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네게 알게 한 이, 반석, 천국 열쇠

믿음찬교회 0 301 2021.09.20 18:56
네게 알게 한 이, 반석, 천국 열쇠
마 16:13~20
2021.09.19.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북쪽 약 40km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은 이방인 지역이죠. 예수님은 거기서 제자들과 조용한 시간을 보내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서 제자들과 조용한 시간을 보내시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시간은 1년 정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마음은 오직 예루살렘으로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최종적으로 바로 거기에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죠. 예수님은 이미 준비가 되셨지만, 문제는 제자들입니다. 이 남은 시간 안에 제자들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대체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식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는 우리가 잘 아는 그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 아들이시니이다.” 아마 이 고백은 다른 제자들의 고백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네, 이 고백은 지금 우리에게는 당연한 고백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구원의 메시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아들, 즉 신성을 가지신 그분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당시로선 정말 놀라운 고백이고 또 최초의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마태복음은 이 고백 하나를 얻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말하고 동정녀 탄생을 말하고 놀라운 갈릴리 사역과 수많은 이적을 말해왔죠. 그 결과 지금 이 순간, 베드로의 입에서 예수님의 메시아되심과 그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이와 같은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께서 17~19절까지 3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설교는 이 3가지 말씀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17절입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우리는 지난주 깨달음이란 내용을 생각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그저 열심히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디까지 깨달아야 하는가... 네, 우리의 앎이 행동으로 온전해질 때까지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깨달음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깨달음만의 종교는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특별한 순간을 성경은 더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무엘의 일화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잠이 들었고, 어린 사무엘은 성소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그 소리를 듣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갑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부르지 않았다고 하고 사무엘을 돌려 보내죠. 그 일이 3번 있고 난 후,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대답하라고 가르쳐줍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렇게 하여 사무엘은 임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 안에는 이와 같은 계시 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친히 보여주시는 역사가 있죠. 물론 우리 개인 삶이나 일상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개인 삶에 계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일에는 반드시 계시가 있습니다.
계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끌어가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2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많은 말씀과 이적과 행하심을 보았지만, 그래도 그분을 이해하는 어떤 선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신적인 하나님의 아들로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역사하셔서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이신지 알게 하셨습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우리 개인을 위해 계시를 내려주시진 않지만, 하나님의 감동이나 인도하심은 그렇게 우리 안에 역사할 때가 많습니다.

오래전 저는 학생들과 중국 정주로 단기선교를 갔습니다. 그날 정주대학교로 전도하러 들어가면서, 며칠 전 만났던 중국 친구를 다시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 그 친구는 혼자 철봉을 하고 있었죠. 우리는 하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서 그 친구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귀담아 복음을 듣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문을 지나 쭉 걸어가다가 제가 저의 팀에게 오늘은 오른쪽으로 전도하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왼쪽은 외부인이 들어가기 어려운 기숙사 건물이고 오른쪽은 강의동 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른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는 순간 제 머리와 마음에 뭔가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아냐 우리 왼쪽으로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습니다. 저는 분명 오른쪽을 생각했는데, 어떤 힘이 제 마음을 너무 순식간에 쉽게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걸었는데, 조금 후에 그 중국인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저와 저의 팀은 그날 캠퍼스 전도를 다 때려 치우고, 그 친구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놀러다녔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하시고 인도하시는 일이 우리 생각보다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깨달음 속에 하나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이 있는 균형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복됩니다.
아무쪼록 베드로에게 임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시길 빕니다. 하나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늘 받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말씀은 18절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우선 이 말씀에서 주목할 부분은 ‘내 교회’라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새롭게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교회라는 말은 ‘에클레시아’인데 그 뜻은 ‘사람들의 모임’ 또는 ‘모인 사람들’을 의미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말씀하시면서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를 직접 사용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통 예수님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사용하셨죠. 그래서 아마도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래 단어는 히브리어 ‘카할’이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카할’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회중’ 또는 ‘이스라엘 총회’를 가리키는 자랑스러운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구약 역사 속에 면면히 내려온 ‘그 이스라엘 총회’ 대신 ‘나의 새로운 총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총회는 이제 해체되고, 이제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그분의 총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혁명적인 말씀이죠.
그래서 교회의 의미는 예수님을 통해 세워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구약의 낡은 모습으로 무분별하게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많은 은혜와 교훈을 받되, 구약 체제나 근본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반석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여기서 그냥 ‘반석’이라고 하시지 않고 ‘이 반석’ 이라고 하시기 때문에, 이 말은 앞에 있는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전체 문장은 이렇습니다.
“너는 ‘페트로스’라. 내가 이 ‘페트라’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페트로스나 페트라나 같은 말입니다. 돌 혹은 반석을 의미하고 페트로스는 남성명사, 페트라는 여성명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헬라어로 보면 예수님께서 페트로스와 페트라로 미묘하게 다르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마도 아람어를 사용하셨을 것이고 그러면 이 문장은 이렇게 됩니다. “너는 케파(게바)이다. 내가 이 케파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케파는 아람어 여성명사이고 따로 남성명사가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마 아람어로 하신 말씀을 헬라어로 옮기면서 ‘페트로스’와 ‘페트라’로 기록된 것 같습니다.
설명이 조금 복잡했지만, 결론은 간단합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번역됩니다. “너는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메시아와 신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바르게 고백하는 베드로를 가리키시면서, 그렇게 바르게 고백하는 베드로 위에 나의 새로운 모임을 세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인가? 그러면 이것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생각하는 가톨릭의 성경해석이 맞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기초와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른 성경말씀과 모순인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네, 교회의 기초는 누가 뭐라해도 예수님이죠.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3)
만약 주님의 몸된 교회가 불완전한 인간 베드로를 반석과 기초로 삼는다면, 그것은 모순이겠죠. 베드로가 아무리 훌륭한 사도라 하더라도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기초와 기초석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말씀을 베드로 개인을 향해 하신 말씀이라고 보는 가톨릭 교회의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아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네, 이 말씀은 우선 신학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영원한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바르게 인식하고 바르게 고백한 베드로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시겠다는 개인적인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부족하고 여전히 불완전하죠. 잠시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실 때는 도망갔고, 잡히신 후에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또 사도가 된 후에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를 피하여 바울에게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바르게 고백하는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자신의 교회를 출발시키고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막중한 사명을 부족한 베드로에게 믿고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 교회가 시작될 때, 베드로가 그 주된 역할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하자 하루에 삼천명이 회개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세례를 줌으로 이방인 선교의 문도 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자리잡을 때까지 그렇게 교회의 반석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말씀은 굉장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교회의 반석과 기초를 말하는 어떤 신학적인 말씀이 아니라, 부족한 베드로에게 자신의 교회를 믿고 맡기시겠다는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부족한 우리들에게 자신의 교회를 맡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베드로와 같이 흠이 많고 연약하지만 반석이 되어 주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18절 말씀에서 마지막으로 살필 말씀은 음부의 권세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는 죽음을 상징하죠. 그래서 이 말씀은 죽음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앞으로 교회가 오랜 박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교회는 고난과 박해의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세상 끝날까지 존재합니다. 이 말씀은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간혹 이 말씀을 혹 어떤 미신적인 의미나 혹 어떤 영적 전쟁의 의미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이 교회를 감히 공격하지 못한다... 교회의 권세는 강하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를 실제로 위협하는 위험은 그런 영적 존재들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박해와 고난... 그것이 교회를 항상 어렵게 했죠. 그 다음에는 거짓된 가르침과 이단... 그런 것들이 교회를 위태롭게 했습니다.
물론 그런 공격 배후엔 사탄과 악한 영적 존재들이 존재하죠. 그러나 그 존재들이 직접적으로 교회를 위협하거나 신자를 위협하는 일은 드뭅니다.
과거 우리 한국교회에는 영적전쟁 열풍이 불어서, 매사를 그런 영적 전쟁으로 해석하고 대적기도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악한 영들을 결박하고... 그렇게 사역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부 신자들은 그런 영적전쟁을 자꾸 의식하고 불안해지고 눌리고... 그러다보니 어떤 능력을 받으려 하고 방언기도나 예언기도를 찾고... 오히려 건전한 신앙생활이 되지 못했습니다.
네, 물론 영적 전쟁이 있죠. 악한 영들과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그렇게 미신적인 차원으로 순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전쟁은 오히려 우리 현실과 정치와 사회 속에 더 실제적으로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정치와 사회, 악한 구조와 제도, 인간의 탐욕과 허영심... 거기에 진정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죠.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그런 미신적인 영적 전쟁의 의미로 보지는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 말씀은 19절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천국 열쇠는 무엇일까요? 가톨릭 교회에 가면 베드로 사도가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는 그림이나 조각상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천국 문을 열어주는 인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천국 열쇠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 열쇠 일까요?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같은 곳에서도 이 열쇠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그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선전하죠. 그러나 이 열쇠는 천국 열쇠이기 하지만 천국 문 열쇠는 아닙니다.
첫 번째로 이 열쇠는 천국 말씀의 열쇠입니다.
매고 푼다는 말은 전통적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열쇠는 천국 말씀 또는 하나님 말씀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선포하고 가르치면, 천국이 열리죠.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고 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열쇠를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 열쇠가 없다면, 천국은 닫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알아가는, 천국 열쇠를 가진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로 이 열쇠는 천국 문 열쇠가 아니라, 천국 사역의 열쇠입니다.
그래서 이 열쇠를 가지고 이 땅에서 맬 것은 매고 풀 것은 풀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교회의 시작이란 막중한 사명을 맡기시고 이 열쇠를 주심으로 그 일을 감당케 하십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이 열쇠를 가지고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하고, 오순절날 설교를 하고,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행하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고, 이방인 선교를 위한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한편 마 18:18을 보면 이 열쇠는 베드로만이 다른 제자들도 다 같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열쇠의 놀라운 반전이 하나 있습니다. 이 열쇠 사용에 있어 베드로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졌을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졌을 것이라.” 이 두 부분이 미래완료수동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네가 어떤 결정을 하게 될 때 사실은 그 이전에 하늘에서 그 결정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베드로의 주도권을 말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신다는 인도하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고 판단하며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 그런 베드로를 하나님은 인도하시며 자신의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사람이 주도하는 인간적인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영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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