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그들의 모습 그대로 (1)

믿음찬교회 0 136 2023.02.28 15:54
그들의 모습 그대로 (1)
계22:11
2023.02.24.

오늘은 요한계시록 결론의 네 번째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결론에는 요한계시록을 마무리하는 축복과 약속과 경고와 권면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권면에 해당하죠.
그러나 단순한 권면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뭔가 경고 같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에 대해 그대로 행하게 하라는 말씀은 이해가 되는데, 불의한 자와 더러운 자에 대해 그대로 행하게 하라는 말씀은 어쩐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신학적인 면에서 곤란합니다. 이것은 천사의 말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인데,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입니다. 아무리 악인이어도 그들을 악한 모습 그대로 행하게 하라 하시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을 그렇게 내버려두라는 의미보다 한층 강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되게 만들라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명령형이고 하나님이 요한에게 명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언뜻 이상해 보이는 이 말씀을 살펴보고 이 의미가 무엇인지...그래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하는지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선 이 말씀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이 말씀이 이렇게 좀 곤란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 의미를 좀 완화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좀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말씀은 “그렇게 하게 하라” 이지만 그 의미를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라’ 정도로 약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그 의미는 그렇게 강하거나 단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함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명령은 명령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그렇게 되리라’가 아닌, ‘그렇게 되게 하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미래나 단순한 가능성이 아닌,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예정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성도들의 최후의 고난 같은, 사탄의 최후의 패배 같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같은, 그런 예정된 사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정된 사실이라면 그것은 상당히 결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곤란한 말씀의 의미를 완화하고 부드럽게 하는 해석은 적절한 해석이 아닌 것 같습니다.
 
둘째는 이 말씀의 곤란한 이유를 바로 앞 구절에서 찾는 해석입니다.
즉 종말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의인은 의인대로 악인은 악인대로 살아갈 뿐이지, 그들을 바꾸거나 혹은 그들 스스로 바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 과연 그럴까요?
그러나 종말이 가깝다는 것을 시간이 없다는 의미로 생각해도 괜찮은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은 가깝지만 언제나 시간은 우리에게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후 역사는 2,000년이나 흘렀습니다. 또 한 사람의 일생으로 봐도, 돌이킬 시간은 언제나 충분합니다. 악인이 자신의 잘못된 길을 바꿀 시간이 부족해서 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시간을 충분히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끝내 돌이키지 않는 것이죠.
그러므로 종말이 가깝고 시간이 부족해서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보는 해석 역시 적절한 해석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이 말씀을 인간의 완악함이라는 배경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즉 인간이 그만큼 완악하고 듣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가역적인 최후의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의인으로 살게 해서 구원하시고, 악인은 악인으로 살게 해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이런 말씀이 성경 안에서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이와 같은 말씀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이사야서 6장입니다. “...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사6:8~10)
네,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가 막히게 하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그래서 이 말씀은 성경에 있는 어려운 말씀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세우셨는데 그의 사명은 그들을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어둡게 하여 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안 되고 불행한 사역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때때로 가끔씩 괴팍하시거나 이상하셔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도무지 듣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사실은 이사야서 1장에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소도 알고 나귀도 아는 자기 주인과 자기 보금자리를 이스라엘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일한 말씀을 이어지는 6:13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중에 십분의 일이 남을지라도 그것마저 철저히 파괴될 것이라...’
네, 현재 많은 번역은 그 구절을 다소 희망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가 남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그래서 뭔가 희망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 본문은 본래 모호하기로 유명하고... 또 최근 이사야서 연구는 이 구절을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유다 왕국을 향한 철저한 심판과 절망이 이사야서 6장의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나온 영어 NET 번역도 그런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그것마저 다시 파괴될 것이라. 높은 곳에 있는 거룩한 기둥이 던져질 때 파괴되는 그 거룩한 나무 중 하나와 아세라 상처럼, 그 거룩한 기둥은 그 특별히 선택받은 가족이라”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메시지를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셨을까요? 우리가 평소에 알던 은혜의 하나님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에스겔서에도 나타납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겔3:27) 여기서 하나님은 듣기 싫어하는 완악한 자들에게 더 이상 눈길을 주시지 않습니다.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고 악인의 회개 가능성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은 스가랴서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떼를 먹이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내가 잡혀 죽을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슥11:4~7)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언제나 한결같이 사랑의 손길을 내미신다’라고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주권적인 하나님이시지, 항상 일정하고 같은 고정된 우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이 거듭 듣지 않고 끝내 듣지 않고 그 심령이 완전히 죽으면...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자비를 최종적으로 거두시게 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심령이 마비된, 완악한 사람에 대한 차별은 예수님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1~13)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 막4:9, 눅8:8)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구분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여러 번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만찬에서도 끝내 듣지 않자, 최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그것은 예수님이 유다가 더 이상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신구약의 모든 말씀이 최종적으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거듭 말씀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영적인 귀와 마음이 있다면 들으라, 그러나 없다면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죠. 들을 귀와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결론에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
그러므로 이것은 끝내 듣지 않는 완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말씀은 그들에 대한 최종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두렵고 무거운 교훈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듣는 것,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과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인가?’ 하는 고민을 안겨줍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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