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마 16:21~24
2021.09.26.
훌륭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이어진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은 그 모임 현장을 들뜨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메시아이신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조된 분위기는 한순간에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고난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삼일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고난과 죽음이란 말에만 온통 마음이 쏠렸죠.
베드로가 제일 격한 반응을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외람되게도 예수님을 붙들고 꾸짖듯이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이런 말이죠. “그런 부정적인 말씀이나 나약한 생각 하지 마세요. 절대 그럴 리 없을 겁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나... 지금 예수님께서 부정적이고 나약하고 두려운 생각을 하신다고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매우 엄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조금 전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시고 반석이라 하셨는데, 지금은 너무 참담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그 잘못된 생각을 가리키는 엄한 말씀입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공격이란 영적으로 미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예수 따름과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이고, 또 십자가는 무엇인지... 이것은 우리 신앙의 원형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10장에 이미 나온 말씀이고 우리가 그때 살펴보았죠. 그러나 확실한 이해를 위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분일까요? 따라야 하는 분일까요? 말을 바꾸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일까요? 따르는 것일까요?
네, 물론 성경 안에는 이 두 내용이 다 있습니다. 대체로 복음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말씀하고, 바울서신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말씀하죠. 한편 일반서신이나 히브리서나 요한계시록은 또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 안에는 믿는 것과 따르는 것... 이 두 가지가 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와 신앙현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바울과 바울서신에 많이 치우쳐있습니다. 소위 바울 중심의 신앙과 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 이유를 몇 가지만 말한다면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빈의 영향, 조직신학을 중요시한 그동안의 신학 흐름, 또 복음주의의 강세... 이런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이해하기를, 신앙이란 ‘우리가 그분을 믿는 것이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그렇게 믿는 것으로 이해하면, 장소를 구별하고 제단을 만들고 신의 형상을 두고 촛불을 켜고 경배를 하는 ... 그런 모습을 은연중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잘 합니다.
그러나 그간 성경신학이 발전하고, 바울서신에서 복음서로 중심이 옮겨오고, 또 단순한 복음주의를 반성하면서... 우리 신앙의 본 모습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복음서는 언제나 우리 신앙의 모습을 그분을 따르는 것으로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여주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을 보여주고, 또 그 제자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무엇보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죠. 그러면서 우리가 필히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비록 단순한 일이지만, 이 둘 사이에 작은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을 믿는 것이냐 따르는 것이냐... 그 둘 다 맞다면 그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 반 반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무엇을 앞에 두고 무엇을 뒤에 둘 것이냐...
네, 저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앞에 두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좋은 신앙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그분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그분을 믿으니까 나는 그분을 따르고 있어...’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그분을 따르고 있으니까 나는 그분을 믿고 있어...’ 이렇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간단한 정리이지만, 우리가 이렇게 신앙을 정리하면 우리 신앙이 많이 달라질 줄 믿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잘 믿는 것이 아닌, 우리의 전 생활에서 주님을 따르는 폭넓은 믿음이 될 줄 믿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혹 이 말씀을 지금 읽는 분 중에 이런 생각을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안 따를 수도 있는가?’ ‘안 따르고도 천국을 갈 수 있는가?’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10:3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그래서 이 점에 있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 따르지 않고는 우리의 구원과 새 생명이 시작 될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의 그 주인공처럼 우리는 장차 무너질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고 구원을 받으려면 따라야 하는데...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단순히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큰 조건 2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첫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우리 마음대로 살고 싶죠. 한도 많고 꿈도 많은 내 인생... 하고 싶은 것이 많죠. 이 풀도 먹고 싶고 저 풀도 먹고 싶고 언덕에도 올라갔다가 물가에도 갔다가 박치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시니까 할 수 없이 그분을 따라가야 하죠.
그런데 이렇게 따라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예수님은 정말 큰 조건 하나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말씀은 죽을 각오를 하고 따르라는 말씀인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굉장한 의문과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그래도 살아보려고 그러는 것인데,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놀랍게도 죽음을 이야기하시기 때문입니다. 축복과 천국과 구원을 말해도 잘 따를려고 하지 않는데, 죽음을 말하면 과연 누가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놀라운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든지, 아니면 우리의 목숨을 요구하는 놀라운 사기꾼이든지... 그런데 예수님이 사기꾼이 아닌 것은 자신이 그 길을 직접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또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늘의 놀라운 진리를 말씀하는 분이든지, 아니면 자신도 죽고 제자들도 죽음으로 몰고가는 지옥의 파멸적인 분이든지...
실제 그런 인물이 있었죠. 짐 존스의 인민사원 사건... 1978년 짐 존스는 남미 가이아나에서 자신을 따르는 신자 918명과 집단 자살하였습니다. 본래 미국에 있던 사교단체였는데, 미 당국의 규제가 강화되자 남미로 옮겨갔습니다. 짐 존스는 오랜 기간 그들을 약하게 만들고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고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결국 자기도 죽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 포도주 잔에는 독이 들어있다. 나를 따라 이 잔을 마실 수 있는가?...” 그런데 실제론 거기에 독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잔을 마시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죠. 그러자 짐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살아있는 여러분들을 본다. 나는 여러분들이 살고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 그는 진짜로 거기에 독을 넣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모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은 정말 그런 분이신가... 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지 않으면, 그런 결단과 자세로 나서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오징어 게임이라는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은 일단의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6개의 게임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최후의 한 사람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게임을 하는 동안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드라마가 이 세상의 어떤 진면목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이 게임 속의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경쟁하고 죽고 죽이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이 세상의 영적인 진면목을 이해한다면, 그런 사람만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다. 무너져가고 죽어가는 이 세상에서 탈출하려면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해야 할 줄 믿습니다.
자기 십자가라는 의미는 희생이나 헌신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그런 결단과 각오로 죄에서 벗어나고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바꾸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달리 진짜 우리의 목숨을 거는 일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많은 신자들이 실제로 순교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원리는 비슷합니다. 지금 세상은 우리를 부와 물질과 번영과 자기 욕망과 권력과 힘과 거짓과 불의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죽을 각오를 하고 그것을 거부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세상을 따르는 이 세상 시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 둘... 우리 손에 불의한 흔적들이 남고 우리 삶에 피가 흐르고 죄의 결과들이 쌓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다 예수님을 따르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자기를 부인하고”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받아들이고, 십자가를 각오하는 것도 받아들이고... 그런데 아직 하나가 더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이란 우리의 자기 중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연적 본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은 다 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단순히 죽음을 각오하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 부인을 요구하실까요?
자기 부인과 십자가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자기 부인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자기 부인이 없는 단순한 십자가... 즉 단순히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자기 부인을 해야 하는가? ... 그 이유는 이 자기 부인이 우리의 새창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창조물은 본래 자기 중심이 있는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1차 창조에 불과합니다. 그 창조는 아직 창조의 완성이 아닙니다. 2차 창조, 즉 하나님의 새창조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와 같은 창조의 계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겨우 인간 모습만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존재로 올라가야 비로소 창조는 완성되고 인간 완성이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그분 안에서 새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인간만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세계와 피조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19~22) 이렇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새창조와 창조의 완성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이루어져야 하나님의 창조는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기적인 자기 중심 DNA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기적인 자기 중심을 그냥 둘 수 있을까요? 네, 반드시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온전케 승화되는 것이죠. 우리 인간의 주체성을 가지면서 하나님께 온전히 경배하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 완성입니다.
이기적인 자기 중심... 그런 교만한 자기 중심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죄입니다. 아담의 원죄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담과 하와가 되어 그 원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원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기회만 되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인간의 악한 본성... 우리는 우리 존재 안에 있는 그 악한 본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그와 같은 자기 부인과 함께 시작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내 존재와 내 신념과 내 확신이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할수록 내가 작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수록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기 중심이 강화되고 자기 능력이 커지고 자기 존재가 높아지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왜 과거 한국교회 안에 크게 유행했던 은사주의와 성령사역들이 지금 잠잠해졌을까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사역은 자기를 강화하고 높이는 잘못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그 사역자들은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자기 부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기도와 사역으로 따르는 사람들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그것은 세상 능력자와 무당의 모습이지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제가 그런 사역을 하시는 한 분을 전도사 시절 픽업한 일이 있었습니다. 도착해서 제가 차문을 열어드리고 그분의 가방을 들어드렸죠. 그분은 간단한 목례나 고맙다는 말도 없이 내리시고, 앞장 서서 교회로 들어가셨습니다. 한 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없지만, 대체로 은사주의와 성령사역자들에게선 그런 모습들이 많이 나타났고 그래서 지금 그 사역들은 잠잠해졌습니다. 물론 그들의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도 가짜가 많았고, 침체되는 한국교회에 아무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기 부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본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주관과 주체성을 버려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께는 진정으로 무릎 꿇는 새창조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엔,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대단한 사람들이죠.
아무쪼록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귀한 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