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빌라델비아 교회의 고난과 승리

믿음찬교회 0 301 2021.10.11 10:50
빌라델비아 교회의 고난과 승리
계 3:7~13
2021.10.08.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같이 칭찬을 받은 귀한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교회였는데, 서머나 교회 만큼 심한 박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유대인들의 비방과 거짓 고소에 시달리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또 그들 앞에 큰 열린 문을 두신 분으로 나타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이사야 22:22 말씀을 가리킵니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이 이사야 말씀을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자신들의 상황은 다 닫혔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에 번성했던 유대인들은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을 자신들의 지역 회당에서 출교하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시당국에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계속 고소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닫힌 상황 속에 이 작은 빌라델비아 교회는 좌절감과 절망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이 교회는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 앞에 신실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이 교회가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과 계속 싸웠다는 의미입니다. 공동체는 작고 자신들의 능력은 작았지만, 낙심과 싸우고 좌절과 싸우며 그들은 교회로서 계속 존재했습니다. 매우 신실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거룩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나타나 주셨습니다. 여기서 진실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거룩하고 신실한 교회에 나타나신 거룩하고 신실하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은 이 귀한 교회에 다윗의 열쇠와 열린 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칭찬과 복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도 작은 교회이고, 저도 별 능력이 없는 작은 목사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 앞에도 닫힌 상황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형편과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러분과 제가 늘 신실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영적인 열린 문을 통해 다윗의 집, 즉 하나님의 나라로 계속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몇 가지 증거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비방하고 괴롭히던 유대인들 가운데 몇 사람을 교회로 나아와 회심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영적으로 굴복시키고, 누가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인지 누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지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증거이죠. 예수님은 신실한 교회와 성도에게 이렇게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로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려운 길과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그 증거를 보며 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와 같은 은혜와 복을 많이 받으시기를 빕니다.

두 번째는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우선 이 말씀과 관련한 몇 가지 오해를 살펴보겠습니다. 일부 학자나 목회자 가운데 이 말씀을 근거로 환난 전 휴거를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로 세대주의 해석을 따르는 분들이죠. 그분들은 신실한 신자들이 소위 7년 대환난을 겪지 않고 예수님의 공중재림 때에 휴거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휴거나 공중재림이나 7년 대환난은 성경적 근거가 부족한 문자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휴거와 공중재림은 요한계시록에는 나오지 않고 데살로니가전서 4:17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입니다. 여기서 ‘끌어 올려’를 한자말로 휴거(끌 휴, 들어 올릴 거)라고 표현한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계 12:5에 한 번 나오지만, 그러나 그 말씀은 휴거를 말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휴거와 공중재림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데살로니가전서만의 특별한 내용이죠.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떤 의미로 이 말씀을 한 걸까요?
간단히 말씀 드리면, 그 말씀은 왕으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설명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당시 한 나라의 임금이나 황제가 행차를 하면, 그곳의 총독이나 분봉왕은 자신의 성에서 왕을 맞이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왕이 오는 길에 나가서 그 왕을 맞이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그렇게 맞이한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과거 성경해석이 미흡한 시기에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또 요한계시록과 무리하게 연결하여 휴거와 공중재림이란 내용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7년 대환난이란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7년이란 기간도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이고, 최후의 대환난이란 것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시작된 종말과 그에 따른 보편적인 환난을 말하고 있지, 7년 대환란을 따로 특별히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신 ‘시험의 때의 면제’라는 말씀을 휴거나 7년 대환난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최후의 대환난이란 그 시험의 때를 면제 받고, 그 시험을 전혀 당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는 우리에게 특별한 대환난이 따로 있다고 말씀하지 않고, 또 우리가 종말의 환란과 어려움을 면제 받는다고 말씀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면하게 하신다’는 말씀도 바르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헬라어 ‘테레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면제하다, 제외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켜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17:15(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에 나오는 것처럼 영적으로 보호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성경도 이 단어를 keep으로 번역하고 있죠.
따라서 이 계3:10 말씀은 우리를 종말의 시험과 유혹으로부터 영적으로 지켜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신실하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그렇게 지켜주시죠. 헬라어 ‘테레오’는 그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인내의 승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서머나 교회의 승리가 죽음의 승리 혹은 패배의 승리라고 한다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승리는 인내의 승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 속에서 인내하고 견디는 그 자체가 승리라는 말씀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그건 승리가 아니죠. 박해하는 자들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작고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굳게 견디는 그와 같은 모습을 승리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어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고 격려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참 독특합니다. 왜냐하면 그날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따로 없고, 놀랍게도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직접 성전이 되시죠. 
그러므로 이 약속의 말씀은 성전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믿는 자들의 최종적인 구원의 은총과 복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빌라델비아교회의 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인내가 곧 승리입니다. 견디는 것이 곧 승리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승리는 화려하고 위대한 승리가  아닙니다. 초라해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 힘든 하루를 보내도 절망하지 않는 것, 아무리 어려워도 도망가거나 주님을 원망하지 않는 것... 그것이 승리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안으시며 “너는 승리자야!” 라고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저는 언제 한 번 설교를 하다가 감정이 북받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함석헌 선생이 자신의 친구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였습니다. 그 친구는 말이 없는 친구였는데, 일제 강점기 말 그 혹독한 시절 변절이 난무하던 시절 대학 공부를 마치고 조용히 자기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사람들을 일깨우는 지역신문을 만들고 또 가난한 학생 몇 명을 모아 가르쳤습니다. 그런 뜻 깊은 일도 잠시, 얼마 후 그분은 병으로 쓸쓸히 돌아가셨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그 소식을 한참 후에 듣고 눈시울을 적시게 되죠.
여러분, 솔직히 그분의 노력이 무슨 결실을 맺었을까요? 그분이 자기 돈을 털어 지역신문을 발행하고 가난한 학생 몇 명을 가르친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일이 과연 무슨 결과를 낳았을까요? 아마 사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삶은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함석헌 선생을 울리고 작은 글로써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그 사람을 분명히 귀하게 보실 것입니다. 그 어려운 시기 암울한 자리에서 남모르는 훌륭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닫힌 문들 앞에 놓인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그들의 승리는 인내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여러분들은 모든 힘든 상황을 인내로 승리하는 승리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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