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 두아디라 사데교회의 우상숭배 2
계 2:12~3:6
2021.09.24.
우리는 지난 주에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 안에 일어난 거짓 가르침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사데 교회를 마저 살펴보겠습니다.
사데 교회는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보다 더 좋지 못합니다. 사데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의 그 원인도 우상숭배에 있습니다. 그들은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에 거의 굴복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들 가운데에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이나 이세벨의 가르침 같은 것이 있다는 언급은 없지만,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이익을 두려워하여 황제숭배 및 우상숭배에 거의 참여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옷이 더러워졌다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더러워졌다는 말은 영적인 음행을 가리키는 우상숭배 용어이죠. 그리고 이 말은 당시 그 지역에 성행했던 키벨레 제의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의식의 하이라이트는 사제가 자신의 흰 옷을 황소의 피로 적시는 장면이죠. 그런 점에서 이 표현은 우상숭배와 관련이 깊어 보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 안에는 이와 같은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고 그것을 거부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소수의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과 신앙적 타협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분별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합당한 자라고 하시고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세 교회의 상황과 문제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정리해보면, 이 세 교회는 모두 당시 시대적 요구이자 분위기였던 황제숭배 및 우상숭배를 기독교 신앙 안에서 타협하고 허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말씀으로부터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영적인 교훈은 무엇일까요?
네, 우리는 신앙의 타협과 변질이란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는 그때와 달리 로마제국도 없고 황제도 없고 우상 신전도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런 것은 없지만 무언가를 우리 신앙에 용인하고 타협하는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시대 속에 우리의 안정과 번영과 이익을 위해서 잘못된 가르침과 잘못된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그와 같은 거짓 가르침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한국교회 안에는 그런 거짓된 가르침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참 어려운 말씀이지만, 지금의 대다수 한국교회는 우상숭배를 용인한 역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우리 신앙에 기꺼이 허용했습니다. 대부분의 교단과 목회자들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는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사에 가서 절하는 일뿐만이 아니라, 예배시산에 천황에게 경배하는 순서를 넣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한국 교회의 잘못된 역사이죠.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신앙의 타협과 변질이 그 시대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해방 후에 그 일은 회개되고 청산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렇게 해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 교회는 친일 신사참배를 찬성한 목회자들과 교회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신사참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교단과 교회의 그 공식적 고백과 참회는 너무 늦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너무 늦은 시기에 그저 말과 입으로만 형식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그래도 고백했으니 이제 청산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기를 놓치고 너무 늦게 이루어진 일은 때론 별 의미가 못 되는 요식행위에 불과합니다. 이미 그 뿌리가 나오고 병이 퍼졌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회개되지 못한 그 타협 신앙과 혼합 신앙은 한국교회 안에 뿌리를 만들고 마치 한 본성처럼 내재화되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영적인 비극입니다. 변절과 타협과 혼합 신앙이란 뿌리는 계속 열매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잘 살펴보시면 한국교회에는 그런 열매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정치와의 타협, 물질과의 타협, 성장과 성공과의 타협, 구원과의 타협... 그런 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시작하여 목사가 되어 제 나이만큼 한국교회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교회의 가르침 중 하나는 긍정의 힘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미국의 어느 목사가 시작했고 그 배경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세상 철학과 원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 긍정의 힘이 한국교회 안에 유행이 되기 시작할 때,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그것은 분명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나 소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힘이나 우상숭배나 본질은 같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 우상 신을 만족시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이자 목적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그것을 마치 새로운 믿음이나 되는 듯 너도 나도 배워 설교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말씀이지 하나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긍정의 힘과 함께 그 유사품인 번영 신학도 한국교회를 휩쓸었습니다. ‘우리가 잘 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이 교회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신앙은 그 사람의 부와 물질로 평가되었습니다. 가난한 신자는 문제가 있는 신자로 은연중 인식되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성공과 물질과 타협한 이와 같은 가르침은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이나 이세벨의 가르침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왜 그런 가르침에 그렇게 쉽게 물들었을까요? 성경에 대한 이해 부족과 함께 타협과 변절과 혼합 신앙이란 뿌리를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얄팍한 예정론 및 구원론도 오늘날의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든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면서 천국에 가는 그런 손쉬운 구원론을 원합니다. 우리는 그런 구원을 바라는 악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구원을 신앙적으로 용인하고 타협하고 받아들이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 자꾸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구원의 삶을 강조하지 않은 채 예수님의 대속만 강조하며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듣기 좋은 말을 남발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과 고백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고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법정적인 선언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시고 오른쪽에는 예수님이 왼쪽에는 사탄이 있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최종적으로 선언하시는 그런 장면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그와 같은 법정적 의미만이 아니라 관계적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르는 실제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회적인 법정적 의만 말하고 지속적인 관계적 의를 말하지 않는 가르침은 우리의 악한 본성을 만족시키는 이세벨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들의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에 대한 용인과 타협은, 오늘 우리 안에서 다른 모양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공과 물질을 위한 타협, 손쉬운 구원을 위한 타협... 그런 타협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이 2가지를 살펴보았지만, 이외에도 크고 작은 타협과 변질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별하지 않으면, 그런 잘못된 가르침은 계속 교회 안에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를 향하신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시대에 분별하는 참된 신앙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잘 알면 분별은 어렵지 않을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이 마지막 때에 깨어있고 분별하는 올바른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