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삶과 죽음
마 16:24~28
2021.10.10.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매우 어려운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부인을 해야 한다는 것... 매우 어려운 말씀이죠.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따름이 없는 일반적인 신앙, 자기 부인이 없고 자기 십자가가 없는 신앙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저는 이번에 지난번 잠깐 말씀드린 오징어 게임을 다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는 줄거리만 대략 보았는데, 이번에는 다 보았죠. 그리고 보면서 그 드라마를 제작한 감독과 작가가 기독교에 대해 의외로 속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말히죠. 목사의 딸인 지영이라는 인물과 한 기도하는 아저씨를 통해서 말이죠.
이 기도 아저씨는 게임에 들어가기 전 열심히 기도를 하고, 게임에서 이기고 살아남으면 또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게임을 이기게 해 준 사람에게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감사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장면에서는 우리가 살기 위해 저쪽 사람들을 죽이자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합니다. 감독과 작가는 이 사람을, 하나님을 열심히 믿지만 오로지 게임에 이기고 살아남기 위한 이기적인 인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한편 목사의 딸인 지영은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고 결국 아버지를 죽인 인물로 나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기독교를 싫어합니다. 그 기도 아저씨가 게임에 이기고 감사 기도를 하자, 왜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우릴 살려준 사람에게는 고맙다고 안하냐면서 따지죠.
그런데 그런 지영은 네 번째 구슬치기 게임에서 자기 목숨을 게임 상대방인 새벽에게 순순히 양보합니다. 그 게임은 두 명이서 한 명은 살고 한 명은 죽는 게임인데, 지영은 새벽에게 자신은 여기서 나갈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일부러 게임을 집니다. 오징어게임 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죠. 지영의 그와 같은 자기 희생은 오늘 말씀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감독과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기독교를 혐오하는 이 지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가장 기독교다운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어떤 기독교 매체에서는 오징어 게임이 반기독교 코드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저는 감독과 작가가 그런 의도를 가졌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감독과 작가가 말하는 이와 같은 내용엔 동의합니다. 즉 지영이가 가장 기독교적인 인물입니다.
‘나보다 네가 살아야 돼’ 라고 말하는 사람, 그런 마음과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계속 강조하는 것은 그런 힘든 자리로 여러분을 억지로 이끌어 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숨과 재산과 권리와 행복을 다 포기하고 극단적으로 예수님을 따르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런 마음과 정신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그런 크고 작은 특별한 순간이 오면, 기꺼이 우리 것을 내려놓는 사람이 되자는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라는 기독교의 근본 믿음을 가진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이 다음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25절 말씀 역시 문제적 구절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이미 우리가 압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씀 안에 이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죠.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 말씀의 직접적인 의미가 아니라, 배경적인 의미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님은 삶과 죽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시는가... 예수님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시면서 죽음을 말씀하시는가... 이런 배경적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어느날 죽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번은 꼭 우리가 그 문을 홀로 지나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몸의 부활을 믿죠. 그래서인지 우리 기독교는 죽음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은 그냥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치고 곧바로 부활과 천국으로 얼른 넘어가는 것이죠.
그러나 주님의 재림이 우리 사는 동안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시 죽음에 대해 말해야 할 줄 믿습니다. 더구나 최근 우리의 믿음은 상당히 세속화 되고 있기 때문에, 예전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사춘기가 되면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산다는 것도 생각해보고 죽는다는 것도 생각해 봅니다. 그 예민한 시기가 지나면 인생의 봄날 속에 한동안 죽음을 떠올리지 않는데, 가끔 사람에 따라 문득 죽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가장 행복한 순간... 문득 죽음의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가 아기를 바라보며 너무 행복하고 소중한 순간... 문득 갑자기 내가 없으면 누가 이 아이를 지켜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마 많은 분들은 삶의 가장 힘든 순간 죽음을 생각할 것입니다. 살아갈 힘을 다 빼앗기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몸이 나이 들고 병들 때 우리는 결국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동쪽 울타리 밑 국화를 따 드니, 유연히 남산이 눈에 들어오네”(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 이와 같은 도연명의 시의 한 소절처럼 우리는 죽음이 자연히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외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 사람이 많습니다. 갑자기 그 순간을 맞는다면 너무 두렵고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가 많든 적든 건강이 좋든 나쁜든...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인지 최근 죽음에 대한 강의나 강연등이 제법 많습니다. 불교쪽에서도 이야기를 하고, 의사 분들도 이야기를 하고, 교수 분들도 이야기를 하고... 임사체험이 어떻고 웰다잉이 어떻고... 제가 다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유익한 내용이 많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우리가 정말 듣고 싶은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다른 분들은 다 죽음을 겉으로 보고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본질적으로 보고 아시는 분이시니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이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누가복음 23:43 말씀이 있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누가복음 23:43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곧 강도도 죽고 예수님도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낙원’이 아니라, ‘나와 함께’입니다. 그 낙원이 어떤 곳이고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죽으면 ‘그분과 함께 있게 된다’고 하시는 이 말씀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도바울도 그와 같은 고백을 빌립보서에서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데, 자신이 설령 이 감옥에서 나가지 못하고 처형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 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빌1:22) 자신은 개인적으론 지금 죽는 것이 좋지만 주님의 일을 생각하면 사는 것이 좋은데, 그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 바울은 자신이 사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죽음에 대해 말하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네, 예수님이 그 강도에게 하신 말씀과 동일하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바울의 말씀이 이 점에 있어서 같습니다. 믿는 자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네,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 몸은 죽지만 우리 영혼은 살아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의미일까요? 네,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영혼불멸이나 영혼만 따로 살아있게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이나 동서양의 전통적인 관념이죠. 성경은 항상 우리 인간 존재를 몸과 영혼이 하나된 모습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으면 우리 영혼만 살아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잠들게 됩니다. 몸은 죽고 우리 영혼은 주님 안에서 잠듭니다. 최후의 그날 부활의 소망을 기다리면서 말이죠. 우리는 그런 상태로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잔다거나 쉰다거나 주님과 함께 있다거나... 이 모든 말씀은 다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들은 우리의 죽음 이후의 모습을 설명하는 가장 최선의 표현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임종을 맞으면, 우리는 부활의 그날까지 주님 안에서 평안히 쉬고 잠들게 됩니다. 우리 위에 주님의 영이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 믿는 신자가 죽으면,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죽음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말씀은 비록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알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죽음이란 끝이다’입니다. 의식이 소멸되고, 몸의 순환이 정지되고, 그 사람의 시간이 마침내 멈추는 것이죠. 장례를 치르고 나면 이제 정말 그는 없고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죽음은 끝이다’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그런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은 정말 끝이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나고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다시 그것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네, 죽음은 중간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중간과정일 뿐이고, 죽음 후에 진정한 최후의 과정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것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진정한 최후와 끝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최후인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것과 같이, 그 진정한 끝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자리가 우리의 최후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 사람들처럼 죽음을 끝이라고 믿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 아무리 답답하고 힘드시더라도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혹시 실수를 하고 죄를 짓고 나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죽음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죽으면 되지만, 죽음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해결책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살아야 합니다. 살려고 하면 살 수 있고 살아집니다. 혹 잘못을 하고 부끄럽다 하더라도 용기를 내어 살아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죽음을 미화하거나 해결책으로 말하는 것은 세상의 소리이고 사탄의 미혹입니다.
생명은 어디까지나 ‘살아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명령을 무시하고 내 임의로 살고 미완성으로 중간에 그만 두는 것은 일생의 실수가 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서 거기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죽음이 마지막이고 끝이고 최후의 해결책이다’ 라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마시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사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나아가 죽음은 끝이 아니므로, 우리의 죽음이나 가까운 이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고 심판 후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같은 몸을 다시 받게 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너무 슬퍼하거나 쓸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의 장례식은 조용한 슬픔과 애도는 있을지언정, 통곡과 애곡은 없어야 합니다.
또한 나의 억울한 죽음이나 벗지못한 누명이나 이루지 못한 여한이 있다하더라도, 그 해결되지 못한 것들을 슬퍼하거나 답답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죽음이 곧 나의 패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그날에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아시고 나의 의로움을 아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비록 나의 죽음이 초라하고 쓸쓸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 슬프고 어두운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이 아닌 줄 믿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엔 죽음을 앞둔 사도바울의 초라함과 쓸씀함이 배어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바울은 자신이 제단에 올려진 희생제물 같다고 지금 표현합니다. 제물 위에는 포도주가 부어집니다. 이제 곧 제물은 불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도바울의 고백은 결코 쓸쓸하거나 어둡지 않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고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
바울은 이런 힘찬 믿음의 고백 속에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고백도 이와 같은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믿음과 신앙은 이렇게 죽음을 초월합니다. 죽음을 초월하지 못하는 신앙은 깊은 참된 신앙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불교는 비록 인간적인 종교이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 있죠. 생과 사를 하나로 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하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더더욱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은 한 아이의 짧은 하루와 같습니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와 하루종일 노는 시간이 우리 인생입니다. 친구들도 만나고 재미있는 놀이도 하고... 누구를 따라 시장에 가보고 신기한 경험도 하고... 그러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다 날이 저물고 황혼이 들고 집으로 갈 시간이 오죠. 그래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신자의 죽음은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말이죠. 하루의 삶을 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를 하나님은 품에 따뜻하게 안아주실 것입니다. 신자의 죽음은 이렇게 따뜻한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 하나님과 주님의 품에 다 안기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