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믿음찬교회 0 1,383 2022.01.25 16:04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마 20:17~28
2022.01.16.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첫 번째 내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세 번째 예고에는 이전 예고와 달리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고 또 십자가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내용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어떤 특별한 요청을 하는 내용입니다. 이 어머니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죠. 그런데 이 어머니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두 아들의 자리를 예수님에게 특별히 요청합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내용이 제자들에 대한 재교육 네 번째 내용이 됩니다. 이 네 번째 내용은 한 마디로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앞서 하셨던 말씀의 반복이죠. “너희는 어린 아이 같이 자신을 낮추고, 작은 자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런데 이번 말씀을 이전 말씀과 비교해보면, 말씀의 의미는 동일하지만 이전 보다 매우 강하게 하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예를 직접 드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자’라는 말은 다니엘서 7장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인자 같은 이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받으시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언어들이 그를 섬기고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인자라는 말 자체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지만, 그 배경엔 이와 같은 엄청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왕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그런 인자로 말씀하시면서, 나는 오히려 섬기려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뜻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을 그저 그분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속하신다는 의미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영원한 왕인 나 자신도 세상과 사람을 섬기는 자로 왔다면 너희는 더욱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은 예수님의 제자라면, 우리는 결코 자신을 높이는 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지배하거나 권세를 부리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비록 자신의 지위가 좀 높다 하더라도, 겸손하게 행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 속에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게 됩니다. 
네, 이와 같은 내용이 예수님의 제자들 재교육 네 번째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기 때문에, 넘어가고자 합니다.
대신 오늘은 예수님에게 두 아들의 자리를 부탁한 이 어머니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이 분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이 분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인가? ... 이런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는 이 두 제자의 어머니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왜 예수님에게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하는지 그 배경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처음부터 분명한 정치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자인 헤롯 안디바를 비판하고 성전당국을 비판하고 그들의 잘못된 행위와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율법에 정통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압도했고 기적과 귀신축출 등 초자연적인 능력까지 가지고 계셨고 이에 따라 많은 대중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표현으로 예수님은 당시 권력자들에게 있어 반체제 인사이고 대중 선동가이고 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위험한 불씨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지금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코앞이었습니다. 수많은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었죠. 그러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유대 로마 정치권력과 사회를 매우 긴장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내부적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메시아로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의 통치와 자신의 공동체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지난주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타시고 마치 왕처럼 입성하시는 모습을 연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내용을 전반적으로 두고 본다면,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분이 자신을 메시아와 왕으로 드러내시는 마지막 단계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어떤 일을 하실지 모릅니다. 성전 당국과 로마 당국을 굴복시키고 압도하는 놀라운 능력과 말씀을 행하시고, 여기에 대해 예루살렘과 유대 백성들이 어떤 열렬한 호응을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안팎의 무르익은 분위기와 배경 속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급히 이런 부탁을 예수님에게 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왕으로서 면모가 더 드러나기 전에 먼저 확답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이전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 동행하며 돕는 여인들이 몇 명 있었는데, 이 어머니는 그 여인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 어머니는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멀리서 바라보며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킨 여인입니다. 그때 끝까지 자리를 지킨 여인들이 몇 명 있었는데, 복음서의 그 이름들을 종합해보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여인의 이름은 살로메가 아닐까 그리고 예수의 이모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자기 두 아들을 부탁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여인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안타깝게도 이 여인은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두 아들의 높은 자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훌륭한 이 여인의 안타까운 모습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벌써 세 번이나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불과 조금 전에도 예수님은 세 번째로 자신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고 그래서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것이다...
한 번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두 번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이라면 모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세 번째 말씀 직후인 그때에 그녀는 예수님께 이와 같은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여인의 어두움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미진함, 미련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것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많이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아는 데에는 매우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소위 믿음이 좋은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해와 깨달음의 문제이고 상황파악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이 여인은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이 여인은 예수님을 잘못된 목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분을 따르고 섬기고 있지만, 자기 목적이 있고 자기 아들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예수님을 믿지만, 내 목적과 내 욕심이 있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잘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보다 나은 신앙이 되려면, 단순히 소위 ‘믿음이 좋다’라는 모습을 넘어서야 합니다. 열심만 있고 믿음만 좋은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해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말씀만 많이 알고, 하나님의 뜻만 청산유수처럼 말하는 신앙이 되어선 안 되죠.
그러나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열심히 믿기만 해서는 좋은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우리 믿음과 신앙은 전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 신앙이 자랄 때, 우리의 모든 부분이 자라고 성장하고 밝아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말씀이 들어가고 신앙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과 판단과 심령과 삶과 생활방식 등 전인적인 차원에 빛이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만 가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고 생각이 달라지고 언어가 달라지고 생활방식이 달라집니다.
우리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리 생각을 지혜롭게 하고,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하고, 우리 눈을 밝게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길이 보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역사이고 성령의 역사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변화와 성장 없이 열심만 있고 내 믿음만 있는 것은 아직 인간적인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인간적인 믿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믿음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아직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 여인의 어두운 모습은 우리들에게 그런 면에서 교훈을 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전 인격과 전 삶에 계속 밝은 빛을 비추어주시길 빕니다.

둘째, 이 여인은 잘못된 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잘못된 요청이죠.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나중에 이 여인은 골고다 언덕에서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눈물 흘리며 보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오른편 자리와 왼편 자리... 자신은 결과적으로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 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높은 자리를 구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기도가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 안에 오래된 잘못된 기도 하나가 있습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주시고...” 예전엔 그런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저도 그런 기도를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가 그때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많이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꼬리가 되게 해주시고...” 라고 꼭 기도할 필요는 없지만, “어디가서든 소금과 빛이 되게 해주시고 사람들의 사랑과 칭찬을 받는 사람 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시편 말씀은 다윗의 고백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 미래를 우리의 현실과 생애에서 추구하고 기도하게 되면 우리 신앙은 자꾸 변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것을 기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무조건 합격을 기도하고, 무조건 잘 되기를 기도하고, 무조건 올라가기를 기도하고...
그러나 때론 함께 내리는 비를 맞고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함께 어려운 이 시대 속에 나만 잘 되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자기를 실현하고 자기 행복을 도모해야 하겠지만, 하나님과 이 시대와 힘든 현실을 함께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편, 이 여인은 잘못된 것을 구한 것도 잘못이지만, 그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구한 잘못도 있습니다. 내용도 잘못이지만 방법도 잘못입니다.
두 아들의 특별한 자리를 요구하면서 다른 제자들과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제자 그룹 안에서 첫째는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와도 아무런 의논이 없었습니다.
함께 동거동락한 다른 제자들을 다 제쳐두고, 아무런 의논도 하지 않고...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께 말하면 과연 제자들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고... 그런 훌륭한 모습이 분명 있지만, 다른 제자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어떻게 좋은 신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비난합니다. 믿음만을 부르짖은 기독교는 하나님에게만 잘하고 내 잘못도 하나님께 회개하기만 하면 되는 이기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인 전도를 하고, 교회 주변에 폐를 끼치고, 자기 희생 없이 축복만을 좋아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자주 이런 문제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잘 믿지만, 이기적인 신앙인이 되어 함께 좋은 공동체를 이루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큰 교회인데 안으로 들어가보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 나눠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 내 아들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 되는 것...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함께 의논하고 이야기라도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 그 여인은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과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실은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니라면, 꼭 그렇게 살 필요가 없죠. 내 생각만 하고 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고 온 세상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 모두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누구만 특별히 사랑하고 특별한 자리를 보장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모두를 생각하는 올바른 태도와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과 신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이 여인은 주님을 위해 많은 수고와 물질로 섬긴 훌륭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이 죽으시는 그 자리까지 따라갔고, 또한 부활의 현장에도 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여인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 믿음의 산 증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아들만을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여인을 보면서, 우리 신앙이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 여인을 통해 보다 성숙한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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