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예언의 영의 사람들

믿음찬교회 0 93 2022.10.27 14:28
예언의 영의 사람들
계 19:10
2022.10.21

지난주에 우리는 계19:10 말씀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의미는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들은 예언의 영의 사람들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언의 영의 사람들이라는 것은 곧 예언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요한에게 한 말씀은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들은 다 예언자들’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다 예언자들이고, 교회는 예언자 집단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이해와 동의가 되십니까?
오늘은 우리에게 조금 생소한 이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언자 하면 대개 구약적 의미로 이해하여,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틀리지 않은 사실입니다. 분명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특별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그런 분들이고,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말라기까지 다 한 분 한 분 특별했습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을 특별하게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하게 받았고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에 대한 이와 같은 특별한 이해는 신약에 들어서면 좀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바뀌게 될까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소수의 특별한 사람을 예언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믿는 자 모두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뜻과 계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믿는 자들은 누구나 성령님을 받죠. 그리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예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설교를 하면서 요엘서 말씀을 언급했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베드로는 이 요엘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설교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모임 안에서 서로 어떻게 질서 있게 예언할 것인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권면했습니다. 순서를 따라 질서 있게 하고 또 예언을 분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언에 대한 이와 같은 가르침은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집니다. 요한은 계시록 서두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자 모두에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예언하도록 하는 권면입니다.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이 그 말씀을 자신과 공동체 가운데서 예언하는 활동이죠.
또 요한은 11장에서 두 증인의 1,260일의 예언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두 명의 특별한 예언자가 예언하는 것이 아닌, 교회공동체 전체가 종말에 세상을 향해 예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언자가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언과 예언자에 대한 이와 같은 요한의 이해는 오늘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들은 다 예언자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우리는 신약의 예언이란 교회와 믿는 자 모두에게 확대된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예언이란 미래를 알아맞히는 것이란 고정관념이 워낙 강하죠.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많은 분들도 성경의 예언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그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단순히 미래를 말하고 미래의 길흉화복을 말하는 것은 성경의 예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예언이죠. 일반적인 예언을 통해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성경의 예언은 무엇일까요?
성경의 예언은 단순한 미래가 아닌 올바른 미래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순한 미래를 말씀해주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내일 너는 밥을 먹을 것이다, 내일 너는 집을 나설 것이다... 그런 단순한 예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참된 예언자도 단순히 미래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아람과의 전쟁을 앞두고 선지자들을 불러 물었습니다. “내가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랴 말랴?” 그때 사백 명이나 되는 가짜 선지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는 달랐습니다. 아합 왕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않고 또 바르게 되려는 마음도 없었기에, 미가야는 전쟁의 단순한 승패를 묻는 아합 왕에게 전혀 다른 대답을 하였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아닌 아합 왕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죠.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이 주인이 없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셨나이다.”
그래서 만약 아합 왕이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전처럼 즉시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미래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오히려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미가야의 예언이 두려웠던지 변장을 하고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하는데, 그러나 그 날의 전투가 워낙 치열하여 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병거에서 시달리다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단순한 미래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앞에 올바르고 바람직한 미래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어떤 믿는 분 중에 가끔 그런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잘 믿다가, 급할 때는 어디 용한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 점을 보거나 또는 어디 누구에게 기도 받으러 간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내가 선거에 나가는데 당선이 될까요?’, ‘이번에 내가 어떤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잘 될까요?’, ‘이번에 우리 아이가 아무개를 만나 결혼하는데 서로 궁합이 맞고 잘 살까요?’ ... 이렇게 하나님 다 잊어버리고 그저 미래를 단순히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본인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그렇게 미래를 열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우상에게 물으러 가듯이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이자 귀신숭배이자 미신신앙입니다.
여러분, 미래란 열려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미래를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도우심과 우리의 믿음으로 열어가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미래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의미 있는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예언이란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이나 우리 자녀나 이 세상이나 다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말해주는 예언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예언자들이었습니다. 1세기 로마제국이 제국의 면모를 잃고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로 빠져들어갈 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제국의 흐름을 거스르고 황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예언적인 행위였습니다.
신전의 우상들은 화려한 제단과 의식과 축제 속에 살아있는 듯했지만, 그것은 거짓이고 가짜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제국의 위엄과 높은 자리와 사람들의 고백 속에 신으로 추앙받았지만, 그들은 한낱 사람일 뿐 대부분 자살과 암살과 병사 속에 빈번히 교체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우상에 빠져들고 온 사회가 황제숭배에 물들 때,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그것을 거부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그와 같은 증언과 고백은 그 잘못된 시대와 세상의 유일한 빛이었고 참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세기의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다면 오늘의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시대의 예언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 될 수 있을까요? 이 내용은 다음 주에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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