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영상

정죄 받으신 예수님

믿음찬교회 0 240 2022.09.11 11:46
정죄 받으신 예수님
마 26:57~68
2022.09.11.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을 체포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연락을 받은 공회원들이 속속 도착하고,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의 최고 정책 의결기구이자 최고 재판소입니다. 거기에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와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 그리고 많은 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예수님에 대한 재판의 결론을 이미 정해 놓았습니다. 재판은 요식행위였고, 예수님을 심문하여 사형 선고할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결론을 정해 놓은 재판... 네, 잘못된 악한 재판입니다. 59절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이런 내용을 그들도 알고 예수님도 압니다.
이렇게 뻔히 알면서 재판을 한다는 것이 악한 일이죠. 자신들의 자리와 권력과 기득권을 위해서, 죄 없는 자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본래 사람의 재판은 하나님의 재판을 대리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재판과 판결이 온전히 공정하죠. 그래서 인간의 재판과 판결은 하나님의 법과 재판을 추종해야 합니다. 모든 법은 자연법에서 왔고 자연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재판과 하나님의 재판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 인간의 재판은 부패하고 정당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지금 이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은 그런 전형적인 인간의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산헤드린 재판은 그 진행 과정도 좋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칠 거짓 증인을 많이 세웠지만만, 서로 말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최종적으로 두 사람이 일어나 예수님을 성전 모독죄로 고발했습니다.
성전 모독죄는 중요한 죄이죠. 오래전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전 문에 서서 성전이 황폐화를 예언했다가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모독... 그런데 이 증언도 부실하고 예수님을 정죄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헐겠다고 말씀한 일이 없고, 새로운 성전 건물을 사흘 만에 짓겠다고 말씀한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항할 가치가 없는 그런 거짓 증언에 대해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준비한 것들이 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전임 대제사장이자 당시 유대 정치와 종교의 최고 자리에 있던 안나스가 예수님을 직접 심문합니다. 참고로 안나스는 자신이 대제사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 5명을 다 대제사장으로 세웠고 현재는 사위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세운 인물입니다.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나님께 맹세하라는 안나스의 말이 참 교묘하죠.
이와 같은 안나스의 말에 이제까지 침묵하셨던 예수님이 드디어 입을 여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이 예수님의 대답은 안나스의 말을 대체로 긍정하시는 말입니다. “네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가 생각하는 정도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 다음에 “그러나”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당시로선 그렇게 특별한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도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고유 명칭이 되고 또 신성을 가진 말로 굳어진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말에 아직 신성의 의미는 없습니다. 이 말은 다만 하나님이 보내신, 기름부음을 받은 특별한 사람, 즉 메시아라는 의미입니다. 
안나스가 말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안나스는 예수님께서 이 정도 사실이라도 인정한다면, 그것을 거짓으로 몰아서 하나님과 성전 당국을 모독하고 훼방한 죄로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히려 더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네, 이 말은 “네가 나에 대해 대체로 맞게 말하였지만,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내용을 더 말씀하셨습니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인자가 권능의 우편, 즉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말씀은 시편 110편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씀은 다니엘서 7장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다니엘서 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 두 개의 말씀은 구약의 특별한 말씀으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구약 말씀의 의미를 안나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나스는 자신이 원한 신성 모독의 결정적 증거를 마침내 예수님의 입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옷을 찢고 말합니다. “그가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신성 모독죄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의 비열한 악한 재판은 신성 모독죄를 확정한 후에도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고 구타하고, 누가 그를 때렸는지 맞추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참담함 속에도 예수님은 오직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산헤드린은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 일찍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예수의 처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신성 모독 죄로 사형을 허락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가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합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그런 자를 놓아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주저하던 빌라도는 결국 이 말을 듣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신성 모독죄로 정죄를 받고, 반역죄로 처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 모독한 것도 없고 로마에 반역한 것도 없지만, 예수님 자신의 진술에 의해, 그리고 이와 같은 인간의 악한 재판에 의해,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함부로 비판하는 사람 중에는 역사적인 실제 예수님을 범법자로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역사적 예수는 설익은 혁명가로 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다가 결국 유대와 로마 당국의 재판을 받고 한낱 범죄자가 되어 하루아침에 처형된 인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한마디로 유대와 로마 사법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의해 정죄된 범죄자라는 것이죠.
그런 그들 주장에 신빙성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진술을 믿지 않고, 그저 자신들 생각대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그때 거기 산헤드린에서 예수님을 정죄하고 함부로 대한 사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오늘 말씀에서 어떤 부분에 집중해야 할까요?
산헤드린의 악한 재판, 그런 재판의 중심에 있는 안나스, 예수님의 두려움 없는 자기 선언,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침묵 ...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까요?
저는 오늘 우리가 산헤드린의 악한 재판에 집중해보길 원합니다. 인간의 악한 재판... 이것은 역사의 오랜 현실이기도 하고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이 벌어지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기독교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그 사람이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재판장이라면, 우리는 그 사람이 좋든 싫든 존중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은 신앙을 떠나 시민으로서 우리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 존중과 복종을 무조건적으로 또 무분별하게 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또 성경적으로도 그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사도바울의 말씀은 한 가지 중요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아직 로마제국은 정상적인 건전한 국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후 로마제국은 급속히 부패하고 황제숭배를 노골적으로 시행하고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말씀이 나왔습니다. 바로 요한계시록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은 그런 사탄적인 국가와 악의 체제에 저항하고 싸우고 또 인내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는 한국교회가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씀은 항구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를 존중하고 복종해야 하지만, 그 권세가 악하고 잘못될 때는 분별하고 올바른 목소리를 내고 때론 인내하고 때론 저항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교회와 믿는 자들은 불가피하게 세상 현실과 정치 현실과 위에 있는 권세와 사람들에 대해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정치적이 된다든지, 특정 정치색을 가진다든지, 정치에 과도한 관심과 참여를 한다든지 하면 안되지만, 그렇다고 세상 현실이나 정치 현실과 담을 쌓고 그저 순수한 신앙과 하늘 나라와 영혼 구원만 말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 현실에 어둡고 분별할 줄 모르는 교회나 신앙인은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삶 따로 믿음 따로 그런 이상한 모습이 되고, 그런 믿는자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믿는 대통령, 그런 믿는 정치인, 그런 믿는 지도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하고 잘못된 것을 분별할 정도로는 세상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뜻과 성경 말씀을 따라 세상을 잘 분별하시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첫 번째로 이렇게 이 재판이 잘못된 재판이라고 분별해야 하고, 나아가 둘째로 예수님은 이 잘못된 재판 결과를 침묵과 인내 속에 받아들이지 않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신성 모독이라고 말한 안나스와 공회원들의 정죄를 받아들이셨을까요? 빌라도가 마지못해 선고한 국가 반역죄라는 정죄를 받아들이셨을까요? 예수님은 그와 같은 세상 법정과 인간의 재판 결과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악한 세상 권력자들이 자신을 정죄하기 위해 조잡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모습을 침묵 속에 바라보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히려 심판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AD 70년에 두렵게 실현되었습니다.
로마에 끝까지 저항하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첫 번째 성벽이 무너지고, 두 번째 성벽이 무너지고, 마침내 안토니우스 요새와 성전의 성벽도 무너지면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로마는 성전을 믿고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하던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그런 종교적 믿음과 저항의 상징인 성전을 철저히 훼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은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헤드린을 재판하고 그들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눈으로 영적인 관점으로 이 재판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예수님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은 산헤드린이나 빌라도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정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정죄를 받고 온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두렵고 힘드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그토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자기 앞에서 자기를 정죄하고 있는 산헤드린과 빌라도에게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뚜렷한 시각으로 침묵하시며 모든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악한 재판, 세상의 부당한 정죄... 이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런 일을 경험하고 보고 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재판과 세상의 정죄를 넘어서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기준으로 그런 인간과 세상의 정죄를 넘어서고 계십니다.
혹 여기에 어떤 잘못이나 문제가 있어서 실제로 재판을 받으신 분이 계십니까? 그 재판이 올바른 재판이면,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재판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재판이면, 그 결과에 좌우되지 마시고 평안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잘못된 세상의 재판과 세상의 정죄와 사람들의 평가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재판입니다. 하늘에는 천상 회의가 있고, 하늘 보좌 앞에는 하나님의 판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판결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사람들의 눈에 아무리 옳아도 하나님이 정죄하신다면, 우리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고 검사가 불기소하고 경찰이 무혐의하고 사람들이 괜찮다 해도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기뻐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제가 몇 번 예를 들었지만, 사랑의 교회가 공공도로 지하를 파서 예배당을 넓게 만든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사랑의 교회는 그것을 지금까지 법적으로 옳게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최종적으로 법적인 정당성을 인정받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옳게 보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라는 분이 재개발 보상금으로 수백억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법원의 결정도 무시하고 버틴 결과, 그분은 그렇게 많은 돈을 보상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은 어디에서 올까요? 재개발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피와 땀과 눈물에서 온 돈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당연히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믿습니다. 만약에 제가 그 조합원이고 불신자라면, 저는 하나님을 결코 믿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따라야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판단과 기준은 그것을 넘어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이 괜찮다 해도 안심해선 안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괜찮다 하시면, 우리는 세상의 판단과 정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용기있게 살아야 합니다.
개척교회를 하던 시절 저는 참 초라한 목사였습니다. 교인도 없고 돈도 없고 ...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실패한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저와 저의 작은 사역을 돌보아 주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아니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끌어주시며 저와 저의 작은 사역을 인정해주셨습니다. 네, 큰 교회 목사나 작은 교회 목사나 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살든 못 살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재판을 받든 평가를 받든, 이렇게 보이든 저렇게 보이든, 그 기준은 세상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런 영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산헤드린의 악한 재판과 정죄를 침묵과 자기 선언과 심판의 말씀으로 뛰어넘으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어두운 세상 현실과 사람의 정죄와 비난과 평가와 재판을 예수님처럼 뛰어넘어야 하겠습니다.
풍성한 한가위, 넉넉한 추석 명절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와 모습과 자취가 가득하시길 간절히 빕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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