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왕의 왕 만주의 주
계 19:11~16
2022.11.11.
오늘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처음에 예수님의 모습을 심판의 주님으로 말씀했죠. 그런데 마지막 15절에서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님이심을 최종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알아야 할 예수님의 최종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래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로 탄생하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그분을 강보에 싸 구유에 뉘었죠. 그리고 그분은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아들이 되셨습니다.
이후 그분은 성인이 되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의 놀라운 공생애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마무리되고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그분의 생애를 통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과 우리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승천하신 이후 예수님이 어떤 분이 되셨는지, 또 역사의 마지막에 어떤 분이 되실지에 대해선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분이 누구신가에 대한 계시는 아직 진행 중이고 완성되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처음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말씀해주시진 않으셨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애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자신을 점점 계시해 가셨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6:2~3)
이 말씀대로라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일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주 여호와여’ 라고 부르며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이름은 알았지만 그 이름의 온전한 의미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라는 이름 안에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본질과 인격과 성품의 의미가 들어있음을 그때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네, 이런 점에서 생각할 때, 지금 우리 역시 하나님도 다 알지 못하고 예수님도 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아직 우리에게 다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지식과 경험에 아직 다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신비한 이름 하나가 있습니다.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아시는 바와 같이, 이름에는 그 사람의 정체나 본질이나 성품을 말해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이의 이름을 좋은 이름으로 지어주고, 그 의미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름 하나가 있다는 것은 그분의 본질과 성품과 정체에 있어서 아직 계시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예수님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을 알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일까? ... 궁금합니다. 그 이름을 우리가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이름의 의미를 통해 예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비밀스런 이름은 영원한 비밀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알아선 안 될 영원한 비밀이라면 처음부터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름 하나가 더 있다고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다른 경우를 보더라도 모든 비밀이란 다 드러나는 비밀이었습니다. 음녀가 비밀이고 짐승이 비밀이었죠. 그러나 그 비밀은 한시적인 비밀이었지 영원한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의 비밀스런 이름도 현재로선 비밀이지만 장차 드러날 비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드러날 비밀의 이름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한 새 이름일까요? 아니면 여호와란 이름처럼 우리가 알지만 제대로 알지 못한 어떤 이름일까요? 네, 안타깝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작은 실낱같은 단서는 오늘 본문에 들어있습니다.
오늘 본문 구조를 살펴보면, 11절을 제외한 12절~16절이 교차대구법으로 쓰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은 16절과 연결되고, 13절은 15절과 연결되고, 14절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의 불꽃 같은 눈과 머리의 많은 관은 16절의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와 연결되고, 13절의 피에 물든 옷과 하나님의 말씀은 15절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과 그의 입의 예리한 검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중심부인 14절은 그런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흰옷을 입고 그분을 따르는 하늘의 군대는 천사일 수도 있고 성도일 수도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 흰옷을 입는 존재는 1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도들이고 또 어린 양을 따르는 성도들이 그와 함께 이긴다는 17:14절을 고려하면 이 하늘의 군대를 성도들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성도들을 중심부에 두면서 백마를 타신 분의 모습과 이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본문의 구조를 고려하면, 12절은 16절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12절의 감추어진 그 이름이 16절의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치 미켈란젤로가 그림에 자신의 의도를 살짝 숨겨놓은 것처럼, 오늘 본문도 그 이름을 이렇게 숨겨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그 감추어진 비밀의 이름은 바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 우리는 예수님의 온전하신 본질과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라고 알기는 알지만, 그 의미와 뜻을 다 실감하지 못하고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그렇게 찬송가도 부르지만 만왕의 왕이란 의미를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것은 아직 우리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미래 사실입니다. 환상을 접한 요한 정도가 그것을 경험하고 이해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진정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영광스런 사실은 오직 그날에 우리에게 온전히 계시될 사건입니다. 그것은 그날까지 감추어진 예수님의 정체의 비밀입니다. 그날에 세상과 역사 속에 존재하고 존재할 모든 영광의 보좌와 모든 경배의 제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금 희미하게 믿음으로 고백하는데, 그날에는 모든 이들이 그분 앞에 온전히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과 이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이 같은 주님의 이름과 모습을 알아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온전해지고, 그분 앞에 진정으로 무릎 꿇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믿기는 믿어도 진정으로 그분 앞에 무릎 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온전하신 주권이 그 사람 안에 정립되지 못해서, 또 장차 오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온전히 알지 못해서 그런 불분명한 삶을 삽니다.
그래서 예배는 드리지만, 삶에서 실제로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의 뜻으로 삽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앞에 진정으로 무릎 꿇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분 앞에 무릎 꿇지 못하는 또 다른 중요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 주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거나 오실 주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없어서 그런 것 외에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아니지만 자신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고 순종한다고 오해와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 중에 우리 주님께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한다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실제 삶은 주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의 삶을 살면서, 자기는 주님을 주님으로 섬긴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그런 이중적인 생활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지 않고, 내 입장이 하나님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믿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사는 것은 그 지식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적용을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들 중에도 주님을 주님으로 대접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목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목회를 하고 있고 교회를 섬기고 있으니까, 자신은 주님의 뜻 안에 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모 대형 교회도 예배당을 불법으로 건축하고도, 그 입당예배에서 하나님이 다 하셨다라고 버젓이 말했던 것입니다. 모 기독교인 대통령도 시장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은 하면서도, 자신의 오랜 운전기사를 하루아침에 해고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주님을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님으로 알고 그 앞에 진정으로 무릎 꿇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지식과 실천을 동시에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주님 앞에 무릎 꿇는 올바른 실천인가? 이것이 진정 주님을 만왕의 왕으로 섬기는 올바른 적용인가? ... 그 적용과 실천에 좀 더 밝아지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만왕의 왕이신 주님 앞에 진정으로 또 바르게 무릎 꿇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