운 세상 속에 우리를 두시는 이유는 우리 믿음을 진정한 믿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어려운 상황 속에 놓이지 않으면, 진정으로 발전되고 성숙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종말의 어려움과 환란 속에 두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종말의 힘든 시간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시련과 어려움들을 나쁘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실은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긍정입니다. 단순히 내가 하나님 믿고 잘 될 거라 믿는 것은 잘못된 긍정이지만, 어려움과 환란 속에서 내 믿음이 자라고 온전해지리라 믿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긍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네 말 탄 자의 심판과 재앙을 통해, 더욱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