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고통과 모욕
마 27:26~44
2022.10.09.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는 먼저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 이어서 오늘 본문의 주된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27절이 아닌 26절부터 읽었습니다. 26절이 말씀하는 2가지 내용을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는 바라바이고, 다른 하나는 채찍질입니다.
26절은 바라바가 놓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졌다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바라바는 그날 다른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될 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골고다에는 그 세 사람의 처형을 위한 십자가 세로 기둥 3개가 이미 세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라바가 달릴 예정이었던 자리에 달리시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 바라바는 16절에서 유명한 인물이라고 소개되었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가 단순한 강도가 아닌 민란과 살인을 행한 인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네, 단순 강도를 십자가에 처형하지는 않죠. 그래서 아마도 바라바와 이 두 명의 강도는 서로 동료로서 로마에 무력으로 대항한 열심당 소속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채찍질에 대해 살펴보면, 마태복음은 이것을 십자가 처형의 한 과정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채찍질을 한 후에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죠. 그러나 요한복음을 보면 이 채찍질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사형 판결을 피하기 위해 조치한 형벌이었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채찍질만 하고 풀려주려고 했던 것이죠. 그러나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백성들이 강경하게 계속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고, 결국 빌라도가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27~31절은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희롱한 내용을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이 군병들은 로마의 정규군이 아닌 해당 지역에서 뽑은 비유대인 용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유대의 종교나 관습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거칠고 난폭한 군병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채찍질로 몸을 가누기 힘든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감히 왕이라고 주장하는 이 고상한 인물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오락거리이죠. 그래서 그들은 웃고 떠들며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절을 하고 침을 뱉으며 마음껏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마태는 이 내용을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이 내용을 자세하게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예수님의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20장의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과 채찍질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희롱을 마친 군병들은 이제 예수님을 골고다로 끌고 갑니다. 당시 총독 관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골고다 언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거기 성지순례를 가면, 슬픔의 길이라고 하는 비아 돌로로사를 통해 그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언덕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성묘교회라는 큰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주변에 집들도 많고... 그래서 안타깝게도 언덕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편 근래 들어 예루살렘 성 밖 한 장소가 새로운 골고다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다메섹 문을 통해 나가면 가든 툼이라고 하는 그 장소가 있습니다. 다행히 그곳은 언덕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그 언덕의 모습도 해골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그 장소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때 지신 십자가는 아마도 십자가의 가로 기둥이었던 것 같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미리 십자가 세로 기둥을 세워놓고 가로 기둥만 지고 가는 것이죠. 그래도 그 무게가 상당히 무거워서 약 50kg 정도 되지 않을까 추정됩니다. 그래서 이미 채찍질로 많이 약해지신 예수님께서 감당할 수 없어,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골고다에 도착하셨습니다. 골고다에 도착한 예수님에게 누군가가 쓸개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쓸개라고 해서 동물의 쓸개를 말하는 것 같지만, 마가복음은 이것을 몰약을 탄 포도주라고 말합니다.
몰약이나 쓸개나 그 단어 형태가 비슷하고 맛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몰약의 쓰고 신맛을 쓸개즙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몰약에는 마취 성분이 들어있죠. 그래서 이 포도주는 이제 끔찍한 고통을 당하실 예수님을 위해 누군가가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서서히 정신을 잃는 무기력한 방식으로 돌아가시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셔야 할 말씀도 있고 하셔야 할 부탁도 있고 하나님을 향한 마지막 기도도 남아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여졌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예수님을 비하하는 내용이지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을 가장 잘 나타내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셨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마지막 시간들 속에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는 사람들의 조롱이 이어집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의 조롱이 이어지고,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의 조롱이 이어지고, 최종적으로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의 조롱도 이어집니다. 마태복음은 한 강도가 회심한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마태는 말하고자 하는 어떤 메시지를 위해 그 이야기를 포함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상이 대략적인 오늘 본문에 대한 설명입니다. 많이 아시는 내용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은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무척 의외라고 생각되는 사실 하나가 발견됩니다. 그것은 마태가 여기서 어떤 내용은 강조하면서 동시에 어떤 내용은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록한다면, 이것을 강조할 것 같은데, 의외로 그것을 강조하지 않고 다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록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이고 강조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래 전 저는 선교단체 간사를 하던 때에 우연히 차에서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들었는데, 미국의 강해 설교자로 유명한 한 목사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설명하면서,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매우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마태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누가복음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요한복음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그 목사님은 이 내용을 말하고 왜 복음서들이 그렇게 말씀하는지 설명하셨는데, 안타깝게도 제가 영어로 말하는 그 내용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제가 아직 신학도 공부하지 않고 마태복음 주석도 읽어보지 못한 때라 궁금증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왜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이 극적인 장면에 멈추지 않고 그저 지나갈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많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얼마나 많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말합니까? 그런데 의외로 성경은 이 부분을 그저 지나가듯이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성경의 그런 모습은 이 장면뿐만이 아닙니다. 좀 전에 26절에 채찍질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그저 지나갑니다.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우리가 당시 형벌로 채찍질을 어떻게 행했는지 사전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채찍을 맞으셨나보다 하고 넘어가게 되죠.
그러나 당시 역사적 고증을 보면 이것은 단순한 채찍질이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나온 예수 영화가 이 부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냥 채찍이 아니라 채찍 끝에 동물의 뼈나 발톱 또는 금속 조각과 납 등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가죽 채찍을 먼저 물에 불려 무겁게 합니다. 그리고 매질을 하는데 옷을 벗기고 왼쪽 어깨 쪽에 13번, 오른쪽 어깨 쪽에 13번 그리고 목부터 종아리까지 13번... 그렇게 모두 39번을 때렸다고 합니다. 몸이 약한 사람은 이 채찍질만으로도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끔찍한 형벌이지만 16절은 그것을 그저 언급만 하고 지나갑니다. 못 박히시는 장면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한 문장으로도 말하지 않습니다.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러 번 나오는 ‘십자가에 못 박다’라는 말도 사실은 여기에 ‘못’이라는 끔찍한 말이 없습니다. 그 단어는 ‘스타우로’인데, ‘십자가 처형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나타내지 않습니다.
‘못’이라는 말은 나중에 요한복음에서 그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와 대화하실 때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요20:25에 ‘못 자국’이라는 말이 두 번 언급되고 그것이 복음서 안에서 전부입니다.
성경 말씀은 왜 이럴까요? 이상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에게 말하지만,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고통을 가급적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고통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의학적으로 그 십자가 죽음과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글을 읽어보면 그것은 정말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고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 고통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신체적인 물리적인 고통은 끔찍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그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모욕과 조롱입니다. 성경은 물리적인 고통보다 그것을 더 크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당하신 모욕과 조롱을 아주 자세히 말씀합니다. 산헤드린 공회 재판에서부터 모욕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죄 아닌 죄로 정죄하고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고 “그리스도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그렇게 조롱했습니다. 그런 저열한 자들의 저열한 행동에 예수님은 얼마나 모욕감을 느끼셨을까요?
‘이렇게 잡혀 온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빌라도의 말에도 모욕감을 느끼셨을 것이고, 채찍질한 후 총독의 군병들이 자신을 무지하게 조롱할 때도 한없는 모욕감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가장 큰 모욕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루살렘 사람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모욕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는 이스라엘의 왕인데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거기 달려 있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어주겠다...”
십자가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예수님을 힘들고 비참하게 한 것은 바로 이 같은 그들의 모욕과 조롱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와 같이 그들은 동일한 말로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좌우에 있는 강도들까지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했습니다.
물리적인 고통은 신체를 상하게 하지만, 모욕과 조롱은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면에서 모욕과 조롱에 더 큰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안타까운 자살 사건을 보면, 단순히 괴롭힘을 당하고 폭력을 당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수없이 일어나는 정신적 학대와 모욕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맞아서 아픈 것보다는, 그 과정에서 받는 상처와 경멸과 모욕이 더 힘든 것입니다.
지속적인 괴롭힘을 받던 어떤 중학생 아이가 자살을 했는데,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울고 있던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 cctv에 찍혔습니다. 그 아이는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옥상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울고 있던 그 아이의 마음은 그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요?
사람은 마음과 정신이 다치지 않으면, 그래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정신이 무너지면, 사람은 일어서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이시고 하늘의 하늘이라도 그분을 모시기에 부족한 분인데, 지금 악하고 미련하고 비열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을 받고 계십니다. 신체적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둔감해지고 무뎌지지만, 모욕과 조롱은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내면을 더 괴롭고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적 단절을 영적으로 경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죄를 자신의 아들에게 지우고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단순한 십자가의 물리적 고통보다 그런 내면적 영적 고통과 괴로움을 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에,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할 때, ‘얼마나 아프셨나?’가 아니라, ‘얼마나 괴롭고 힘드셨나?’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에게는 자연스레 한 가지 실천사항이 생깁니다.
우리는 모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욕과 경멸과 조롱과 무시... 다 같은 행위들인데, 우리는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결코 사람을 모욕하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경멸하거나 모욕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진노하시고,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화를 내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예수님도 아무리 그 사람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경멸하거나 비하하거나 조롱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님의 본질적 성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자 그분의 제자로서 사람을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사는 세상을 보면 사람에 대한 모욕과 경멸이 매우 일상적입니다. 모욕과 경멸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쉽게 행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자신이 더 높고 힘이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삶과 생활에 오래 익숙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 자신의 한 부분이 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욕을 하면 안 됩니다. 설령 부당한 일을 당해도, 우리는 사람을 모욕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식으로 화를 내고 솔직하게 내 감정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욕하지 말고 모욕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하죠.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했을 때 혼을 낼 수는 있겠지만, 자녀의 인격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십자가의 고통과 모욕입니다. 예수님은 신체적으로 내면적으로 영적으로 총체적인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성경은 예수님이 당하신 조롱과 모욕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욕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욕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모욕하지 않고, 동시에 자신도 모욕을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악하게 모욕하더라도, 예수님처럼 이겨내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