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 하나
마 18:5~14
2021.11.28.
우리는 지금 마 18장 말씀, 즉 교회 공동체를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로, “너희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이것은 “어린 아이처럼 착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가 서로 어린 아이같이 낮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교회 생활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후에 사도들도 교회 생활을 동일하게 가르치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0~16) 이렇게 서로 종노릇하고 서로 돌아보고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고 사도들이 가르친 교회 공동체 생활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마디로 어떤 곳인가... 네, 어린 아이 같은 낮은 자들의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음 말씀으로 넘어가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작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에서 ‘작은 자’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이 말씀은 세부적으로 3가지 내용입니다.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일, 작은 자 하나를 업신여기는 일, 작은 하나를 잃어버리는 일... 예수님은 이 내용을 차례대로 말씀하십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로 길게 살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쉽고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기독교 공동체는 작은 자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바로 이것입니다.
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교회로 모이는 이유는 천국 가기 위한 것도 있지만, 여기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 그 새로운 세상은 우리가 서로 낮아질 때 그리고 우리가 작은 자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길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거창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리더일 때, 계급과 차별과 죄와 불의가 가득한 세상 가운데에서 약하고 작은 사람을 더 존중하고 아껴주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공동체를 만들면,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공동체에 임하고,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은 그렇지 못한 공동체를 점점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공동체는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교회 공동체는 성화를 이루어 가는 구원의 공동체가 되지 못합니다. 교회가 성화를 이루어 가는 구원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면,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제 중요한 일은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잘 실천하느냐입니다. 교회가 선교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고 여러 사역들도 중요하죠. 그런데 교회가 사역하느라 일하느라 작은 자 한 사람을 소홀히 하면, 내적인 본질에 큰 금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실천해야 하겠는데, 그럴려면 우리가 단순히 이 말씀에 동감하고 은혜를 받는 정도에 그쳐선 안 됩니다. 단순히 이 말씀에 동감하고 은혜를 받아, 가끔씩 이따금씩 그런 실천을 하는 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한번씩 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지속적으로 그렇게 살고 지속적으로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하고 작은 사람을 섬기고 존중하는 것을 우리의 기본 의식과 철학과 가치관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죠. 우리는 세상이라는 환경 속에서 매일 큰 것을 쫓고 능력을 원하고 높은 것을 추구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런 세상의 방식에 저항하지 않으면, 따라가게 되고 젖어가게 됩니다. 강한 것은 좋은 것이고 약한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하고 작은 것을 부정하고 정죄하고 무시하는 마음이나 가치관이 내 안에 없는지 그것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자에 대한 사랑, 작은 일에 대한 헌신,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한 마음... 이렇게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눈과 마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좋아하시고 저도 좋아하는 가수 중에 어느 분이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름 모를 꽃,
아득한 별 빛,
작은 돌 하나 소중했었던 우리...
그 날은 어디로 갔을까?”
그분의 또 다른 노래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옵니다.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이와 같은 이분의 노래를 들으면, 우리는 사느라 정처없고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위해서 또 우리 제자도를 위해서 또 우리 교회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말씀하시는 줄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작은 것과 작은 자에 대한 소중한 마음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의 것입니다. 몇 번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무한하시고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작은 지성소 그룹의 날개 끝 한 지점에 임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베들레헴 마굿간 낮고 천한 구유에 기꺼이 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아시고 우리 형편을 헤아리시는 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면, 우리도 그분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죠. 크기만 하고 능력만 큰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닙니다. 크기만 하고 능력만 큰 사람은 진정으로 큰 사람이 아닙니다. 작은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이 참된 신이시고, 자신을 지극히 낮출 수 있는 사람이 진정 큰 사람입니다.
저는 신학을 조금 늦게 했는데, 신학교에서 좋은 선생님을 몇 분 만났습니다. 특히 신약학을 가르친 교수님 한 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많은 내용을 강의를 통해 가르쳐주셨고, 미숙한 질문을 해도 잘 대답해주셨고, 설교도 참 자연스러우셨고, 인격도 훌륭하셨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아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학교를 다니던 학생이고 또 선을 잘 못 넘는 사람이어서, 학생으로서 교수님과 개인적으로 교제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날은 시험이 다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숙사에서 짐을 챙겨 트렁크를 끌고 정문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이라 학교 정문에 역과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마련되어 있어서 그것을 타려고 가고 있었죠.
그런데 어디서 자꾸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또 누구를 부르는 소리인지... 이리저리 둘러보니까, 그 교수님이 차를 멈추고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이면 같이 타고 가요...” 강의 시간에 몇 번 눈을 맞추진 것이 전부인데, 울퉁불퉁 보도블럭 위로 트렁크를 끌고 가는 저를 보고 그렇게 차를 세우고 말을 건네신 것입니다.
저는 감사하지만 학교 버스 타면 된다고 말씀드리고 방학 잘 보내시라고 인사드렸습니다. 가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잠시 남다른 감정을 느꼈습니다. ‘날 잘 모르실텐데... 그리고 그냥 차를 몰고 가시면 되는데... 왜 일부러 굳이 차를 세우고 태워주려고 하셨을까?’
그런데 사실 그분이 평소에도 그런 모습을 보이곤 하셨습니다. 교수와 학생이라는 선이 따로 없이 학생들을 대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 못하는 학생 차별하지 않고, 미숙한 질문에도 친절하게 대답해주시고, 강의 준비도 훌륭하시고... 인상적인 교수님이셨습니다. 학교 내 교수 사회에서 더 큰 지위와 영향력을 가지려 하지 않고 수업과 연구에 정말 충실하셨죠.
저는 이전까지 교회와 기독교 사회 속에서 그런 분을 그리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교회에도 선교단체에도 수많은 선이 있고 차이가 있고 미묘한 계급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교회의 전도사였는데, 전도사는 그야말로 전도사이고 목사를 돕는 보조에 불과했습니다. 담임 목사님과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났지만, 목사와 전도사 사이에 얼마나 큰 선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날 차를 태워주겠다고 한 그 교수님의 행동이 무척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네, 단순한 친절이 아니죠. 자신보다 작은 자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전해졌을 때, 왜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독교를 열렬히 받아들였을까요? 유교의 한계, 유학의 무능력... 그런 것도 있었지만 기독교는 양반과 종을 차별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고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고난과 아픔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가난하고 힘 없는 일반 백성들이 예수님을 많이 믿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작은 자들과 낮은 자들을 품어 주는 넉넉한 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우리 민족의 회복과 부활에 대해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발전을 하고 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크게 성장한 많은 교회들이 서울 한가운데에 큰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죠.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맘 편히 갈 수 있는 교회가 아니라면, 그곳이 좋은 교회일까?’ ‘예수님이 처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그런 교회일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교회는 일단 오면, 마음이 편해야 합니다. 또 다른 나의 안식처이자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고 차별이 없고 경쟁이 없고 방어기제가 필요 없고 뭘 해야 하는 것이 필요 없는... 그냥 있으면 되고 조용히 기도하면 되고 그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되면 됩니다.
아 그러면 교회 일은 누가 하고 교회 사역은 누가 합니까? ... 네, 장로님들이 하시고 제가 하고 우리 권사님들이 하는 거죠. 먼저 믿은 분들이 헌신하고, 은혜 받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자라고 우리 처음 믿는 분들이 자라면, 나중에 다 함께 동참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남다른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신줄 믿고 그런 공동체를 만들고 그런 공동체 속에 배우면, 우리의 시각과 가치관이 바뀔 줄 믿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바뀌면 가족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그런 우리의 믿음과 가치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집마다 작은 자들이 있죠. 저희 집에도 그런 작은 자가 있습니다. 말만 거창하고 허당이고 손은 제일 많이 가고... 바로 저희 아들 우주입니다. 세상을 살아본 아버지 입장으로 우주를 보면, 참 한숨이 절로 나오죠. 아직도 철이 없고 제 일을 못 찾고 아버지가 목사인데 교회도 안 나오고 말이죠. 자기 나이를 생각하고 자기 나이에 맞는 생활을 생각하면 낙제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루는 화도 내고 정신교육도 시켰다가, 하루는 불쌍히 여기고 용돈도 주었다가... 하루는 빨간 불 하루는 파란 불... 지금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해보니까, 어쩌면 우리 집에서 작은 자는 우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못 났죠, 말도 잘 안 듣고...
그런데 제가 전통적인 아버지로서 우주에게 계속 화를 내고 업신여기고 험한 말을 하고 압박을 하면, 그래서 상처를 주고 실족하게 하면, 그것은 ‘제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의미이죠. 못 일어날 정도로 심하게 넘어지는 것이 실족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래 부모가 자녀에게 본의아니게 그런 일을 하곤 합니다. 야곱도 그런 잘못을 했죠. 야곱 가족의 불행은 아버지 책임이 큽니다. 요셉을 편애해서 다른 자녀들을 많이 실족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통해 제 자신을 돌아보고, 우주를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이 우리 집에 세우신 작은 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원리와 좀 맞지 않습니다. 약하고 무능력하고 하찮은 사람은 도태되는 것이 세상 원리이죠. 세상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 하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정상적인 양들을 두고 그 하나를 찾으러 길을 나서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쉽게 이해 되지 않지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떤 의미가 희미하게 느껴집니다. 영화 라이언일병 구하기를 볼 때도 그런 느낌이 있죠. 라이언 일병 한 명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다 희생되는 것이 계산상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영화야 하고 일어나지 않고, 거기에 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작은 자 한 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한 명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것은 손해이고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세상은 빛을 보고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일은 세상적으로 볼 때, 뭔가 이익이 되고 득이 되는 일은 아닙니다. 축복 받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네, 그것은 세상을 조용히 밝히는 일이고 거룩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은밀하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작은 자 하나에는 이와 같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지 않으면, 이 말씀의 중요성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일의 중요성은 세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의 의미와 소중함과 중요성은 비밀처럼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후 25장에서 “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뭔가를 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그렇게 하시면 예수님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말씀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상선약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노자가 한 말이죠. 최고의 도는 물과 같다는 말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낮은 곳으로 흘러가 큰 바다를 이룹니다. 우리도 그렇게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갈 뿐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도는 물과 같습니다.
작은 자를 위하는 우리의 선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의식을 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교회 봉사를 하고 교회 청소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휴지를 줍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기도를 하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남을 이롭게 하고 작은 자를 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거나 나팔을 불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이 그렇게 살라고 하셨으니까 한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삶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면 좋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