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너희 마음을

믿음찬교회 0 62 2023.09.10 11:48
너희 마음을
히 3:1~11
2023.09.10.

예수님께서 이루신 큰 구원을 설명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권면의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우리가 믿는 도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믿는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한 종교의 교리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네, 우리에게 큰 구원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신 예수님을 깊이 이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서 어떤 은혜를 받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여 너희 신앙을 새롭게 잘 정립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만약 예수님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 방황하는 엉터리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뭐가 엉터리 신앙일까요?
첫째는 신약의 신자로서 여전히 구약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엉터리 신앙입니다.
둘째는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지 않고 따로 노는 신앙이 엉터리 신앙입니다. 구약은 구약대로 믿고 신약은 신약대로 믿고, 이럴 땐 구약을 보고 저럴 땐 신약을 보는... 일관성이 없는 신앙입니다.
셋째는 신약의 신자라고 해서 신약만 보고 구약은 무시하거나 보지 않는 신앙도 엉터리 신앙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구약은 지나간 말씀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이해하여 구약과 신약을 구별하고, 그리고 신약 속에 구약을 담고, 그렇게 신약으로 구약을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한 예로 많은 구약의 말씀과 인물과 사건들은 신약의 예수님과 예수님 시대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양과 소로 제사를 드린 것은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는구나...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모세와 여호수아는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인물이구나... 구약의 많은 예언은 결국 예수님 때에 온전히 성취되는구나... 이렇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구약과 구약시대에 국한된 일이나 사건은 과감히 구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자녀를 위해 행한 축복 기도... 그것은 권위가 있는 축복 기도이지만, 다만 족장 시대에 가능했던 일로서 오늘날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자녀를 위해 아버지도 기도할 수 있고 어머니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예수님 한 분이시고, 우리는 서로 동등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이 말씀하는 이 동등함은 단순히 기계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50:50으로 동등하고, 그래서 50:50으로 똑같이 힘과 권리를 나누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은 동등성을 바탕으로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고, 동시에 남편은 아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같이 자신을 아내에게 주고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머리가 된다는 말은 우월하거나 지배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동등하지만, 역할의 다름도 있고 대표성도 있고 사랑도 있고 헌신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동등함 속에 아내가 남편을 조금 더 존중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또 존중을 받는 남편은 동등함 속에 아내를 위해 조금 더 수고하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 이렇게 우리 신앙을 잘 정립하기 위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히브리서 본론의 두 번째 큰 주제를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앞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천사와 비교했죠. 그런데 지금부터는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하는 새로운 큰 주제를 말씀합니다.
아시다시피, 모세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모세와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들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절대적인 인물인 모세는 백성의 지도자였고 동시에 제사장이었습니다. 시편 99편은 모세를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모세라 할지라도,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모세와 같이 예수님도 왕이시고 동시에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이 왜 왕이시고 제사장이신가... 네, 구약 성경에는 종말론적인 왕에 대한 예언과 종말론적인 제사장에 대한 예언이 동시에 있습니다.
삼상 2:35에서 여호와께서는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고, 대상 17:14에서 여호와께서는 신실한 왕을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스가랴서 6장에서는 그러한 왕과 제사장이 한 인물에 의해 통합된다는 의미의 예언이 있습니다. 이른바 왕적 제사장이죠.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모델이시고 모형이신데, 다만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일을 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그 집을 지으신 분이시고 또 그 집을 맡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예수님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편 여기서 집(오이코스)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나라, 나아가 우주 만물 전체를 포괄적으로 상징하는 말입니다.
사실 우주 만물 전체가 하나님의 집이죠. 그리고 그런 우주 만물을 작은 공간으로 축소 시켜 놓은 곳이 성전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그림과 디자인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될 수 있고, 또 그런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에는 모두 6번의 집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와 같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1~6절까지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하면서, 비록 모세는 유대인들이 신봉하는 절대적인 인물이지만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은 성경 신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7절부터 권면의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 권면의 말씀은 3:7~4:13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3:7~4:13까지의 권면의 말씀은 우리가 읽어보면 쉽게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한 절 한 절이 많은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이 권면의 말씀을 잘 읽어보면... 히브리서 기자가 여러 가지 내용을 단순히 생각나는 대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3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권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불신앙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우리가 장차 들어갈 안식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설교의 나머지 시간은 이 3가지 권면 중에서 첫 번째 권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한 후에,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모세가 아니라 예수님을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이 확신과 소망의 자랑(자랑스러운 소망)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왕이시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믿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탁월한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목회자인 분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예수님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목회자로서 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붙들고 믿을 수 있는지... 그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첫 번째 내용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마음에 대한 말씀은 한 번 더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신앙의 문제와 우리의 안식에 들어가는 영적인 문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신실하고 뜨겁고 열심이 있고...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목회자로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을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먼저 말씀합니다. 이것이 좀 생소하게 생각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사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의 그릇만큼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만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를 말씀했기 때문에, 모세 시대의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출애굽의 기적과 홍해의 기적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뜨거운 찬양과 믿음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부족함과 어려움 가운데 불평하고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일시적인 불평과 불만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물이 없는데 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죠.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고, 힘들어서 힘들다고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불평과 불만이 계속되고 만연해지면서 그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은 의심이 되고 공격이 되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역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아닌 다른 한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한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신앙 이전에 마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고 가르치셨고 역사하셨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는 그대로 직선적으로 신앙과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반드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좋지 못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백성들입니다. 억압을 당하고 학대를 받고 그런 거친 삶의 환경에서 그들의 마음은 잘 자라지 못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보고 요령을 찾는 그런 기회주의자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연약한 모습을 잘 아셨습니다. 그들이 그런 거칠고 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셨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특별히 시내산에서 자신과 언약을 맺고 율법을 주심으로 당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신의 약속과 높은 법을 가진 수준 높은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게 되는데, 그런 모든 시간 동안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많은 불신앙적인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놋뱀을 바라본 백성 같은... 그런 사람들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볼 때 사람은 그 마음 바탕이 좋아야 합니다. 착하고 깨끗하고 정직하고 어지럽지 않고 거짓되지 않은 마음... 그리고 더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비록 지금 하나님을 모른다 하더라도, 언젠가 빛으로 나아오고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그분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비록 아직 하나님을 몰라도, 우리 믿는 청년들은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아 속에 인간적인 마음만 발전한 사람은 자기중심 속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도 섭섭하고 저것도 섭섭하고, 이것도 불만이고 저것도 불만이고...
한두 번은 괜찮습니다. 두세 번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사람이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경험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항상 미혹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긴 세월에도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도 더이상 하실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시고 마침내 심판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 이전에 우리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약 내가 어제의 말과 오늘의 말이 다르고, 만약 내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면... 우리는 그런 부끄럽고 모순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모습과 행동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분은 자신의 내면이 불안하고 두려울 때 시편의 말씀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러나 어떤 분들은 자기 자신을 좀처럼 잘 보지 못합니다. 어제는 어제의 나이고, 오늘은 오늘의 나이고... 그 다름과 모순에 대해 자신을 합리화하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 세상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런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티와 들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를 비판하고 말고의 문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들보를 가진 네가 티끌을 가진 나를 비난하지 마...’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는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는 것은 이 문제가 우리의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밝은 눈으로 나의 영혼과 나의 마음과 나의 내면을 잘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내면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이제 우리는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가꾸어야 합니다.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마음으로, 힘과 의지와 분별력을 가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늘 울고 두려워하는 작은 아이가 살고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에 독하고 차가운 괴물이 살고 있어도 안 됩니다. 우리 마음에 정신없고 어지러운 일곱 귀신이 살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 마음에 늘 자기를 합리화하고 무책임하고 변명하는 거짓말쟁이가 살아서도 안 됩니다.
오직 불 밝힌 지성소와 같은, 제단 앞의 촛불 같은, 감사하고 은혜롭고 참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결실을 맺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나와 같은 간절한 마음, 다니엘과 같은 지혜롭고 민첩한 마음, 얽히고설킨 복잡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과 시온의 대로가 있는 정직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그런 마음을 도모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마음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서 11장에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 내고... 내가 그들에게 한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차가운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작고 연약한 마음을 크고 담대한 마음으로 바꾸어주시기도 합니다. 어둡고 부정적인 마음을 밝고 긍적적인 마음으로 바꾸어주시기도 하십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의 극적인 역사를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날마다 여러분과 제게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좋은 신앙은 좋은 마음에서 자랍니다. 우리는 오늘 히브리서가 신앙 이전에 먼저 마음을 말씀하고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마음이 좋아야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좋아야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족한 베드로를 믿어주신 것은 베드로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마음을 가진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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