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제자들의 신앙과 감사
마 27: 55~56
2022.11.06.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가을에 한 해의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뜻깊은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을 하면 도시에 사는 사람과 농촌에 사는 사람이 감정이 조금 다릅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은 가로수의 떨어지는 낙엽이 먼저 생각나고, 그래서 가을 하면 쓸쓸한 감정이 앞섭니다. 그러나 농촌에 사는 사람은 가을 하면 들판의 곡식과 나무의 열매가 생각나고, 그래서 가을 하면 넉넉하고 풍성한 감정이 앞섭니다.
몇 년 전 가을 이맘때 저는 청도 근처 도로를 운전하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청도 하면 감이죠. 도로 주변 산들이 온통 감나무였고, 감이 온 산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보던 감 한 상자 두 상자가 아니라... 그렇게 많은 감을 저는 그때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감을 파는 분이 있어서 차를 세우고 농장에도 들어가보고... 그분의 넉넉한 인심으로 감사하게 좋은 감을 싸게 많이 살 수 있었습니다.
네,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리는 것은 우리가 가을을 마냥 쓸쓸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취지입니다. ‘낙엽이 떨어진다, 쓸쓸하다, 아 외롭다...’ 이런 가을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많은 열매와 감사한 일들을 돌아보는 아름다운 가을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을에 여러분들의 감사 제목을 기뻐 받으시고, 여러분들의 마음을 더욱 감사하고 은혜롭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이렇게 감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몇 명의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개하는 순서도 동일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지난주에 살펴본 백부장입니다. 두 번째 인물은 오늘 본문의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인들입니다. 세 번째 인물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왜 세 복음서가 똑같이 이 인물들을 차례대로 소개할까요? 여기에는 아무래도 의미가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백부장을 통해 말하는 것이 있고, 여인들을 통해 말하는 것이 있고, 아리마대 요셉을 통해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인물들의 의미는 어쩐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은 이 중 한 명만 말씀합니다. 바로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4복음서가 다 말하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섬기며 따라온 여인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고 그들의 신앙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살펴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선 이 여인들은 단순한 여인들이 아니라, 여자 제자들입니다. 이분들은 예수님을 따라왔죠. 단순히 갈릴리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따르다’라는 말은 제자를 의미하는 특징적인 용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마태복음의 말미에서 비록 너무 늦게 알게 되었지만,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은 열둘만이 아니고 남자만이 아니고... 여자들도 많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여자 제자들은 언제부터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이 질문에는 여성과 약자와 죄인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누가복음이 잘 말해줍니다.
열두 사도가 세워진 것이 누가복음 6장에서입니다. 그런데 여자 제자들이 예수님과 열두 제자와 함께 한 것이 누가복음 8장에서입니다. 눅8:1~3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실 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더라”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합류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공유하고 또 자신들의 소유로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이와 같은 여자 제자들을 말씀하고, 또 그중 몇 분을 특별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연안에 위치한 성읍이죠.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위쪽에,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 아래쪽에, 그에 비해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 중간 연안에 위치하였습니다. 이분의 이름은 그냥 마리아인데, 당시 여자 이름으로 마리아가 너무 흔해서, 그래서 이분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가 맨 먼저 언급된 사실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맨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막달라 마리아는 여자 제자 중 나이도 가장 많고 섬김도 가장 많았던 인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섬김을 많이 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랐다는 사실은 그녀가 부유한 과부가 아니었겠나 추정됩니다.
두 번째 인물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이분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를 보면 거기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다고 말씀하는데, 예수님의 동생 이름이 야고보와 요셉(시몬, 유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셉도 너무 흔한 이름이어서, 이분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추정할 뿐 정확히 꼭 그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세 번째 인물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바로 야고보와 요한이죠. 그래서 이분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이분의 남편 세베대는 갈릴리에서 배를 소유하고 품꾼을 데리고 고기를 잡을 만큼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어머니는 그런 부유함을 바탕으로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습니다. 참 행복한 사람이죠. 그런데 아시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한 번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분의 이름이 궁금한데, 다른 복음서를 보면 동일 본문에서 이 자리에 살로메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분의 이름이 살로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한편으로, 요한복음을 보면 그때 거기에 예수의 이모가 있었다고 말씀하죠.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맞아들어간다면 살로메가 세베대의 어머니이면서 예수님의 이모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사촌이 되는 것이죠.
아~ 그래서 이분이 자기 아들들을 예수님의 자리 오른편과 왼편에 세워달라고 부탁한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물론 이런 내용은 단지 가능성일 뿐, 정확한 내용은 되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지금 마태복음은 이 세 사람을 신실한 여제자들의 대표와 리더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네, 이렇게 세 복음서가 이 여자 제자들을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서가 이 여자 제자들을 중요하게 말씀하는 이유는 이분들이 너무나 신실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그 긴 시간 동안 그 긴 여정 동안 예수님을 따라왔고, 무엇보다 지금 여기 예수님의 마지막 자리까지 따라왔습니다.
앞장섰던 열두 제자는 지금 어디 있을까요? 그들은 지금 다 도망가고 없습니다. 어젯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벌써 그렇게 했습니다.
네,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예수님의 죄목이 보통 죄목이 아니죠. 자기를 왕이라고 말했다는 반역죄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예수님은 역적의 우두머리로 십자가형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라면, 단지 주도자 한 사람의 처형으로 끝나지 않죠. 제자들에게도 반드시 화가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자 제자들은 덜 위험했습니다. 당시는 남성 중심 시대였고 여자들은 덜 위험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그 자리까지 간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네, 모든 것이 이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그분의 말씀도, 가르침도, 새로운 삶도... 또 내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헌신하고 애썼던 모든 것들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험악한 세상 속에 한 줄기 빛이었던 예수님과의 시간은 한 여름 밤의 꿈이 되고 이렇게 비극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발길을 돌리는 것이 낫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까지 따라가는 것은 슬프고 괴롭고 의미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자 제자들은 그 자리까지 갔습니다. 어떤 다른 기대나 목적이나 믿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거기까지 간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 왜 거기까지 갔을까요?
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죠.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으로 고통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귀신이 하나 정도 들어와 있어도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귀신을 어떻게 할 수 없죠. 정신이 들었다 나갔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일곱 귀신이 자기 안에 있으면, 얼마나 극심할까요?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귀신들림 현상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직접적인 귀신들림은 적지만, 미신과 악한 영과 돈과 욕심과 거짓에 지배를 받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정치인도 그렇고 일반인도 그렇고, 뻔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과 참된 말을 듣지 못하고 또 듣지 않는다는 점에서 귀신들림과 그리 차이가 없습니다. 저희 집 앞에도 무당인지 법사인지 그런 집이 있는데, 좋은 차를 탄 사람들이 늘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살든 못살든 진리와 자기 힘으로 살아야지 귀신과 우상의 힘으로 잘 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격하시키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으로 고통받고 유린당했지만, 당시 누구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성전 당국, 지역 마술사들, 무당들, 능력자들... 아무도 못했죠.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으로 귀신을 물리쳐주셨습니다. 어떤 행위도 없이 오직 말씀으로 말이죠.
그런데 알고 보니, 예수님은 단순한 능력자나 귀신축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는 메시아이심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까지 주셨기 때문에, 자신도 예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그렇게 제자가 되었습니다.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여러분과 저도 모두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제자가 된 줄 믿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은 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로 그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모든 것은 끝나지만, 그러면 내가 그 마지막 자리까지 가겠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축복을 바라고 능력을 바라고 영광을 바라고 거기 간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으로 그 자리에 갔습니다.
아마 너무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가시면 안 되는 분인데, 세상과 세상 권력이 또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결국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 신앙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젯밤 대제사장의 뜰에서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심히 통곡했습니다. 자신에게 생명과 구원과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을 자기 입으로 저주하며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자신의 추악한 모습에 울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본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그분에 대한 사랑과 감사입니다. 우리의 믿음 중심에는 그것이 들어있어야 합니다.나를 구원하시고 새 생명 주시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을 가진 후에도, 여전히 돈을 벌고 일을 하고 똑같이 삽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영적으로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을 향한 사랑과 감사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내가 잘 살아보려고 엎드리고 절하고, 무언가를 빌고, 지배를 받고, 그러면서 신을 교묘히 조종하려고 하는 그런 기복이 아닙니다.
또 우리 신앙은 내 안의 더러움과 추악함을 감추기 위해 거룩함을 추구하고 거룩함을 가장하는 그런 종교와 의식이 아닙니다.
또 우리 신앙은 인간 존재와 한계를 넘어서고 그래서 영원과 신 존재를 추구하는 그런 초월과 신비주의도 아닙니다. 내용이 없는 신비주의는 거짓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다만 나를 구원해주신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고마워, 우리도 어떻게 하든지 거기에 감사하고 보답하려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어렵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 그것을 잘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것들도 더해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외에 이름 없는 다른 모든 여자 제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거기 눈물 흘리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보답해야 하겠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화려한 예배당에 앉아있어도, 그것이 없으면 나는 신앙이 아니고, 기복이고 종교이고 의식이고 신비주의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저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목사생활을 해왔습니다. 목사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저의 사랑과 보답이죠. 그래서 목사로서 제가 받는 대우나 조건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고, 그것은 제가 돈을 이미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제 가족이 생활할 수만 있다면, 저는 목사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저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교단체에 있을 때나 개척교회를 할 때나, 사역이 잘 안 되고 어려울 때는 그것만 생각했습니다. ‘얼른 생활이 안 되어야 할 텐데... 그러면 나는 ‘하나님, 여기까지 인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목사를 안 해도 되는데... 나는 그저 작은 돈벌이를 하면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게 들리시죠? 어쨌든 하나님과 저 사이에는 물론 제가 혼자 주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그런 묵계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생활이 되면 따지지 않고 하겠습니다. 생활이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고 그만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잘 생활하고 있고, 목사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네, 이것은 하나님과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이고 자랑도 아니고 과장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도 그런 사랑과 감사와 보답의 이야기가 있으셔야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하며 보답하며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만약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하며 보답하며 살고 싶으십니까?
신앙은 사랑이고 감사이고 보답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평생에 그런 사랑과 감사와 보답의 이야기를, 마치 어린아이가 밤에 따뜻하게 일기장을 쓰듯이, 그렇게 행복하게 써내려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추수감사절의 기쁨과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