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하나님과의 사귐과 우리의 죄

믿음찬교회 0 71 2023.02.12 11:53
하나님과의 사귐과 우리의 죄
요일 1:5~2:2
2023.02.12.

우리는 지난 주일까지 요한일서 서론을 살펴보았습니다. 4절 정도 되는 짧은 말씀이었지만, 많은 것들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나타났다는 것, 우리가 그 생명의 말씀을 보고 듣고 만졌다는 것,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우리의 사귐에 너희도 참여하기를 바란다는 것...  이런 많은 내용이었습니다.
아울러 이런 내용 뒤에는 우리 신앙의 성장과 완성이라든지 예수님의 성육신이라든지 예수님의 성육신을 강조해야 했던 당시 교회의 사정이라든지... 이런 내용도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많은 내용을 담아 요한일서 서론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인 5절부터 요한일서 본론을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숲 전체를 살펴보고 숲으로 들어가는 사람처럼, 요한일서의 전체 모양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전체 모양과 구조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가장 유력한 견해는 요한일서가 4부분으로 되어있다는 견해입니다.
서론, 본론 전반부, 본론 후반부, 에필로그 ... 이렇게 4부분으로 되어있다고 봅니다.
에필로그는 결론이 아니라 단순한 맺음말이란 말이죠. 그러면 궁금하시죠? 결론은 어디에 있는가?...
네, 2부분으로 나누어진 본론 마지막에 각각 결론이 있습니다. 전반부 결론, 후반부 결론... 그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서론은 1:1~4, 본론 전반부는 1:5~3:10, 본론 후반부는 3:11~5:13, 에필로그는 5:14~21입니다.
그러면 본론 전반부는 어떤 내용인가? 네, 전반부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전반부는 하나님은 빛이시니까,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하며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계속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런 전반부의 결론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입니다. 빛과 어둠 속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나뉘어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3:11부터 본론 후반부 내용이 시작됩니다. 3:11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그런데 이 말씀이 너무 매끄러워서 많은 분들은 여기서 요한일서 후반부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후반부가 시작되고 좀 지나서야 ‘아~ 앞과 다른 말씀을 하고 있구나’라고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면 왜 3:11 말씀부터 후반부인가? 그것은 이 3:11 말씀에는 후반부 시작을 알려주는 단서가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소식’이라는 단어입니다.
요한일서는 1:5에서도 이 ‘소식’이라는 단어로 전반부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그래서 3:11에서도 이 ‘소식’이라는 단어로 후반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후반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내용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후반부의 결론은 생명과 영생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면, 생명과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마지막 에필로그는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한 것, 형제를 구하는 것, 우리가 특별히 아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상을 멀리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네, 이상이 요한일서의 대략적인 전체 구조와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와 같은 요한일서의 전체 윤곽을 이해하면서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일서 전반부의 첫 번째 내용인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이 말씀은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전반부 전체를 아우르는 큰 선언입니다.
그래서 이제 요한일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이 큰 말씀을 가지고 계속 말씀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여러분, 빛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작은 불빛이나 모닥불을 알고, 밤의 달빛과 별빛을 알고, 가장 큰 빛으로는 태양을 알죠. 우리가 빛을 최대로 아는 것은 태양입니다.
그러나 환상을 보거나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경험한 분들은 우리가 아는 정도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우주의 본질적인 빛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놀라운 빛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성령의 감동 속에 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주님을 보고, 또 하늘에 올라가 하늘 보좌의 모든 영광과 찬란한 빛을 본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사도 요한은 그런 깊은 체험 속에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여기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말씀을 왜 할까요? 네, 그것은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라는 말씀은 왜 할까요? 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당연하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어둠에 행하고 죄를 지으면 그것은 거짓이고 가짜입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왜 이와 같은 당연한 말씀을 하는지... 그 이유와 배경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이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뒤집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짓고 또 죄를 지으면서 죄가 없다고 부인하고 그렇게 어둠에 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많이 일어났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잘못된 자들과 이단적 가르침은 어느 시대나 그런 거짓된 것을 늘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 안에도 그런 거짓을 버젓이 말하는 이단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사도 요한이 사도로서 말씀하며 사도적 신앙을 바로 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제 6절부터 모두 6번에 걸쳐 ‘만일’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6절, 7절, 8절, 9절, 10절, 그리고 2장1절, 이렇게 나오는 6번의 ‘만일’은 2개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6절과 7절/8절과 9절/10절과 2장1절 ...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내용으로 두 개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6개의 문장은 마치 깊은 밤 여우가 우리 뒤를 오른쪽 왼쪽 번갈아 따라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어지럽게 하며, 점점 더 깊은 내용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장2절은 예수님에 대한 선언으로 끝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니...”
그래서 오늘 본문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1:5의 하나님에 대한 큰 선언으로 시작해서, 중간에 6개의 ‘만일’이라는 말씀이 있고, 마지막으로 2:2의 예수님에 대한 특별한 선언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오늘 말씀에서 어떤 교훈과 가르침을 받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길고 많은 말씀이 있지만, 오늘 본문 전체의 뜻을 잘 요약하는 가장 중요한 말씀은 2:1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거듭거듭 ‘죄’를 말씀하며 우리 신자들이 ‘죄를 범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해결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 전체의 의미가 이 2:1 말씀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사도 요한의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잘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먼저 죄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죠. 죄를 알아야 피할 수 있고, 죄를 알아야 거기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오늘날 일반 사람들은 죄를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 자체보다는 죄가 밝혀져서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물거나... 그런 처벌을 더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가 어디 있냐고 하면서 죄를 오래된 종교적 유물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또 죄란 기독교가 인간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일반 사람들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사람의 죄인됨을 부인하는 생각을 깊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따라,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우리의 죄인됨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들은 세상 사람과 달리, 죄가 무엇이고 죄가 어떻게 자라고 어떤 결과를 낳는지... 그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마귀는, 신자든 불신자이든, 죄를 통해 사람을 지배하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사도 요한이 죄에 대해 말씀하는 중요한 몇 가지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내용을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 요한은 죄를 단수와 복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죄가 있고 죄들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구분을 아쉽게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지만, 원어나 영어 성경은 이 내용을 잘 구분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사도 요한은 죄를 단수로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그리고 그 외 부분에서는 다 죄를 복수로 말합니다.
그러면 죄는 뭐고, 죄들은 무엇일까요?
네, 사도 요한이 죄를 단수로 말할 때의 죄는 우리 인간의 근본 죄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죄들의 뿌리와 같은 죄가 있어서, 거기서부터 각종 죄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근본 죄는 무엇일까요? 네, 이 죄는 하나의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어긋나 있는 상태, 혹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빛과 사랑과 은혜를 벗어나,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보고 판단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과 그런 상태... 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물론 세상과 세상의 인본주의는 왜 그것을 죄라고 하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이기적인 자아를 가진 존재들입니다. 세상과 인본주의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악으로 나아가는 병든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근본적인 죄의 상태 속에서 각종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몇몇 죄를 짓지 않는다고 혹은 우리가 비교적 착하게 산다고... 죄인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저마다 약한 부분이 있고, 거기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모두 다 죄의 뿌리를 가진,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거나 불쾌하게 여기지 말고, 우리의 죄를 예수님 안에서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 근본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근본적으로 만들면, 우리는 많은 구체적인 죄들도 해결하고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구원 받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에서 죄를 어둠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은 죄를 어둠이라고 말씀하고 또 죄를 짓는 것을 어둠에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말씀과 함께 생각할 때, 그 의미를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은 빛이신데, 죄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는 어둠을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그 어둠에 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기능을 합니다. 이것이 죄의 기능이자 역사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마침내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상실되고 소외된 존재로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또 하나님으로부터 상실되고 소외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어둠에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고통은 우리의 얼굴에 그늘을 만듭니다. 무기력과 우울은 우리의 마음에 그늘을 만듭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에 그늘과 어둠을 만듭니다. 많은 사람은 이와 같은 어두움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 삶의 목적 중 하나는 이와 같은 그늘과 어둠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얼굴은 이 모든 그늘과 어둠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분투하고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벌고, 건강하지 못하면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마음이 힘들면 기도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좋은 음식도 먹고 좋은 취미도 가지고 말씀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이렇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그늘과 어둠을 물리치고 예수님 안에서 건강하고 밝고 새로운 삶으로 소망과 빛으로 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힘입어, 죄와 현실이 만드는 이와 같은 어둠을 벗어나시고, 병들고 상실되고 소외된 모습을 탈피하시고, 늘 빛 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사도 요한은 마지막으로 우리가 죄를 자백(처리)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죄는 영적인 물질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발생하고 존재하는 일종의 물질과 같은 것입니다. 한번 생기면,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잊어버릴 수 있지만, 그러나 죄는 잊어버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죄는 어떻게 해야 없어질까요? 네,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방법으로 처리되어야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레위기 말씀을 주셨습니다. 속죄제, 속건제, 번제, 화목제, 소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자신들의 죄를 처리했습니다.
죄를 처리하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원리이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 희생 제사의 온전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 죄를 처리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자라면,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죄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연약한 우리는 실수하고 잘못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죄를 곧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성령님이 없는 사람은 죄가 죄인 줄 모르지만,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죄를 곧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발견하게 되면, 그것이 괴롭고 불편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럴 때 우리는 곧 그것을 하나님께 자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속죄 제사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 죄가 사람과의 문제라면 그 사람과 풀어야 합니다.
이렇게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과 해결하고, 사람과 해결하고...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의 방식이며 죄를 처리하는 영적인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고백하며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과 사귀며 살아가는, 빛 가운데 사는 생활과 죄를 고백하는 생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첫째, 죄가 우리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도록 죄를 잘 다스리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며 죄를 잘 처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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