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못한 가룟 유다
마 27:1~10
2022.09.25.
오늘 말씀은 복음서 안에서 마태복음만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의 마지막을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최후는 실제론 지금 여기가 아닐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은 빌라도의 재판이 남았고, 아마도 유다는 빌라도의 재판 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다음에 자신의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마태가 지금 여기에 유다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내용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도중에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 도중에 이 내용을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흐름이 아무래도 방해를 받죠.
둘째는 가룟 유다를 베드로와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는 바로 앞에서 베드로의 실패를 자세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다의 실패를 자세하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태복음이 이 두 사람을 의도적으로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두 번째 이유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와 가룟 유다의 실패 ...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우리로하여금 생각하도록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판 유다에 비할 순 없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왔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닭이 울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했기 때문입니다. 그 눈물과 통곡은 베드로의 무언의 회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판 유다도 어떻게 보면 베드로의 회개와 같은 회개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3, 4절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유다는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유다가 뉘우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요?
네, 그는 예수님의 산헤드린 공회 재판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예수님이 자신의 생사가 결정되는 그 시간에 오직 한 말씀만 하셨다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그것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 삼십을 가지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 앞에서 그는 자신이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습니다. “너의 후회와 고백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너의 후회와 고백은 네가 책임져라...”
유다는 예수를 넘겨준 일등 공신이었지만, 그들은 이제 유다가 필요 없습니다. 이제 유다는 지난 밤 자신을 감쌌던 사탄의 힘도 없고 성전 권력도 없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자기를 받아줄 곳은 하늘과 땅 어디에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 앞에는 오직 하나의 문만 열려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유다는 성소를 향하여 은을 던지고 물러가 스스로 목을 매게 됩니다.
네, 유다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그를 일찍이 안타깝고 불쌍하게 보셨습니다. 유다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영적으로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사탄과 성전 권력은 그런 유다를 속이고 이용하였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많은 불쌍한 사람이 있지만, 가장 불쌍한 사람은 영적으로 영원히 불쌍한 사람입니다. 살면서 조금 못 살면 어떻습니까? 조금 불행하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 그렇지, 우리의 짧은 시간 속에 그건 그리 불쌍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과 세상에 속임을 당하고 잘못된 생각에 매이고 계속 선한 기회를 잃고 ... 그래서 영적인 막다른 길에 이른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과 세상에 속아선 안 됩니다. ‘거짓말 좀 하면 어때? 넘어가면 그만이야...’ ‘하나님보다 돈이 중요하지, 돈만 많으면 아무도 날 무시하지 못해...’ ‘내가 성공하려면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해...’ 이런 사탄과 세상의 소리에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유다는 베드로처럼 분명 뉘우쳤는데 왜 안타까운 최후를 맞았을까요?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찾아가 받은 돈도 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고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정확히 고백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눈물과 통곡만큼이나 이렇게 유다도 자기 나름의 회개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목을 매게 되었을까요?
여기엔 2가지 두려운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혼자 후회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를 궁극적으로 용서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뉘우침이 참된 회개가 되려면, 자기 후회나 자기 반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후 우리는 그 회개를 내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첫째보다 더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의 회개에는 영적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시간과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네, 이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회개에는 돌아가기 어려운 시간과 지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언제나 죄를 짓는 존재입니다. 실수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는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라는 본질적 성품과 별개로, 한 죄인이 영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너무 늦은 시간과 선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그런 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과 지점을 넘으면, 돌아오기가 어렵고 돌아오지 못합니다.
이것은 제가 하는 말일까요? 성경의 말씀일까요?
네, 돌아오지 못한다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히브리서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이 히브리서 말씀은 엄중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 신약 신앙의 교과서와 같은 말씀인데, 의외로 우리가 잘 보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좀 생소합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서는 당시 시기가 그런 시기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믿음의 실패와 배반과 변절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또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5~17)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빼앗겼습니다. 사냥 후 돌아온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을 간구하였지만, 모든 축복은 이미 야곱에게 돌아간 후였습니다. 이것은 실제 사건이지만 동시에 영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사건을 영적으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지금 너희 중에 누군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고 쓴 뿌리가 되고 음행하고 에서와 같이 망령되이 행하면, 그래서 그런 삶과 행위가 오래되고 깊어지면,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수 있다...’
히브리서 후에 나온 요한계시록도 역시 동일한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짐승의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인데, 이것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처럼 이 땅에 사는 자들이 받는 동일한 상징적인 표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벨론 세상에 속하고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모습을 본받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면,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에게 그와 같은 짐승의 표가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삶과 생활이 오래되면, 그 사람의 짐승의 표는 낙인처럼 뚜렷해지고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나의 선택과 결정이고, 내가 묵시적으로 그 길을 간 것이고, 또 그 길을 너무 멀리 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다룬 인상 깊은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2000년에 개봉한 ‘박하사탕’이라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주인공의 마지막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맨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주인공은 무척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군대에 가고 불행한 일을 겪고 제대 후 경찰이 되고 결혼을 하고 나중에는 자기 사업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고 무너져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IMF 외환위기 속에 일과 사업과 가정과 사랑을 다 잃어버립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아름답고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옛날 그 순수했던 장소에서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가 ‘돌아가는 것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 순수했던 시절이든 하나님이든... 저는 이 영화가 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룬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분들 중에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다든지 하나님께 돌아간다든지 하는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해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죄도 용서하시고,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쉽게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도 돌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분들이 생각하는 좋은 모델은 바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다른 강도를 꾸짖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 강도는 그렇게 마지막에 극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우리도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라도 고백하고 회개하면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적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강도는 그때 막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악을 이미 하나님 앞에서 뉘우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예수님을 이미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강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네, 그는 이렇게 이미 돌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몇 번 임종을 앞둔 분에게 전도를 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청년 때 친척 형님으로부터 큰어머니께서 요즘 부쩍 쇠약해지시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큰어머니께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할 가까운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날 형님댁을 찾아갔습니다. 큰어머님을 잠깐 뵈러 왔다고 말씀드리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큰어머니께서 일어나 앉으시고, 저는 하나님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간단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믿으셔야 한다고 권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그때 큰어머니가 하신 말과 얼굴 표정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나는 되었다’라고 하시고 조금 싸늘한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긴 알지만 하나님과 무관한 한평생 삶이셨기 때문에, 비록 자신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신 것 같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몇 개월 후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제가 선교단체 간사 생활을 할 때, 또 한 번 그런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인의 부탁을 받고 암 말기의 한 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병실을 찾았습니다. 물론 그분과의 관계성은 없었죠. 그래도 혹시 복음을 들으실까 하는 마음으로 사영리를 읽어드렸습니다. 그러나 역시 어려웠습니다.
그분도 갑자기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돌아온 십자가 위의 한 강도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복음을 평소에 듣지 않는 사람이 마지막에 듣기란 쉽지 않다...’ 혼자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더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자신의 몸이 약하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으셔도,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삶은 그대로 이어지고 하나님에 대해 들으려는 열린 마음보다는 거부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전도는 우리가 평소에 미리미리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 그리고 내가 범죄한 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이것을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강도처럼 예수 믿으면 되지... 한편 강도처럼 마지막에 회개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은 사단의 거짓말입니다. 회개는 쉽고 언제든 회개할 수 있다는 말도 사단의 거짓말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는 그런 거짓말에 속아서 너무 멀리 가서 결국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훼방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너무 멀리 가고, 무죄한 피를 많이 흘리고, 악한 영이 우리를 붙들면, 돌아오기가 어렵습니다. 사탄이 영적으로 실제적으로 우리의 목덜미를 쥐게 되면 돌아오기가 어렵습니다. 세상과 사탄은 우리의 죄된 생활을 통해 우리의 목덜미를 쥡니다.
그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변함이 없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우리의 죄와 사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말라버리고 그러면 우리는 회개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죄인이지만 가룟 유다처럼 너무 멀리 가면 안 됩니다. 이 어둡고 악한 세상에서 우리는 때로 실수하고 죄를 짓지만, 그러나 죄를 지어도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만 죄를 지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만 죄를 지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적인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본받는 내 생활과 죄된 내 생활이 점점 편안해지고 아무렇지도 않으면, 영적으로 우리는 가라앉고 있는 것입니다. 분주한 삶 속에 하나님은 작아지고 돈은 커지고 거짓은 자연스러워지고 선악은 모호해지고 악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 멀리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돌아왔지만, 가룟 유다는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너무 멀리 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아래 늘 거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돌아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늘 막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마르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 들에핀믿음찬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그분께로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