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세 반세겔의 감사
마 17:22~27
2021.11.07.
추수감사절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그 해의 첫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드린 날에서 출발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는 11월 넷째주일에 지키고 우리나라에서는 한 주 빠른 11월 셋째주일에 지킵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을 11월 셋째주일로 지키는 것은 아무래도 늦은 감이 있고 또 교회력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지금은 많은 교단이나 교회가 조금 자유롭게 날짜를 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오늘 추수감사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구약 3대 절기의 하나인 수장절이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과 같은 구약 절기는 신약에서 꼭 따를 필요가 없지만, 한 해의 추수와 한 해의 감사를 하나님께 정하여 드리는 일은 우리가 계속 지켜갈 귀한 신앙 전통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감사제목과 감사예물을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주보에 실리지 않은 우리의 모든 감사제목도 하나님께 올려진 줄 믿습니다.
대개 추수감사예배 때는 감사를 주제로 설교 본문을 따로 정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오늘 순서의 마태복음 본문에 감사의 의미가 담뿍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이어서 설교할 수 있어서 더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인데, 이 사건 안에 어떤 감사의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시고, 또 그 직후 있었던 제자들의 믿음 실패 사건도 지나고,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자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내용을 두 번째로 예고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이제 두 번째로 들으니 그 충격은 현실이 되고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이제 이런 두렵고 불안하고 근심스런 분위기 가운데 오늘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자, 예수님과 제자들을 잘 알고 있던 성전세 거두는 사람이 와서 성전세를 요구하였습니다.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유대 성인들은 매년 반 세겔의 성전세를 의무적으로 내야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 시대부터 내려온 매우 오랜된 전통으로,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는 회막을 위하여 생명의 속전으로 1년에 반 세겔을 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반세겔은 2 데나리온 즉 이틀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나중에 성전이 세워지자, 이 반 세겔은 성전을 위하여 드리는 성전세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성전세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신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그렇게 들어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먼저 이렇게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그리고 예수님은 성전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왕의 아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 맞는 말씀이죠. 왕의 아들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죠. 이것이 성전세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입니다. 비록 처음에 그것은 회막과 성전의 필요를 위하여 제정되었지만, 지금은 성전 제도가 정착되어 십일조나 헌물 등 다른 많은 재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게 별도로 계속 거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율법과 전통을 어떻게 보시는지 그 기본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해내려온 율법과 전통을 그대로 지키는 분이 아니라, 그 의미와 취지와 본질을 아시고 그 본질에 맞게 지키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네, 성경말씀이든 무슨 전통이든 무슨 규정이든 본질에 맞게 현실에 맞게 지키는 것이 좋은 것이죠. 무조건 지키고 기계적으로 지키고 전통이니까 지키고... 그런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살펴보면 이런 점을 사도바울이 매우 잘 이어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음행 외에는 이혼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혼사유를 음행 하나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혼사유를 하나 더 추가하여, 신앙의 이유로 이혼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얼핏보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이 허용한 것을 넘는 월권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사도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예수님이 왜 음행 외에는 이혼이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지 그 취지와 목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약자 보호와 가정 보호... 즉 바울은 예수님께서 당시 남자 중심 시대에 남자들이 함부로 이혼하고 자기 부인을 내쫓는 것을 막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세계에서 한 배우자는 새롭게 예수를 믿고 한 배우자는 안 믿는 상황에서 불신 배우자가 신앙 문제로 이혼을 요구할 때, 약자인 믿는 배우자의 구원과 안전을 위해 이혼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바울의 월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취지를 따르는 바울의 올바른 적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세계에서 예수님의 뜻을 잘 적용하는 훌륭한 사도였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전통을 답습하며 고루하게 지켰죠. 그들은 성인은 성전세를 율법 규정대로 반드시 1년에 한 번 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참고로 당시 사두개인들은 성전세를 자유롭게 내면 된다고 말했고, 쿰란 공동체는 평생 한 번만 내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엇갈리는 가르침 속에 예수님은 성전세를 이제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매우 개혁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알게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지키는 것이 아니라, 뜻과 취지와 본질을 알아서 잘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기독교는 발전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전세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율법 규정이지만 한시적인 의미이고 지금은 폐지가 옳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사건은 이렇게 해서 성전세를 안 내는 것으로 끝날 것 같은데,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두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한 반전은 그러나 그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내라는 것이고, 또 다른 반전은 그 성전세를 낚시를 하여 물고기를 잡아 그 입에 있는 것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전세를 주라는 말씀은 우리가 쉽게 이해가 갑니다. 성전세 내는 문제를 가지고 그 사람들과 그렇게 다툴 필요가 없죠. 안 내는 것이 맞지만 율법에 대한 그들의 완고한 이해를 생각한다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낼 수 있습니다. 네, 이것은 우리가 잘 이해 됩니다.
그런데 그 성전세를 낚시를 던져 그 물고기 입에 있는 돈으로 내라고 하신 것은 쉽게 이해가 안 갑니다. 왜 굳이 그렇게 하시는지... 왜 굳이 기적을 사용하시는지... 이 기적은 과연 실현되었는지... 그리고 이 기적이 실현되었다면 왜 그 실현에 대해 생략하는지... 참 많은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둘러싼 여러 의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왜 그렇게 행하셨는지... 그 이유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과시하거나 남발하시지 않는 분이신데, 왜 그러셨을까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성전세를 예수님과 제자들의 돈으로 내지 않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안 내는 것이 옳지만, 내기 위해 다른 제3의 돈으로 내는 것이죠. 그래서 이 기적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기적의 실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기적은 상징적인 언급일 뿐 실제적인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의 목적은 마태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성전세의 부적절함에 대해 교훈을 주려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성전세를 요구하는 관리에게 직접 하셨다면, 이 말씀은 그들의 잘못된 요구를 상징적인 말씀으로 무력화시키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들이 아닌,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거부하기 위해 베드로에게 이렇게 상징적인 말씀을 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에게 성전세는 옳지 않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실제적인 의미로 말씀하셨고, 그래서 베드로는 실제로 고기를 잡으러 갔고, 그래서 실제로 동전을 입에 문 고기를 잡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작은 기적을 못 믿을 이유는 없죠. 한편 마태가 이 기적의 실현과 성전세를 납부한 뒷이야기를 생략한 것은 아마도 이 사건을 독자들에게 더 각인시키려는 문학적 의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기적의 의미를 옳지 않은 성전세를 납부하기 위한 제3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기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네, 저는 이 기적의 의미는 베드로 개인을 위한 예수님의 위로이자 격려라고 믿습니다. 이 기적은 베드로를 위한 개인적인 기적입니다. 그래서 그런 개인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이 기적은 복음서 안에서 한 번만 나오는 특수 기적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을 제자로서 거의 3년간 따라다녔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입니다. 그 동안에 수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놀랍고 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근의 일련의 일들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임을 당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따르는 베드로에게 허탈과 좌절과 혼란을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되고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베드로는 두렵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고민을 하며 지금 공교롭게도 가버나움 자기 집에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 오면 대체로 베드로의 집에 머물곤 했죠. 그래서 지금 베드로는 자기 집에서, 과거 예수님을 모르고 그저 고기만 잡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일은 물질적으로 아무 소득이 없는 일입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고 암울하기만 합니다. 성전세를 받으러 온 사람에게 ‘내신다’라고 짧게 말하고 들어오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제자들의 마음과 어두운 얼굴을 모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과 분위기는 우리같은 일반 범인도 알 수 있죠.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집으로 들어서는 베드로에게서 그와 같은 모습을 보신 것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지금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성전세를 내냐 안 내냐 성전세가 맞냐 안 맞냐 하는 신학적인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금 같은 성전세... 그 가치와 적절성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지금 베드로와 이야기를 나누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먼저 말을 거십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비록 마음이 무겁고 어두운 베드로지만, 예수님의 이와 같은 부드러운 말씀에 베드로의 마음 문이 열리게 된 것 같습니다. “타인에게 입니다.” 베드로는 잠시 고민을 잊고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 마음을 아시고 우리 마음의 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도 이와 같은 인상적인 대화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음행 중에 잡혀온 여인이 부끄러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입을 닫고 있을 때, 그 여인의 입을 여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한없는 부드러운 말씀이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부드럽게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고 이런 모습 하나를 닮는 것이 예수 믿는 행동입니다.
이 예수님의 질문은 그 여인이 유일하게 대답할 수 있고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텐데, 예수님은 그 여인과 대화하시고 그 여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주님의 모습을 깊이 본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의 그와 같은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 예수님은 성전세에 대해 짧은 말씀을 해주시고 이어서 베드로를 위하여 한 작은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저는 이 기적의 의미가 베드로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현재 대부분의 주석들은 이 기적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 적당한 설명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석들은 성전세에 대하여 설명하고 반 세겔에 대하여 설명하고 물고기 입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고대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이 기적의 실제성에 대하여 논하지만, 그러나 이 기적이 사실이라면 왜 주님께서 이 기적을 행하셨는지... 그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네, 그것은 이 사건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개인 사건이고, 이 기적도 개인 기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오고 간 그날의 마음과 생각들을 학문이나 신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갈릴리에 가서 그 물고기를 잡았을 때, 베드로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아마 갈 때까지는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그 물고기를 잡는 순간... 베드로는 이 작은 기적을 자기를 위하여 베풀어주신 의미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초라한 현실, 두려운 앞날... 그런 마음에 휩싸인 자신을 아시고 위로하시고 일으키시기위해 이 기적을 베푸셨구나...’ 그렇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시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이 작은 기적을 통해서 말이죠. 그래서 이 기적의 의미는 사랑과 격려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입니다.
옛말에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리가 담긴 말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끝까지 주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주님께서 자신을 알아주시는 이와 같은 작은 빛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헤치고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감사하는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이 감사할까요? 다른 모든 것들도 다 감사하지만, 그러나 최고의 감사는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나를 알아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것...’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형편과 사정, 마음의 생각과 작은 떨림까지 아시는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달은 또 다른 사람은 다윗입니다. 시편 139편은 제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1~6)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너무도 작은 우리를 살피시고 아신다는 이 지식은 너무 기이한 지식입니다.
아무쪼록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는 모든 날 동안, 여러분을 알아주시고 언제나 이 반 세겔의 기적으로 함께 하여 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